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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15화)
4장. 노인과 소년(4)
고 노인이 떠났다.
백문을 말년에 얻은 축복이라며 아끼고 사랑해 주던 그가.
아버지를 대신해 그 자리에서 언제나 있을 것만 같던 마음의 조부.
그런 그가 어린 백문을 두고 무위의 세계로 들어갔다.
섭섭하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아야 할 자연의 법칙이건만, 백문은 서러움과 슬픔에 한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울어라. 세상 어느 곳보다 높은 이곳에서 발아래 가득한 구름을 보고, 저 창공에서 고고히 빛을 발하는 태양을 느끼며 울어라.”
뜨거운 물이 흐르는 이 눈알을 뽑아 버리고 싶을 만큼 가슴이 아팠다.
참지 말고 울라 했던 고 노인의 당부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정말로 울고 싶지 않았다.
“흐으으윽! 허엉!”
하늘도 백문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가.
백문이 싫어하는 얄미운 태양이 먼 산 뒤편으로 서서히 사라지며 세상을 어둠에 잠기게 해 주었다.
검은 괴물에 완전히 가려졌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달.
그날 나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은 괴물에 대한 공포심이었을까,
아니면 달의 무사함에 안심해 버린 아이의 순진함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버지의 아름다웠던 춤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을까.
울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힘껏 안아 주시던 아버지.
그리고 나의 작은 손에 쥐어 주신 빛나는 작은 구슬.
그 안에는 이글거리는 불꽃과도 같은 문양이
스스로 광채를 뿌리는 듯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5장. 아버지의 기억(1)
이곳은…….
내가 부모의 기쁨 안에서 태어나 원한을 속에 품은 채 떠났던 나의 집.
어두운 밤, 불이 켜진 나의 보금자리에 누가 머물고 있는 것일까.
“잘 모르고 오신 듯합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다.
살아 계셨던가?
설마 지금까지 이 모든 것들이 꿈?
“대하기 어려운 분께 농을 걸 정도로 못 배우지는 않았습니다만.”
누구지? 아버지와 말하고 있는 사람은.
“귀한 분이시라 마땅히 예를 갖추어야 하겠지만 다짜고짜 이상한 말씀을 하시니 더 이상 모시기 불편하군요.”
아버지의 축객령이다.
“저는 진심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없지요.”
그 순간, 내 몸이 벽을 통과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버지와 문을 등지고 앉은 사내가 있었다.
그런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안개 같은 것이 그의 주변을 돌며 형체를 흐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 처사, 아니…… 요사제(要司祭).”
요사제.
그래, 맞아.
아버지는 태초에 신이 낮은 곳에서 세상을 돌보라 하며 내리신 숨겨진 사제들 중 하나.
“원하는 것이 뭡니까?”
평소와는 달리 아버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마치 일격필살을 노리는 대호의 자세인 양.
“이제야 좀 말이 통하겠네요.”
“마사제(魔司祭), 총단을 벗어나 이곳을 찾은 이유를 말하시오. 숨은 사제들에 대해서는 어찌 알았는지도.”
검은 안개 속에서 마사제라 불린 자가 하얗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대로 신의 이면(裏面)이자 교의 무력을 대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숨겨진 사제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것이 당연하지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제들은 몰라요. 무사제가 교사에 오른다면 모를까. 해서 남은 기록도 제가 태우고 왔습니다.”
뒷일을 철저히 대비하고 왔다는 말이었다.
“죽어가는 교사를 두고 총단을 떠나 이곳으로 온 것은 필시 급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겠군요.”
아버지의 표정이 풀렸다.
자세히 보니 내가 아는 아버지의 생김새가 아니었다.
훨씬 젊고 힘이 가득한 모습.
아버지에게도 저런 젊음이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에 나는 새삼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예. 제게는 정말 필요한 것이지요.”
“교율을 어기고 총단을 비울 정도로?”
“먼저 시작한 자는 무사제 헌원청이었습니다. 수천의 형제들을 베고 중원으로 진격하지 않았습니까?”
대립각을 세우던 총단의 반대파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중원을 휩쓸었다는 무사제 헌원청.
“헌원청은 정말 무서운 잡니다. 원래대로라면 마사제의 위는 그의 것이었어야 하겠지요. 그만큼 무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괴물. 제가 먼저 마사제가 되었기에 교사께서 그에게 무(武)라는 명칭을 내릴 정도였습니다.”
“지난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라면 그만하셔도 되오.”
“암요, 신교의 모든 역사와 힘을 기록하는 자리, 요사제가 당신이니까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겠죠.”
삐그덕.
그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머니?
고운 모습의 여인이 아이를 업은 채 들어와 따뜻하게 덥힌 차를 따른다.
저 아이, 나일까?
“좋은 대접 감사드립니다.”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마사제.
어머니 역시 가슴에 손을 교차해 일신의 예를 보냈다.
“형수께서는 절 어렵게 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생각보다 유쾌한 놈이라서요.”
가볍게 농담하는 마사제를 향해 차분한 미소만을 보이던 어머니가 곧 방을 떠났다.
“아까 그 아이, 다음 대 요사제겠군요.”
“……그렇게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오.”
아버지의 입에서 힘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사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오. 왜 날 찾았소? 숨겨진 사제들을 알아서도 아니 되거니와, 알았다 하면 바로 죽음이 내릴 것을 모르시오?”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없이 엄했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사제와 일전을 치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요사제께서는 심판의 날을 믿습니까?”
심판의 날.
백만의 교인들이 꿈에서도 기다린다는 그날.
“신께서 주고 가신 말씀이외다.”
삼경(三經), 아니, 육경(六經)에 기록되어 있다는 신의 말씀.
“만약 그날이 온다면 그게 언제쯤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가늠코자 함도 불경이오.”
“보세요, 요사제. 지금 이 세상을 말입니다. 천하는 유래 없는 혈해에 잠겨 있지 않습니까. 무사제의 중원 정벌과 그에 맞서는 신검의 중원연합. 게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혼(魂)이라는 하늘의 재앙에다 황실까지 끼어들었잖습니까.”
마사제의 말이 맞다.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가 세상에서 지워졌으니.
“노쇠한 황제는 이미 태자에게 모든 정사를 맡기고 칩거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신교는 또 어떻습니까? 위독하신 교사께서는 곧 하늘의 문으로 드실 것이고, 무사제가 교사의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어요. 대란으로 중원의 정사연합에서 힘깨나 쓰는 이들 대부분이 죽었고, 신검이라는 젊은 피가 새로운 우상으로 떠오르고 있죠. 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 거침없던 파괴의 행보를 멈춘 채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기도 하고요.”
“…….”
“새로운 세대교체의 시대를 맞아 벌어진 전란에 더해 다가올 태풍을 기다리는 시기란 말입니다.”
확고하게 주장하는 마사제의 말에는 빈틈이 없었다.
“그것이 심판의 날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이오?”
“멸망 직전까지 갔던 이 세상. 누군가 다시 불씨를 살린다면 인세의 붕괴는 불을 보듯 빤합니다. 결국 심판의 날이 도래하는 것이지요.”
단정을 짓듯 말을 뱉고는 차를 홀짝이는 마사제였다.
“마사제, 그대는 심판의 날이 멸망의 날이라 생각하시오?”
“적어도 가정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는 틀림없습니다.”
아버지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마사제, 당신은 더욱 총단에 남아 혹시 있을지 모르는 혼란을 수습해야 함이 옳지 않소이까?”
“그것으로 해결이 된다면 왜 제가 이곳에 있겠습니까.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틀어막아야지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마사제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필요한 게 뭡니까? 답답하게 돌리지 말고 말하시구려.”
“광사제(狂司祭).”
“뭣!”
아버지가 순간적으로 놀라 외쳤다.
“물계자(勿稽子)의 유산. 요사제께서 제게 말해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치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듯 아버지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광사제? 물계자?
왜 아버지는 마사제의 말에 저토록 격한 반응을 보일까?
“마사제께서 그처럼 탐욕에 빠진 인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소이다.”
하늘거리는 검은 기류 안에서 마사제가 또다시 웃음을 지었다.
“탐욕이라니요. 신의 종으로서 무척이나 불쾌한 말씀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광사제의 유산을 찾으시오! 실존했는지조차 불확실한 인물이거늘.”
“전대(前代) 요사제께서 그의 흔적을 발견했음을 압니다. 신에게 감사드리며 함께했던 모두에게 죽음을 내리셨다지요?”
아버지의 아버지.
전대 요사제였던 백초.
친조부가 그토록 잔혹한 인물이었나?
“한데 어쩝니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으니.”
“…….”
“물계자는 아득한 고대에 잠깐 해동의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인세에서 완전히 사라졌소.”
“예, 저도 조사해 보았지요. 신선(神仙)이 되고자 세속을 버리고 떠났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물계자 이후로 광사제의 명맥은 완전히 끊겼고요. 살아생전의 그는 사제를 넘어, 교사를 넘어 신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최강의 존재였다 하더이다.”
뭔가 아쉬워하는 듯 입맛을 다시는 마사제였다.
“다시 묻겠소. 탐욕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광사제의 유산을 묻는 것이오?”
“세상을 구원코자 함입니다.”
“헛소리! 내 알기론 무사제 헌원청은 냉혹하고 포악한 자는 맞지만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 정도의 그릇은 아니오. 다시 말해 심판의 날을 불러올 만한 자가 아니란 뜻이외다. 새 황제가 탄생한다면 그 또한 내부의 일로 정신이 없을 터이며, 신검 고단(高丹)은 더더욱 혼란의 주범이 될 수 없소. 하나 있다면 혼! 파멸에 가까운 자인 것은 틀림없겠지만 자체로 멸망을 가져올 존재는 아닐 것이오. 한데 당신, 마사제가 세상을 구원한다? 누구에게서?”
한 번 터지자 아버지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호통이 쏟아져 나왔다.
“누가 그들이라 했습니까?”
“허!”
말을 바꾸는 듯한 마사제의 태도에 아버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교 내부에 감도는 어둠이 있어요. 아직은 광명 아래에서 미약하게 보이는 작은 어둠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거대한 암흑으로 자라 세상을 삼킬 겁니다.”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아버지가 힘없이 몸을 풀었다.
“요사제께서도 어느 정도는 느끼셨잖습니까? 그래서 아드님을 다음 대 요사제로 만드는 일에 주저하심이 아닙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아버지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무도 하지 않겠다면 제가 할 겁니다. 마사제는…… 신의 이면. 당신이나 다른 이들과 다르게 신의 폭력성을 순수하게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징벌자. 제가 아니라면 누가 이 괴롭고 험한 일을 하겠습니까?”
진지하게 말하는 마사제.
조금 전과 같은 약간의 장난기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니 알려 주세요, 광사제의 흔적을.”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마사제를 노려보았다.
마음속에서 거부와 허용이 뒤섞여 싸우는 듯 아버지는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나의 시험을 통과한다면.”
이윽고 아버지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결심을 굳힌 것처럼 보였다.
“좋습니다. 저 역시 요사제와 손을 나누어 보고 싶었지요. 이제는 전설이 되어 세상에 없는 광사제를 제외하고 숨겨진 사제들 중 최강이라는 당신, 백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