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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12화)
3장. 순교(殉敎)(6)
“넌 착한 아이잖니. 나 불쌍한 거, 너도 잘 알잖아. 응?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다오! 앞으로는 정말 죽은 듯이 살 테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백문이 삶의 희망이라도 되는 양 장구가 손을 뻗어 잡으려 했다.
순간, 서걱거리며 잘려 나가는 열 개의 손가락.
너무 놀라 고통마저 잊은 듯 장구는 그저 백문의 얼굴만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장구 아저씨.”
그 순간, 한 줄기 구원의 빛이려나.
백문의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따뜻함이 서린 목소리에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장구가 서둘러 외쳤다.
“그래! 나야, 나! 장구 아저씨! 내가 항상 백 어른댁에 쓰실 나무 해다 드리고 그랬잖아! 물도 길어다 드리고. 나 기억하지? 장구야, 장구!”
백문이 작은 몸을 숙여 장구와 가까이 마주했다.
“착하다, 착해! 우리 백문이! 아이고! 우리 처사 어른! 그리 불쌍히 가실 줄 누가 알았겠냐.”
아버지의 죽음이 진실로 안타까운 듯 눈물인지 똥물인지 모를 것을 줄줄 흘리는 장구였다.
“아뇨. 제가 기억하는 장구라는 인간은 여기 없네요. 그 뱃속 깊이 숨어 있던 추한 마귀만 남았어요. 정화할 가치도 없는.”
얼굴은 다정히 웃고 있으나 나오는 말은 곧 장구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뭐? 뭔 말이야, 그건!”
이해를 못하고 있는가.
백문은 저 무식함에 문득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말이죠…… 너는 죽은 듯이 살 가치도 없다고. 그냥 죽어, 개자식아.”
일견, 허허롭다고 느낄 정도로 가늘고 빈약하시던 아버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어떤 거대한 하늘의 괴물이
만월(滿月)을 조금씩 집어삼키던 공포의 밤.
나는 검어지는 달빛을 등진 채 춤추시던
아버지의 손끝에서 갈라지는 회색의 공간을 보았다.
그 춤은……
어린 나의 마음에 너무나도 슬프고,
또 아름답게만 각인되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아버지의 그 춤.
그것은 신을 섬기는 사제(司祭)라는 존재들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스러운 의식이었다.
4장. 노인과 소년(1)
무슨 일.
과연 그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
아, 그래. 누군가의 속삭임을 들은 것.
그가 나에게 말했지.
울보, 그리고…… 살아가야 할 의미.
어떤 의미를 준다고 했던가.
이제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하나,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
멸망 이후의 정화.
마지막으로…… 그의 말에 수긍했을 때 치고 올라오던 극염의 고통.
새벽녘, 이제는 푸르기까지 한 만월이 걸려 있는 높다란 언덕.
이 하늘,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다.
달빛을 등에 업고 낙화(洛花)와도 같은 춤을 느리게, 느리게 펼치는 이는 아버지일까.
손끝이 닿는 공간마다 아지랑이가 뿌려지고, 내딛는 걸음마다 꽃잎이 사그라진다.
돌아본 하늘이 점점이 떨어져 아버지의 주위로 모여들고, 또 그 자리에 새로운 하늘이 생긴다.
억겁의 세월 동안 쉼 없이 춤추어 온 무희(舞姬)의 아름다움이 저럴까.
부드럽지만 육중한 감동에 내 작은 눈에서 이슬이 굴러 떨어졌다.
‘눈에 담았으면 가슴으로 품어야지.’
‘너무하세요. 아들에게 감추신 것들이 많네요.’
‘무얼 감추었단 말이냐?’
‘…….’
‘허허허, 내 사랑하는 문아. 언젠가 네 머리가 더 커졌을 때가 되면 이 고약한 아비의 뜻을 알아줄 날이 올 것이니라.’
‘때가 된다면…….’
‘네게 준 것이 정말로 없구나.’
‘사랑을 주셨잖아요. 분에 넘치도록.’
‘못나고 또 못나서 부족하기만 한 이 아비의 마지막 사랑, 네 한 번 찾아볼 테냐?’
‘어디 있는데요?’
‘너의 깊은 곳.’
“아버지이이이!”
백문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비명?
아니…… 그것은 애타는 그리움.
“흑.”
울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또 맹세했건만, 동산에 걸린 만월 속에서 춤추는 아버지의 꿈을 꿀 때면 이상하게도 어김없이 눈물이 흘렀다.
“문아, 슬픈 꿈을 꾸었느냐?”
느릿하면서도 차분한 노인의 음성.
“……예.”
“오너라. 이 할애비 품에서 오늘의 슬픔을 잊자꾸나.”
백문을 안고 등을 토닥거리는 노인은 나이를 짐작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하얀 머리칼과 수염이 얼굴을 가득 가리고 있었다.
“어쩌면 좋누. 우리 착한 문아(文兒)가 또 아침까지 잠들지 못하게 생겼구나.”
“죄송해요.”
“클클. 기왕 일어난 김에 할애비가 알려 준, 피부로 숨 쉬는 재주를 지금 해 볼 테냐.”
“예.”
노인의 품에서 벗어난 백문이 방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후우웁.”
그리고 아주 길게 숨을 들이켰다.
더 이상 허파에 공기가 들어갈 수 없을 정도까지 숨을 삼킨 후 모았던 숨을 천천히 아랫배로 밀어 넣었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세다 보면 어느새 단전 부위가 따뜻해지고, 그 안에서 발생한 묘한 느낌이 핏줄을 따라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얼굴이 빨갛게 변할 정도로 숨이 막힐 무렵이 되면 정신이 멍해지면서 몸 전체가 공간을 떠도는 무언가를 빨아들이듯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푸우우우…….”
백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참았던 숨을 뿜어냈다.
이런 호흡을 오십 회 정도 반복하고 나서야 노인으로부터 그만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어떠하냐? 이제 슬프고 괴로운 생각들이 가셨느냐?”
“예, 할아버지.”
“도가(道家)의 양생법은 참으로 신비한 부분이 많단다. 보아라, 이 할애비도 수십 년을 도가의 가르침을 따랐기에 지금 이렇게 무병장수하고 있지 않느냐. 몸이 건강함도 중요하지만, 정신의 어지러움을 물리치는 것이야말로 양생의 극의라 할 수 있느니라.”
노인은 따뜻한 눈으로 백문을 바라보았다.
그 앞에서 백문은 이제는 눈물이 다 말라 버린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노인과 시선을 맞췄다.
고(高) 노인.
이미 이름을 잊었다 하며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라 했다.
악요의 손에 이끌려 먼 길을 돌아 지명을 알 수 없는 계곡에 이르러, 폭포 위쪽에 홀로 집을 짓고 살아가는 고 노인을 만났다.
그것이 벌써 일 년 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백문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눈빛만을 보낼 뿐.
그런 노인에게 악요는 극공의 예를 표했다.
과연 악요와 고 노인은 어떤 관계일까?
서로 몇 마디 말도 없었지만, 백문은 노인에게 보이는 무한한 존경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노인에게 맡겨진 백문은 주름 가득하지만, 따뜻하기 그지없는 노인의 손을 잡고 계곡을 넘어 거대한 산의 정상에 올랐다.
“소가(蕭家) 아이가 네 이름을 알려 주더구나. 백무의 아들, 백문아.”
소(蕭)? 의숙의 진짜 성은 연(淵)이라 알고 있었는데…….
대체 정체가 뭡니까? 악(岳) 의숙.
“제 아버지를 아십니까?”
“물론. 네 가문과 백 처사는 오래전부터 알 만한 이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단다.”
“…….”
독하게 마음을 먹었거늘. 이상하게도 노인의 음성을 듣고 있노라면 뭔가 속에서부터 서러운 울분이 올라왔다.
“크윽.”
“많이 참았느냐?”
“흐윽……. 아, 아닙니다.”
“한(恨)이 쌓이면 독(毒)이 되니라. 어린 정신에 걸맞지 않은 독함은 자라서 마(魔)의 문턱에 발을 들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울어라. 세상 어느 곳보다 높은 이곳에서 발아래 가득한 구름을 보고, 저 창공에서 고고히 빛을 발하는 태양을 느끼며 울어라.”
어찌 백문을 저리도 정확히 평가하고 있을까.
혹, 악요가 귀띔이라도.
“네 속에 있는 흉함이 무엇이든 간에 너의 의지를 키워야 할 것이니라. 앞으로 먼 길을 가야 할 네게 그 흉함이 어떤 역할을 할지…….”
흉(凶)?
제 속에 그런 불길한 것이 있다고요?
한참을 서럽게 울던 백문의 훌쩍거림이 잦아들었을 때, 노인이 부드럽게 백문을 안아 일으켰다.
“가자. 아마 오래 머물지는 못할 테지만, 이 할애비는 네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려 한단다.”
그렇게 백문과 고 노인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백문은 그가 무한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방대한 학문적 지식과 더불어 세상의 모든 이치마저 깨친 듯 보이는 고 노인이었다.
아버지가 미처 전해 주지 못했던 배움과 진리의 시간.
백문은 고 노인에게서 그러한 것 모두를 솜이 물을 흡수하듯 자신의 것으로 빨아들였다.
더욱이 자칫 얼어 버렸을지도 모를 백문의 마음을 고 노인은 어루만져 주었다.
정말로 친손자라도 되는 양 무한한 사랑을 주며 백문이 받았을 충격과 분노, 슬픔을 조금씩 희석시키기 위해 애썼다.
백문 역시 그러한 마음에 보답하듯 차차 어린아이다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고 어느 정도 시기에 이르렀을 때.
백문은 참아 왔던 욕망에 한층 다가서게 되었다.
어둑어둑해진 저녁.
고 노인이 누울 자리를 정리하고 백문은 밖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슬쩍 몸을 돌려 별채로 들어갔다.
등(燈)을 밝히고 들어간 자리에 그것이 있었다.
죽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백문이 품에 꼭 안고 있던 죽간 뭉치들을 보고 고 노인이 무엇인지 묻자 악요가 대신 답했다.
한동백가의 유산이라고.
그 말에 고 노인은 흥미를 거두고 예에 따라 더 이상 죽간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후, 고대의 유물이 분명한 죽간들은 일 년을 이곳 별채 구석에 보관되어 있었다.
문득 백문이 본채를 향해 눈을 돌렸다.
괜스레 미안해지는 마음과 함께 나중에 반드시 고 노인에게만은 모든 것을 말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이내 죽간 뭉치 하나를 꺼내 바닥에 풀었다.
예전에 처음 보았던 것과는 다른 죽간.
전서로 기록된 것은 그대로지만 조금 더 알아보기 쉬운 것이, 비교적 이후에 제작된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온 고 노인의 음성에 백문의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문아, 시간이 늦었구나.”
“아, 예! 금방 가요.”
화들짝 놀란 백문이 서둘러 죽간을 접어 제자리에 끼우고 별채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