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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17화)
5장. 아버지의 기억(3)


손을 맞이하는 주인의 예에 따라 중년인에게 차를 대접한 백문은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달이는 이의 기품이 그대로 느껴지는 향이로세.”
백문의 솜씨를 칭찬하며 그윽한 눈빛으로 차를 머금은 중년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고단(高丹)이라 하네.”
고단?
어디서 들었더라?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백문입니다. 할아버지의 조카분을 뵙게 되어 정말로 기쁩니다.”
“백부께서 자넬 친인으로 삼았다니, 나 역시 흡족하구먼.”
“한없는 사랑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듣기 좋으라 하는 말이 아니었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완전히 삭아 버린 인성을 이 정도까지 유지할 수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고 노인의 사랑 때문이었으니.
“편안히 가셨던가?”
“예.”
백문은 차마 그 슬픈 최후를 소상히 밝힐 수 없었다.
“호상(好喪)이었다니, 나도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 다시 한 번 자네에게 감사를 전하지.”
“…….”
한동안 말없이 고인의 죽음을 기리는 두 사람.
이어지던 침묵을 깬 이는 고단이었다.
“백부께선 고아인 나를 거두어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신, 부모와 같은 분이셨네.”
“저 역시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을 배웠습니다.”
고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때는 중원 사마(邪魔)의 무리 전체가 백부께 무릎을 꿇었지. 그분께서 이곳에 은거하시고 난 후에야 간신히 준동할 수 있었을 정도로 위대한 거인이셨어.”
“짐작이 갑니다. 대자연, 그 자체였던 분이셨죠.”
중원을 질타하며 악을 척결하는 고 노인의 모습을 상상하자 백문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악(惡)?
하지만 언젠가 자신이 그 사마의 정점에 설지도 모르건만.
“호오, 아직 어린 자네가 어찌 백부님의 근원에 대해 그리 잘 아는가.”
예상외라는 표정을 띠며 고단이 흥미 가득한 눈으로 백문을 바라보았다.
“제가 아닌 누구라도 할아버지의 모습을 본다면 그리 느낄 겁니다.”
백문의 말에 동의하듯 고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홀짝였다.
“몇 개월 전이었나? 괜히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바라보았네. 그때, 길게 꼬리를 끌며 별이 지더군.”
하늘조차 고 노인의 죽음을 슬퍼할 정도였나.
한편으로는 천기를 살피는 고단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백문이었다.
“바로 달려왔어야 했어. 한데 련(聯)에 급박한 사태가 생겨 그럴 수 없었음이 너무나도 애통하네그려. 간신히 해결하고 오니 이미 자연으로 돌아가신 그분의 마지막 흔적만이 눈앞에 있더군.”
“련…… 이라 하시면.”
“이제 곧 없어질 작은 단체라네. 그곳에서 잠시 몸을 붙이고 있지.”
뭔가 큰일을 하는 이가 분명했다, 고단이라는 사람은.
“내 나이 오십 줄에 이르니 세상일이라는 게 너무나도 덧없더구먼. 아마 예전 백부께서 느끼신 감정이 지금의 나와 같을 거라 생각하네.”
오십?
외면상으로는 이제 막 불혹에 이른 것으로 보이건만.
생각보다 고단이라는 사내의 본신 능력이 더 대단한 듯싶었다.
“자네는 어찌 백부께 몸을 의탁하게 되었는가?”
백문이 올린 차를 다 마신 고단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순간, 망설이며 바로 답하지 않는 백문.
“아, 이런. 내 실수했네. 함부로 물어도 될 것이 아니거늘.”
“아닙니다, 실수라니요.”
손사래를 치며 백문이 입을 열었다.
“저 역시 부모를 잃고 다른 분의 손에 끌려 할아버지께 오게 되었습니다. 선친께서 하늘의 문에 드신 후 갈 곳 없는 저를 따뜻하게 맞아 주신 것이지요. 지금도 처음 저를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빛에 담긴 따스함과 안타까움을 잊지 못합니다.”
덜그럭!
순간, 편안하게만 보이던 고단의 손이 굳어지며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갑자기 싸늘해지는 분위기.
하지만 백문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의 문, 하늘의 문이라…….”
뭐지, 이 어색한 공기는…….
“내, 자네 손 한 번 잡아 보아도 되겠는가?”
“아, 예.”
무슨 일인가 싶어 손을 내밀자 고단이 천천히 백문의 손목 부근을 잡았다.
맥(脈).
백문이 몸을 흠칫함과 동시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맥을 타고 들어왔다.
“…….”
굳은 표정을 한 채 말이 없는 두 사람.
“고 어르신?”
“……뇌령이 자네와 함께하고 있군.”
고단이 잡았던 백문의 맥을 놓으며 말했다.
“백문이라 했나?”
“……예.”
“인간은 말이야, 뭔가를 감추고 살아야 할 이유가 반드시 있다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자네에겐 그 이유가 무엇일까?”
“어려운 말씀을 주시는군요.”
“아, 이거 실례했네. 경황이 없을 텐데.”
빙그레 입꼬리를 올리는 고단의 얼굴에는 다시금 평안이 깃들었다.
“아무튼 백부께서 뇌령을 자네에게 전해 준 것을 보면, 출신에 관계없이 얼마나 자넬 사랑하고 신뢰했는지 알 수 있다네.”
“감사할 따름이지요.”
“언젠가 꼭 자넬 다시 보고 싶네. 백부의 뜻대로 자네가 얼마나 훌륭한 인물로 자랐는지. 기회가 된다면 날 찾아주겠는가?”
“물론입니다.”
조금 전의 어색한 분위기는 씻은 듯 사라지고 고단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가 세상에 나와서 나를 찾고자 한다면 강호인으로 보이는 아무나 잡고 물으면 된다네. 신검(神劍)의 소재를 구하면 아마 누군가는 나에게 자넬 안내해 줄 걸세.”
신검 고단.
백문은 조심스레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반드시 찾아뵈어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고단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배려에 감사하는 백문이었다.

고단이 떠났다.
느릿하게 걸으며 계곡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는 고단.
백문은 그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안개를 보았다.
그 역시 자연을 친구 삼아 살아가는 도가의 후예.
새삼 고단이 강호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보통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 날.
백문 역시 오랜 시간을 머물던 계곡을 떠났다.
죽간을 모두 땅에 파묻고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모두 지운 채.
방향이 없는 길.
마사제를 찾아 떠나는 기약 없는 길.
이곳에서는 백 년을 수련한다 하더라도 인세를 멸망으로 이끌 수 없다.
광사제 물계자.
인간을 넘어선 초인들을 굽어보았다는 절대적 존재.
그의 능력을 얻는 것만이 심연 속 청년과 약조했던 것들을 이룰 수 있게 해 주리라.
그것이 자신에게 남은 삶의 의미.
십 년이 훨씬 넘게 자취를 감춘 채 어디선가 힘을 키우고 있을 마사제.
그리고 그의 목적은 인세의 구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인세의 멸망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하지만 그와 자신이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점.
그것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하늘의 힘, 물계자의 유산을 원한다는 것.
이미 그것을 얻었을지 모를 마사제에게서 그 천하무적의 능력을 받아 낸다면…….
뿌리는 같으나 다른 길을 걷는 자들.
신은 유일하나 그 이형(異形)을 따르는 자들.
그리고…… 진실이 아닌 이단(異端)의 땅.
마사제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신의 아이가 되었다.
신교(神敎).
세상은 신교를 일신교(一神敎)나 일신마교(一神魔敎),
아니면 그냥 마교(魔敎)라 부른다고 했다.
기원조차 불분명할 정도로 아득한 과거에 태동한 종교.
신(神)이라는 불가해(不可解)한 존재를 향한
끝없는 믿음 하나로 뭉친 신비한 집단.
사랑과 평화, 공존과 번영을 꿈꾸며
신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았다는
그곳에 닿기 위해
평생을 선행과 기도만으로 살아가는 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