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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13화)
4장. 노인과 소년(2)
백문은 고 노인이 완전히 잠들었음을 확인하고 본채를 나섰다.
다시 등을 밝히고 들어간 별채.
조심스레 내려놓은 등불에 비친 백문의 그림자가 조금씩 흔들거렸다.
먼지가 쌓인 죽간 뭉치들을 다시금 하나하나 꺼내어 바닥에 놓는 백문.
모두 열두 개의 죽간.
여섯은 굉장히 오래되었고, 나머지 여섯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했다.
처음 이것들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묘한 기쁨.
마치 왜 이제 왔느냐며 탓하는 것만 같은 죽간의 기다림.
자신들을 꺼내어 어떤 운명적인 무언가를 찾아보라는 듯 죽간은 순식간에 백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너희에게 무엇이 있기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죽간을 풀어 바닥에 쫙 펼쳤다.
중간을 이은 껍질이 살짝 삭아 있기는 했지만, 들어 올리는 정도로 쉽게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분명 알아볼 수 있는 글자들은 많다. 한데 이어지지 않아. 그저 글자의 나열에 불과한 듯.’
설마 고대인들은 오늘날의 중원인들과 다른 방식의 언어를 사용했던가.
이번에는 상태가 좋은 죽간을 풀었다.
다 풀지 않고 일부만 살펴본 결과, 전서체로 써 내린 것은 동일하나 내용을 확인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역시.’
옛 신교의 사관들은 무엇 때문에 다른 식으로 기록을 남겼을까?
여기에 무슨 큰 비밀이라도…….
백문은 방금 풀어 낸 죽간 몇 조각을 들어 확인 가능한 부분만 먼저 해석했다.
자사제(磁司祭) 규정이 진흙에 몸을 담아 초극에 이르다.
명사제(明司祭)가 무(舞)에 감응하지 않는다. 그를 끝으로 명맥이 완전히 끊어진 모양.
신께 감사드리나이다. 광사제(狂司祭) 물계자(勿稽子)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몇 개의 죽간을 차례로 대충 살펴본 백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총단의 오사제 외에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사제들.
이들은 과연 누굴까?
괜히 마음이 불안해진 백문이 죽간들을 추려 제자리에 놓으려 했다.
그때, 문득 맨 아래쪽에 깔려 있는 가장 깨끗한 죽간 하나가 이상하게도 눈을 자극했다.
“…….”
그것을 집으려 뻗는 손이 왠지 모르게 떨렸다.
오줌보가 살살 간지러운 것이,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몸이 절로 반응하는 듯했다.
“흡!”
죽간을 풀어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글자들.
순간, 백문은 숨을 몰아 삼켰다.
‘아버지의 필체!’
전서와 예서의 중간쯤 되는 독특한 자체로 쓰인 글자들을 본 순간, 백문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마지막 죽간은 아버지가 기록한 것들이 틀림없다.
한데 아버지가 왜?
속에서 차오른 콧물이 숨을 막히게 하는 것을 느낀 백문은 생각할 것도 없이 꿀꺽 삼켜 버렸다.
그런 후 떨리는 눈으로 죽간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요사제(要司祭) 백초(白楚), 신께서 부르시어 하늘의 문에 들다.
백무(白舞), 낮은 자리에서 신의 뜻을 이어 갈 고귀한 요사제의 위를 계승하다.
백무.
아! 아버지!
* * *
백문이 바라보는 고 노인은 하나의 자연과 같았다.
있는 듯 없는 듯,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또 허상이 아닐까 싶기도 한 기묘한 느낌.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백문 속의 또 다른 백문.
드러난 의지와는 관계없는 자아가 있어 고 노인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찌하여?
저런 과분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자신이?
그날 밤, 죽간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한 이후 큰 죄를 저지른 것처럼 백문은 고 노인에게 죄스러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백문은 더 이상 죽간을 살피지 못했다.
고 노인은 흔해 빠진 도가의 제자일 뿐이라 자신을 말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백문은 알았다.
아마 고 노인도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거대한 힘을 감추고 은거한, 인간을 넘어선 존재일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악요가 고 노인에게 보였던 극진한 예(禮).
그것은 단순히 연장자에게 보내는 존경의 의미가 아니었다.
의식하지 않으나 어디에든 존재하는 만고불변의 대자연.
따뜻한 그의 미소를 보노라면 끝없는 신뢰와 사랑을 느끼지만, 또한 거대한 파도에 집어삼켜지는 미물이 되어 버리는 환상마저 들었다.
과연 자신이 이 초월적 존재에게서 보살핌을 받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픔 속에서 들었던 심연의 목소리.
그리고 그와 했던 약속.
새로운 삶의 의미. 멸망의 정화…….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고 노인의 웃음 속에서 산산이 분해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어느 날부터인가 여러 해를 함께 보내면서 백문은 자연 속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도가(道家).
스스로도 원하지 않았고, 고 노인 역시 굳이 도가의 일원으로 백문에게 가르침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백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자신이 그토록 거북해하던 고 노인의 그것에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도가에서 전하는 무(武)를 익힌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고 노인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백문은 하나씩 무위(無爲)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이런 백문의 변화에 놀란 사람은 고 노인이었다.
뜻하지 않게 백문의 능력 일부를 보게 되었으니 고 노인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대로 백문이 자연에 동화되어 세상을 잊고 또 세상에서 잊힌 채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우려가 생길 정도였다.
“문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제는 열세 살이 된 소년 백문은 늘 이 시간에 올리던 차(茶)에서 눈을 돌려 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예, 할아버지.”
요 며칠 뭔가를 깊이 고민하던 고 노인이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취침하자꾸나. 나이가 들다 보니 쉽게 피곤해지는구나.”
“아, 예.”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고 노인.
그의 눈에 떠오른 어떤 결심이 괜스레 백문을 불안케 했다.
두 사람은 방을 밝히던 등을 끄고 바로 자리에 누웠다.
잠들기 전이면 항상 옛이야기를 해 주던 다른 날들과 달리 고 노인은 말이 없었다.
“문이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대신 뜬금없이 자신의 장래 꿈을 물었다.
“전…… 모르겠어요. 지금처럼 할아버지 곁에서 모든 걸 잊고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기도 하고…….”
“또?”
“세상에 나가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제 손으로 일구고 싶기도 해요.”
더러운 인세를 평정하는 것.
한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그렇구나…….”
그 말을 끝으로 고 노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 때 같으면 바로 잠들지 않던 백문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 * *
멀리 검은 하늘이 울고 있다.
천지에 가득한 우레가 용의 현신인 양 끊임없는 괴성을 토해 낸다.
난…… 지금의 나는 무엇일까?
검은 구름에 닿을 듯 높이 떠 있는 나라는 존재.
그리고 내 앞에서 거대한 월도(月刀)를 부여잡고 하얀 말에 올라 위풍당당하게 유영하는 이.
천상을 수호하는 백마신장(白馬神將).
부리부리한 눈, 꽉 다문 입.
전신을 감싼 갑주가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나를 위협한다.
아니,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나의 뒤쪽 어딘가에 존재하는 깊은 어둠.
아수라(阿修羅).
내가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순식간에 반경 수백 장이 어둠에 휩싸인다.
여섯 개의 팔 하나하나에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병기들을 들고 하얗게 웃음 짓는 아수라.
너는…… 누구지?
백마신장이 아수라에게 말을 걸고 있다.
우렛소리에 섞여 확실치는 않으나 간신히 알아들은 한 마디.
‘떠나라.’
‘껄껄껄껄!’
백마신장의 말에 답하지 않고 아수라가 호탕하게 웃었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
나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으나 그의 웃음소리가 뇌와 심장을 휘저었다.
아수라가 나를 삼킨다.
그에 호통을 치며 말을 몰아 달려드는 백마신장.
곧 세상이 터져 나오는 검은빛에 완전히 잠기며 끝없는 비명이 귀를 찌른다.
“아아아악!”
잠시 숨을 헉헉대던 백문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채.
고 노인과 자신이 머무는 보금자리였다.
“하, 할아버지.”
어미를 찾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백문의 시선이 구석에 닿았다.
그곳에는 고 노인이 눈을 감고 굳게 입을 다문 채 좌정하고 있었다.
“이제 깨어났느냐.”
힘이 쭉 빠져 버린 목소리.
평소의 다정다감하고 근엄하던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저, 꿈을 꾸었어요.”
“그래…… 세상 모든 것이 한낱 꿈에 불과할진대.”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는 양 고 노인의 말은 백문을 향해 뱉은 것이 아닌 듯했다.
후다닥 일어난 백문이 고 노인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불편해 보이세요.”
고 노인이 눈을 떴다.
백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늘 총기 가득하던 눈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빛나던 생기는 사라지고 칙칙한 어둠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불편은 무슨. 넌 어디 아픈 구석은 없고?”
오히려 백문을 걱정하는 고 노인이었다.
“네, 할아버지. 그런데 제가 언제 잠들었나요?”
고 노인이 힘겹게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백문을 꼭 안아 주는 고 노인.
직접적으로 닿은 그의 가슴에서 울리는 심장박동에 백문은 마음이 포근해졌다.
……포근?
언제부터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백문은 스스로도 놀라 버렸다.
“잊자, 다 잊자꾸나…….”
백문은 그날 처음 고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