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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16화)
5장. 아버지의 기억(2)
또 같은 꿈.
아침 햇살이 눈을 찌르는 것을 느끼며 백문은 잠에서 깨어났다.
역시나 머리맡에는 아버지가 남긴 죽간의 마지막 부분이 펼쳐져 있었다.
“하아…….”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가 직접 기록한 죽간을 보며 잠든 날이면 항상 같은 꿈을 꾸었다.
오래전, 아버지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마사제가 대화하는 꿈.
마치 누군가 자신의 기억 속에 그날 일어났던 일을 억지로 집어넣은 것처럼 말이다.
“마사제…… 광사제.”
과연 자신의 꿈에 나타나는 그것들이 정말로 실제였을까?
죽간의 중반 이후,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버지와 마사제의 대화.
꿈과 다름이 없이 기록된 그날 밤의 일.
혹,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닐까?
광사제, 물계자.
꿈인지 계시인지 모를 그것이 맞다면 물계자의 흔적을 처음 발견한 이는 조부 백초였다.
또한 그는 비밀을 지키고자 함께 길을 나섰던 일행 모두를 죽여 입을 봉했다고 했다.
최초로 꿈을 꾼 즉시, 백문은 백초가 쓴 것이라 여겨지는 죽간을 세세히 살폈다.
신께 감사드리나이다. 광사제 물계자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한 뿌리에서 나왔으나 이제는 다른 길을 걷는 자들.
유일하신 신의 이형(異形). 진실이 아닌 그 이단의 땅에 미친 존재가 있도다.
딱 세 문장.
광사제와 관련된 것이라 보이는 부분은 그것이 다였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표현들이 광사제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는가.
아버지도 마사제에게 이것 외에는 더 이상 말해 줄 것이 없었을 것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백문이 서둘러 세면을 마치고 숲이 시작되는 곳으로 달려갔다.
둥그렇게 솟은 봉분.
그 흔한 묘비 하나 없지만 자라 올라온 풀을 정성스레 깎아 놓은 모양이 그 정성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할아버지.”
봉분은 고 노인의 무덤이었다.
고 노인이 세상을 떠난 지 여섯 달이 지났다.
그사이 백문은 조금 더 자라 볼 살이 빠지고 약간은 아이의 티를 벗어난 듯 보였다.
전통 예법에 따라 향을 올리고 고개를 숙이는 백문.
잠시 후, 무덤을 향해 따뜻한 웃음을 보낸 백문이 곧 거처로 뛰어갔다.
백문의 하루 일과는 늘 같았다.
고 노인의 무덤에 인사를 올린 다음에는 아버지가 가르쳤던 기 체조를 한차례 하고, 한숨 호흡과 피부호흡을 연이어 시행한다.
피부호흡까지 마치면 악요가 그토록 강조했던 체력 단련에 들어간다.
엎드린 채 팔을 굽혔다 펴는 것을 몇 천 회 반복하고, 계곡에서부터 산 정상까지 세 번을 쉬지 않고 뛰며 왕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활동이 끝나면 정신 수양이 이어진다.
신체와 정신의 조화를 위해 백문은 보유하고 있는 모든 계열의 학문을 스스로 익혔다.
마지막으로 해가 떨어진 밤이 되면…….
월무.
백문은 달을 바라보며 춤을 추었다.
아버지의, 요사제의, 고 노인의 춤을.
처음에는 정말로 떠오르지 않았다.
시작도, 중간도, 끝도 알 수 없는, 그 애절한 몸짓들.
누군가 기억과 마음을 틀어막은 듯 도무지 생각의 끈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이 너무도 답답해진 백문은 고 노인이 그러했듯 옛 죽간들을 주욱 펼쳐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왜. 왜 떠오르지 않는 거냐?’
자책도 심하면 병이 된다.
눈 밑이 검어질 정도로 노심초사하며 신경을 쓰다 보니 겨울의 초입에 이르러 감기까지 들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이 죽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춤을 재현하실 수 있었을까?’
자신 따위는 죽어도 넘볼 수 없는 그런 능력.
무너지기 직전의 고 노인이었지만 그는 그저 훑어본 것을 끝으로 월무를 거의 완벽하게 세상에 끌어내었다.
‘뭔가 다른 것이 있어. 기록된 역사가 아닌 다른 것들.’
만약 고 노인이 흐릿한 전서를 읽어 내고 또 이어지지 않는 글자들을 어떻게든 해석해 내었다 치더라도 단순히 그것만으로 몸동작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눈으로 본 것이 분명했다.
몸짓 하나하나가 이어지는 그런 광경을.
하지만 어떻게?
“젠장!”
간만에 튀어나온 말이 욕이라니.
스스로 뱉어 놓고도 놀라는 백문이었다.
‘할아버지, 어떻게, 어떻게 하셨나요? 저는 정말로 모르겠어요.’
낙담한 백문이 죽간을 들어 허공에 펼치며 대답 없는 고 노인을 향해 물었다.
“달이 말해 줄 것이야.”
“예?”
갑자기 문득 떠오른 고 노인의 마지막 말들.
“네가 잊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제가…… 잊었지만, 달이 말해 줄 거라고요?”
달이 말해 준다, 달이.
뭔가 크나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백문은 꽥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죽간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달이, 달이 말해 준다.”
촤악!
백문이 만월을 향해 죽간을 펼쳤다.
“오오!”
들었다.
수백, 아니, 어쩌면 천 년이 넘었을지도 모를 죽간의 속삭임을.
보았다.
검게 가려진 뒷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몸짓을.
빠직!
저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죽간 끄트머리가 살짝 쪼개졌다.
하지만 지금 백문은 너무나도 흥분한 나머지 그런 것을 의식할 겨를조차 없었다.
달빛을 막은 죽간 뒷면에 인간의 형체가 보인 것이다.
깨알 같은 구멍들이 이어져 만들어 내는 모습들.
그것은…… 춤을 추는 인간이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랬다.
고 노인은 이것을 본 것이다.
비록 그가 말한 것처럼 달에 비추어 찾아낸 것은 아니지만 범상한 인간을 초월한 그의 눈은 어두운 방 안에서 죽간에 박힌 미세한 구멍들을 보고, 또 그 이어짐을 발견한 것이다.
“아아, 달이 말해 준다는 것이 이것이었나요.”
두 눈을 타고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백문은 펼친 죽간을 그대로 달에 비춘 채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눈에 들어온 것은…….
토옥의 한 면 전체에 맺힌 완벽한 인간의 모습들이었다.
미세한 구멍들을 뚫고 나온 달빛이 토옥을 종이 삼아 그 완전한 형체를 만들어 낸 것이다.
각기 다른 동작을 한 다섯 명의 사람.
백문이 저도 모르게 죽간을 움직이자 그 모습들이 따로따로 조금씩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차례로 이어져 부드러운 동작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고대의 요사제들은 어떻게 이런 놀라운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게 의식을 가르쳐 줄 생각을 했을까.
다섯 그림자의 움직임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백문의 입가에 큰 웃음이 걸렸다.
* * *
탁탁탁탁!
날렵하게 바위를 뛰어넘어 내려오는 그림자.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읏차!”
그림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백문이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산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기를 벌써 네 번째.
백문은 이러한 전력 질주를 무려 다섯 번이나 할 수 있었다.
중간부터는 차오르는 숨을 거두고 피부호흡을 하며 지속적인 수련을 이어 가는데, 이토록 놀라운 기사(奇事)가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거처에 다다른 백문은 펄쩍 뛰어 절벽에 위치한 앞마당까지 뛰어내렸다.
“후아…… 후아…….”
그러고는 긴 호흡법으로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울부짖던 신체의 기관들을 달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지금 백문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신체에서 벌어지는 변화들을.
극한까지 혹사시킨 몸은 수련을 반복할수록 더욱 단단해졌다.
또 근육 줄기마다 강한 잠재력이 쌓여 가고 있었다.
달리는 중에도 무리 없이 행해지는 수준에 이른 피부호흡은 몸 전체로 자연의 기를 퍼지게 해 주었다.
키가 부쩍 자란 것은 아니나 신체의 기능은 이미 웬만한 성인 두어 명 정도를 합친 것처럼 완숙해졌다.
어린 사자, 그리고 뇌령.
월무를 추기 시작한 이래로 백문은 뱃속 어딘가에서 깨어난 사자를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심어 둔 씨앗이 자라듯 존재감조차 희미하던 그것은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처음에는 뜻하지 않은 사자의 울음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요사제의 월무가 계속되는 한 그 정기를 먹은 어린 사자는 언젠가 풍성한 갈기를 드리운 맹수가 될 것임을.
뇌령은 또 달랐다.
어느 날인가 갑작스레 뇌령을 느낀 이후, 그 고집 센 덩어리는 친구로서, 주인으로서 백문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학문에 열중하다 사지가 찌릿하며 마비되는 경우도 있었고, 육체를 단련하는 중 느닷없이 손끝에서 푸른 뇌기가 방전되어 살이 꺼멓게 타기도 했다.
뇌령과 친해지기 위한 백문은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응?”
이질적인 무언가가 있다.
자연에 가까우나 한결같은 이곳의 기운과는 다른 무엇.
갑자기 불안해진 백문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저도 모르게 뱉어 낸 신음.
시선을 돌리다가 발견한 이질적 존재는 사람이었다.
절벽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숲길 초입에 위치한 고 노인의 무덤.
그 앞에 낯선 인물이 우두커니 서 있던 것이다.
‘누구지? 이곳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설마 불온한 침입자?
긴 세월을 은거한 고 노인에게도 적이 있었나?
하지만 백문을 등진 채 무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위협도 느낄 수 없었다.
분명 네 번째 왕복을 시작할 때까지 이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 방문자는 극히 짧은 시간에 이곳에 이르렀다는 뜻.
몇 년간 생활하면서 약간의 변화에도 민감해진 자신이라면 낯선 이의 출현이 있기 전에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정상까지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각 정도.
백문이 방문자의 출현을 깨달을 만한 거리에서 여기까지 달려온다고 하여도 일각 안에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다시 말해 저 사람은 일반적인 무인의 기준에서 한참을 벗어난 강자라는 말이었다.
슬금슬금 두려움이 밀려왔다.
백문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방문자에게 접근했다.
처음 생각한 것처럼 악의를 가지고 찾아온 자라면 자신은 벌써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낯선 이는 보통 체격의 남자였다.
하얀 학사모, 소매와 옷깃에 검은 천을 덧댄 하얀 학창의를 입은 문사 차림의 사내.
짐작한 것처럼 그가 무인임을 나타내 주는 것은 허리춤에 길게 매어 놓은 검 한 자루가 전부였다.
조금 더 용기를 낸 백문이 문사의 앞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남자는 눈을 꼭 감은 채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검게 내려온 수염과 짙은 눈썹, 여인의 턱 선처럼 부드럽게 이어진 얼굴형.
누가 보아도 호감이 갈 만한 중년인이었다.
이윽고 중년인이 눈을 천천히 떴다.
순간, 백문은 번쩍하며 지나간 뭔가에 현기증을 느꼈다.
“실례지만, 어인 일로 이곳을 찾으셨는지요?”
중년인이 백문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따뜻해 보이면서도 서글픈 감정이 깃든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아니길 바랐건만…….”
“예?”
“자네가 백부님의 마지막을 지켜드렸나? 그렇다면 내 깊이 감사하는 바이네.”
중년인이 백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백문 역시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읍하며 예를 받았다.
백부님이라…….
고 노인에게도 세속의 인연이 있었던가.
그의 조카로 보이는 사내가 어쩐지 거북스럽지 않았다.
그런 탓에 백문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안으로 드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