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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14화)
4장. 노인과 소년(3)


백문이 달라졌다.
겉은 똑같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던 눈빛이 사라졌다.
조금 더 말이 많아지고, 조금 더 아이다워졌다고나 할까.
그러나…….
백문의 그런 변화에 맞추어 고 노인도 변했다.
하루가 다르게 윤기를 잃어 가는 피부.
백설이 내린 듯 치렁치렁하던 머리칼이 점점 빠지고, 그 빈자리에 벌건 딱지가 생겼다.
전과 달리 잠이 많아지면서 구부정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백문을 바라보며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 보낸다.
그런 고 노인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던 백문은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항상 그의 눈과 손발이 되어 주었다.
고 노인의 이해할 수 없는 노화 현상은 분명 자신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백문도, 고 노인도 그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고 노인은 이전보다 더욱 엄하게 백문을 가르치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도가의 경전들뿐만 아니라 유가, 불가…… 심지어 도가의 친척이라 할 수 있는 무가(巫家)의 가르침까지.
고 노인의 행동은 마치…… 상대할 수 없는 어떤 막강한 존재로부터 백문을 보호하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무엇 때문에?
“달…….”
“할아버지?”
피부 호흡을 하던 백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고 노인의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
“달이 춤을 추는구나.”
그와 함께 고 노인은 흐릿한 눈으로 백문에게 시선을 주었다.
“우리 문이는 춤추는 달을 본 적이 있느냐?”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서웠다.
예전 고 노인에게서 느꼈던 미지의 두려움이 아니라 실존하는 공포였다.
설마 치매가 온 것일까.
“네 아버지가, 백무가 너의 깊은 곳에 심어 준 월무(月舞). 넌 기억하고 있느냐?”
쿠쿵!
스멀스멀 기어 나오던 소름은 크나큰 충격이 되어 정수리를 강타했다.
백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 노인을 꼭 부둥켜안았다.
지금 고 노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나 할까.

월무(月舞).

아버지가 오래전 달을 등지고 추었던 아름다운 춤.
혹, 그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주 예전에 잠깐 꿈에서 본 것도 같으나 백문은 그 움직임을 하나도 기억하지는 못했다.
“이크, 내가 무슨 말을……. 문아, 가서 물 한 잔만 다오.”
“예!”
정신이 돌아온 고 노인이 괜스레 자신의 헛소리를 탓했다.

물기 어린 눈을 슥슥 닦으며 서둘러 물을 긷고 돌아온 백문의 눈에 고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것만 같은 싸한 느낌에 안색이 창백해진 백문이 허둥지둥 고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고 노인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할아버지이이이!”
소리치는 백문의 주변으로 약하게 바람이 스쳐 갔다.
삐그덕.
순간, 소리가 난 방향으로 백문이 활에서 갓 쏘아 보낸 살처럼 달려갔다.
문이 반쯤 열려 있는 별채.
정신없이 뛰어 들어간 그곳에 왜소하게 말라붙은 노인이 있었다.
“하아, 하아…… 할아버지?”
고 노인은 백문을 등진 채 뭔가를 열심히 뒤적거리고 있었다.
백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저 자신이 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백문은 조심스럽게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조금씩 고 노인에게 다가갔다.
“흡!”
그도 잠시, 백문은 이내 숨을 들이켜며 자신의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백문은 보았다.
뭔가를 중얼거리는 고 노인의 어린 아이 같은 얼굴을.
그리고…….
그가 펼쳐 놓은 것이 바로 아버지의 죽간임을.
한동백가 선조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죽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었던 고 노인이었다.
한데 어째서 지금 백문의 허락도 없이 죽간을 개봉하여 하나하나 읽고 있는가.
경악한 백문은 그저 입만 벙긋거리며 고 노인의 옆에 털썩 주저앉을 뿐이었다.
고 노인이 빠르게 다음 죽간을 풀었다.
역시나 혼자 중얼거리면서 내용을 읽던 고 노인이 바로 다음 죽간을, 또 다음을 들여다보았다.

두 시진이 넘게 흘렀을까.
망연자실한 백문을 옆에 두고 고 노인이 서서히 일어났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제발 말씀 좀!”
급히 따라 일어난 백문이 그의 소매를 잡고 흔들며 애절하게 외쳤다.
휙!
소매를 털어 백문을 넘어뜨리는 고 노인.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했다.
이제는 어둑해지는 하늘.
멀리 보이는 산 정상에 반쯤 걸린 태양을 향해 고 노인이 걸음을 옮겼다.
후다닥 뛰쳐나와 그를 향해 백문이 뭐라 소리치려는 순간,
고 노인이 천천히 움직였다.
“……!”

땅에서부터 하늘로 천천히 올라가는 회색빛 무지개.
불투명하게 흐트러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공간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활짝 펼친 손가락 하나하나를 따라 갈라지는 허공 아래로 하얀 운무가 깔렸다.

눈을 감은 채 느릿하게 움직이는 고 노인.
그리고 그가 지금 행하고 있는 그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춤이었다.
넘어가는 태양을 향해 애타게 손짓하는 여인의 갈증인 양 고 노인의 몸짓에는 이해하기 힘든 그리움과 비애가 깔려 있었다.
너무나도 놀라 입을 크게 벌리고 동그랗게 뜬 눈을 감지도 않은 채 멍하니 고 노인의 춤을 바라보는 백문.
만월을 등지고 밤하늘을 가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고 노인과 겹쳐졌다.
분명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느낌만은 생생하게 살아나 백문의 작은 가슴을 그리움으로 한껏 물들였다.
이제 기억난다.
아니, 그날 보았던 기억이 아니다.
가끔 꿈에서 보았던 손짓.
마치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는 환상과도 같은 움직임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할아버지…… 아버지…….”
‘눈에 담았으면 가슴으로 품어야지.’
그럼요. 이미 마음에 새겨 두었어요.
아버지가 고 노인의 몸을 빌려 자신에게 뭔가를 전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달이 밤하늘의 중앙을 차지했다.
하나 그 순간까지도 고 노인의 춤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달빛 아래에서 더욱 다듬어지고 세밀해진 듯 거침이 없었다.
백문 역시 그 자리에 굳은 듯 서서 움직임 하나하나를 가슴에 담았다.
“아버지의 춤. 요사제의 월무.”
백문은 이미 말라 버린 눈물을 뒤로하고 조금씩 사라져 가는 회색 공간들을 응시했다.
머리로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알 수 있다.
자신의 몸이, 마음이 절로 따라가리란 것을.
슈우우.
두 손을 모아 달을 떠받치듯 들어 올렸던 고 노인의 손이 완전히 내려왔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입김.
마침내 고 노인의 월무가 끝났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버텨 온 고목이 바람에 쓰러지는 것처럼 고 노인의 육신이 천천히 주저앉았다.
“할아버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간 백문.
고 노인의 몸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고 노인은 자리에 누운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간간이 백문이 떠 주는 죽을 삼키며 실낱같은 생을 이어 갈 뿐.
아주 가끔 뭔가를 중얼거리기는 하지만, 그 또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고 노인이 그렇게 변해 버린 이유.
백문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날 그가 보여 주었던 아버지의 춤이 원인이리라.
자신에게 그것을 보여 주고자, 어쩌면 고 노인과는 상극이었을 수도 있는 그 춤을 무리하게 펼쳤기 때문일 것이다.

백문이 열네 살이 된 어느 여름날.
고 노인의 정신이 돌아왔다.
“으허헉!”
눈물 콧물 가리지 않고 쏟아 내며 백문이 고 노인의 손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네가 있어 주어 내 마지막 생에는 축복이었단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백문의 손을 꽉 잡고 고 노인이 말했다.
“더 오래 함께해야 하는데…….”
입술을 물어 오열을 참는 백문.
“네게 자리한 마의 근원을 내 손으로 완전히 끊어 냈어야 했는데…….”
마의 근원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세상과 너를 위해 이 할애비가 한 일이 없구나. 불쌍한 우리 문이…….”
“제게 너무나도 큰 행복을 주셨잖아요.”
콧물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백문은 흐느꼈다.
“문아, 이 할애비는 널 믿는다. 어떠한 괴악한 것들이 몸과 정신을 침범해 오더라도 반드시 이겨 낼 것을.”
“흐윽…… 예.”
숨이 차는지 고 노인이 깊은 호흡을 반복했다.
“너와 백 처사, 그리고 너의 가문……. 마교, 아니지. 일신교. 긴 세월을 넘어 진실의 뒤에서 웅크리고 있던 또 다른 진실들. 네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길 바랐던 것은 백 처사였단다.”
무슨 진실이요? 또 아버지가 왜?
“영원히 지워 부수고 싶었던 것은 외려 백 처사 본인이었을 게야. 나 역시 그러하고자 했고. 하나…….”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고 노인의 안면에 잔뜩 주름이 잡혔다.
그를 짓누르는 것은 육체의 고통일까, 정신의 거북함일까.
“장구한 세월 동안 기다려 온 운명이란 괴물이 그것을 놓지 못하게 하더구나.”
장구한…… 세월을 기다려 온 운명?
쉬이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가까이 오너라.”
백문이 몸을 굽혀 고 노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들어 백문의 정수리에 얹는 고 노인.
순간, 백문은 뜨겁고 찌릿한 무언가가 백회를 통해 빠르게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뇌령(雷靈)이라 한다. 거칠고 고집만 센 아이지만 너와 친해진다면…… 너를 충분히 사마지기(邪魔之氣)로부터 보호해 줄 힘이 될 게야.”
“하, 할아버지!”
아니 될 말이다.
백 년을 가까이 세상과 호흡하면서 얻은 자연의 힘.
고 노인이 가진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그 힘을 주다니.
자신은 그런 과한 애정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너에게 많은 말을 해 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구나.”
회광반조이려나.
고 노인의 눈이 한순간 강하게 빛났다.
“다 담았느냐?”
월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졌던 무형의 유산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았던 그날의 춤.
“솔직히 모르겠어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할아버지만 제 곁에 계신다면 그런 것들 쯤.”
“아니다, 아니야. 그래서는 아니 돼. 넌…… 넌 꼭 이겨 내야만 해. 네 속에 공존하는 그것을 영원히 추방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도, 고 노인도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알려 주지는 않는다.
“달이 말해 줄 것이야.”
“예?”
고 노인의 얼굴에 홍조가 생기며 자비로운 미소가 지어졌다.
“달이 왜요?”
“네가 잊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고 노인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백문의 심장은 덜커덕 내려앉는 듯했다.
“미안하다, 문아. 또한 이 세상 모든 만물들도…….”
고 노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이제 끝이 오는가.
“할아버지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고 노인이 마지막 숨을 크게 뱉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으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