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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18화)
6장. 무진도(無眞島)(1)
“이보시게.”
누군가의 부름에 어둠이 휘감고 있는 형체가 살짝 몸을 움직였다.
좁고 후덥지근한 작은 공간에는 나무를 얇게 잘라 내 대충 이어 붙인 사이로 미약하게나마 빛이 선을 그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몇 개의 직선으로 누군가를 비추는 빛.
그에 닿은 부위에서 증기가 되어 날아가는 수분은 전사(戰士)의 땀일까, 아니면 눈물일까.
“자네 차례일세.”
증발하는 땀의 주인공에게 말을 거는 자는 흡사 괴물을 마주한 듯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몸의 대부분이 그늘에 가려 표정을 볼 수 없어 더욱 두려운 자.
검은 공간 가운데에서 하얗게 빛나는 두 개의 점이 천천히 열렸다.
“오래 걸렸네요.”
“아! 그, 그게 말일세, 앞쪽에 두 놈들이 워낙에 수준이 낮아서…….”
“됐습니다.”
벌떡.
“힉!”
말과 동시에 일어나는 검은 형체의 움직임에 기겁한 자의 입에서 짧은 놀람이 터졌다.
정면에 있는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남자.
들어오는 빛에 잠깐잠깐 드러나는 그의 몸은 먹이를 휘감은 수십 마리의 뱀들이 기어가는 것과 같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찔러 낸 바늘조차 구부러질 듯 선명하게 잡힌 근육은 적당한 긴장으로 팽팽하게 솟아 있었다.
황홀하리 만치 아름다운 남성적 매력이 물씬 풍기는 그는 오 척 반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신장만 아니었다면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후우…….”
안내자가 문을 열어 주길 잠시 기다리며 검은 사내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기운을 머금었다 뱉어 버리는 듯.
“들리나, 저 환호.”
암요. 살귀(殺鬼)의 피를 갈구하는 아귀들의 외침이죠.
“고생하시게나.”
삐그덕.
“우와아아아아아!”
“살귀다, 살귀!”
“죽여! 죽여어!”
눈을 찡그리게 만드는 강한 빛과 함께 사람들의 함성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살귀라 불린 작은 사내가 부드러운 흙 모래길을 걸었다.
환한 빛에 드러난 살귀.
천을 둘러 하체의 중요 부위만 가린 몸은 예상한바 그대로였다.
수백에 이르는 상처가 오밀조밀 드러나 있는, 그런.
식어 가던 땀이 후끈거리는 열기로 인해 또다시 증기로 변해 허공으로 사라졌다.
눈앞에 펼쳐진 반경 삼 장의 투기장.
원형으로 이루어진 모래밭을 빙 감싸고 있는 두꺼운 돌과 나무의 방어벽 뒤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벌린 채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살귀야! 오늘은 제발 좀 죽어라!”
“네 목에 은자 석 냥을 걸었다아! 이놈아!”
살귀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투기장 가운데에는 산만 한 덩치의 사내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복부만 가린 채 우뚝 서 있었다.
언뜻 보아도 자신보다 머리통 두 개 정도 더 큰 상대는 번쩍거리는 대머리를 벅벅 긁으며 우람한 근육을 자랑했다.
‘불필요한 부분이 많군.’
상대는 거대한 몸과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괴물과도 같았다.
“모오오오두 입 다무시오오오!”
그때, 투기장 구석에서 흰 옷을 입은 서생 차림의 사내가 톡톡 걸어 나오며 외쳤다.
천천히 잦아드는 인간들의 소리.
하지만 이글거리는 그들의 눈은 여전히 함성을 지르는 것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소이다!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을 장식할 주인공이 등장하셨소!”
“주인공은 무슨! 내 재산 다 갉아먹은 웬수덩어리외다!”
“거, 조용 좀 하라니까!”
누군가 불만 가득한 음성으로 소리치자 서생이 버럭 화를 냈다.
“이곳에 계신 도민(島民) 여러분.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이오리까? 다 더운 여름날 저자에 내던져진 얼음 조각 아니오? 부질없도다! 하나같이 부질없는 것이로다!”
나름 지적인 척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쓸데없이 지껄이는 모양이 괜히 우습기만 했다.
“그래도 살아야지요, 살아야지요. 살아서 이 더러운 세상, 어떻게 망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지요.”
맞다.
죽음은 그저 영원히 잠들어 잊히는 것일 뿐.
인간의 진실한 목표는 한 모금의 숨이라도 더 쉬어 생을 도모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 무진도(無眞島)인들은 세상이 망한 후 구원을 받아야 아니 되겠소이까?”
“맞아요! 맞아!”
“이 썩을 놈의 세상, 뒤엎어 버립시다!”
“참고, 참고, 또 참아서 세상의 끝, 심판의 그날까지 본인과 여러분들은 살아야 하오! 왜냐? 이 머리가, 이 가슴이 도저히 세상을 용서치 말라 하기 때문이외다!”
또 저 헛소리.
말을 함에 있어 인과관계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군.
그저 내뱉는 모든 언사가 따로따로 놀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소! 우리의 몸속에 꽉 들어찬 이 한(恨)!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 폭발해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오! 안 그렇소?”
사람들이 그의 말에 동조하며 고성을 질렀다.
이번에도 서생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을 진정시켰다.
“수많은 용사들이 우리를 대신해 이곳에서 스러져 갔소. 그들 중에는 이 섬의 형제들도 있었고, 외부에서 이름난 무인들도 있었소이다. 그들 하나하나가 우리의 한을 대신 짊어지고 부나방처럼 혼을 태운 게요. 여러분 모두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지요?”
“빨리 좀 갑시다! 속 터져 죽을라 하오!”
“크하하하하!”
서생을 말을 자르고 누군가가 짜증을 내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큼큼, 참 성격들도…….”
머쓱해진 서생이 헛기침을 한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알겠소이다. 서설은 여기까지만 하겠소. 큼, 그럼 여러분들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이들을 소개하겠소!”
서생이 덩치 큰 사내를 가리켰다.
“우리 무진도에 온 지 넉 달 만에 스물이 넘는 용사들을 보리 반죽으로 만들고 올라온 괴력의 영웅! 그의 손에 부서진 머리뼈가 몇 개이며, 그의 팔뚝에 쪼개진 갈비가 몇 개이더냐! 때리면 박살이요, 조르면 터지리라! 여러분, 북방 초원의 전사, 목골대를 소개하오!”
“와아아아!”
“목골대! 목골대!”
핏발이 선 눈으로 목골대를 외치는 사람들.
그에 화답하며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목골대의 얼굴에도 자신감이 절절 흘러넘쳤다.
“자자, 다음은…… 흠, 여러분들도 잘 아는 이라오.”
일순간 장내가 고요에 빠졌다.
“딱 이 년. 누군가는 신이 보낸 자객이라 하고, 또 누군가는 지옥의 마귀가 우릴 시험하고자 현신하였다고 했소.”
자객, 그리고 마귀.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꽤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거요. 무려 백구십구 회!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무수한 싸움을 거치면서도 살아 있는 자! 베이고, 부러지고, 뚫려서 이제는 죽겠거니, 이제는 속 좀 편안해지겠거니 하던 많은 이들을 애태워 가면서 결국은 다음 투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불사의 용사!”
서생이 살귀를 진하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살귀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살귀! 살귀 문백(文白)을 소개하오!”
“야! 이놈아아! 오늘이 네놈 터지는 날이다!”
“케켈! 어쩌면 좋냐. 오늘이 문씨 가문의 대가 끊기는 날이라서.”
서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이 살귀를 향해 촉새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 대부분이 원망과 증오가 뭉친 저주의 말들이었다.
살귀 문백.
아니, 이전까지 백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아이.
이제는 자라 열일곱이 된 백문은 어찌하여 이곳 투기장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오늘의 전투에 큰 기대를 건 이가 있을 줄 아오. 쌈짓돈에서부터 한 달 치 급료까지 다 털어 승부에 걸었을 것이오.”
“거, 뭔 헛소리쇼? 이런 고귀한 자리에서 내기라니?”
“커험, 말조심하시오! 신께서 허락지 않으실 일을 우리가 어찌.”
뜨끔한 사람들이 서생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아까 누군가가 은자 어쩌고 했지 않았나?
바보도 저런 바보들이 없었다.
“아아, 내가 실언을 했구려. 사죄하겠소.”
서생은 마치 큰 실수라도 저질렀다는 듯이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제 곧 그의 입에서 나올 전투 개시의 외침이 빨리 떨어지기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냥저냥 더 이상 야유를 하지 않았다.
그에 서생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처럼 여러분의 열기가 생생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소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오? 저 살귀가 이곳, 북투(北鬪)에서 목 용사께 죽임을 당할 것이냐, 아니면 또 살아남아 다음 대전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냐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 확실할 것이외다.”
사방에서 떠들던 인간들이 또다시 침묵했다.
지학(志學) 전후에 불과한 백문이 기라성 같은 용사들을 무찌르고 지금껏 살아남은 것 자체가 사실 이들에겐 신화나 다름없었다.
늘 죽을 듯, 갈라질 듯 위태한 싸움 속에서도 백문은 모두의 탄성을 자아내며 끝끝내 상대의 목을 따 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독살스러운 투지에 북투 관계자들도, 싸움을 관람하는 도민들도 경악했다.
그런 싸움을 백구십구 회.
지난주에 벌어진 대결에서도 백문은 어깨가 빠지고 아랫배가 뚫려 창자가 삐죽 나온 상태에서 상대의 목을 그었다.
부챗살처럼 뿜어지는 피를 흠뻑 머금은 채.
그런 탓에 범인(凡人)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 오가는 뒷돈의 현장에서 백문은 점점 기피 인물이 되어 갔다.
처음에는 어린아이가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모습에 애처로워하던 이들조차 이제는 백문의 죽음을 바랐다.
백문은 무조건 죽어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 정상적인 배당률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넉 달간 내로라하는 싸움꾼 스물을 두꺼운 근육 아래 떡처럼 눌러 죽인 야수와도 같은 북방 전사.
이 대결이 벌어지기 한 시진 전에 마감된 배당은 육 대 사로 정해졌고, 누군가의 조작이 없다면 백문이 사망했을 시 떼돈을 버는 이들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죽어!’
‘제발 죽으라고!’
‘네가 또 이긴다면 내가 직접 널 죽이리라!’
살기 어린 눈으로 백문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중들의 시선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 승부에 앞서 각 용사들은 하늘과 땅에 마지막 예를 표하시오!”
서생은 결투의 시작을 알리고 서둘러 장내를 벗어난다.
터벅터벅 걸어 이 장을 마주하고 선 목골대와 백문.
백문의 눈은 감정 변화가 전혀 없으나 목골대는 그렇지 않았다.
화가 난 것도 같고, 어쩌면 질투 가득한 여인의 그것과도 닮아 있었다.
“살귀라고?”
“그래.”
자신보다 적어도 열 살은 더 먹어 보이는 목골대에게 반말로 답하는 백문이었다.
“호랑이 없는 굴에서 왕 노릇 하느라 고생했다.”
“부끄럽군.”
“네놈의 영화도 이제 끝이다. 내 손에 죽을 테니까.”
목골대가 이를 드득 갈며 백문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했다.
“꼭 나를 죽일 필요가 있을까?”
어느 정도 싸움의 윤곽이 드러나면 사실 패자를 죽일 것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승자들은 패자를 살려 두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이들은 반드시 제거해 두어야만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생을 유지할 수 있으니.
백문도 처음에는 누군가를 살려서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자신을 향한 칼날뿐.
더욱 강해져 나타난 상대와의 싸움에서 백문은 죽음 직전까지 몰렸다.
만약 어린 사자의 포효가 아니었다면 목이 떨어져 팽개쳐진 고깃덩어리는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널 조각조각 찢어 먹고 난 이곳의 영웅이 될 거야. 언젠가는 너처럼 배척받겠지만, 상관없어. 다 죽여 버리고 신의 선택을 받으면 되니까.”
희망사항.
쿵!
목골대가 발바닥을 들어 세차게 내리찍었다.
그만의 고유한 예법.
이어 팔을 들어 올려 하늘을 향해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여러 차례 땅을 찼다.
쿵! 쿠쿵!
가까이 있는 자신도, 멀리서 지켜보는 관중들도 강한 진동을 느꼈다.
그만큼 저 야수와 같은 사내의 육중함은 유별났다.
“후우……. 네 차례다. 기다려 주마.”
“감사.”
백문이 조금 뒤쪽으로 이동했다.
눈을 감고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가 깍지를 끼고 천천히 아래로 내리는 백문.
관중들도 관계자들도 숨죽여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춤.
월무(月舞).
이제는 아주 희미하게 떠오를 뿐인 그 아름답던 춤을 재현하는 백문이었다.
백구십구 회의 싸움 동안 늘 추어 왔던 백무의 무(舞).
기묘한 엄숙함이 투기장을 감돌며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천천히 뻗는 팔 끝에서 미약한 아지랑이가 올라왔다.
내딛었다 돌리는 발아래로 하얀 연기가 솟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순간적이고 너무나도 약한 기운이기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누군가가 꼭 보아주기를 간절히 소망했지만, 지난 이 년간 그는 이 애절한 월무의 부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실 이 순간을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북투에 몸을 들인 초창기, 춤을 추는 백문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던 누군가가 경기 후 떡이 되도록 맞은 채 발견된 다음부터 암묵적으로 정해진 규칙.
이제는 백문의 춤을 조용히 감상하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로 자리 잡은 것이다.
슛!
아버지의 그것과는 달리 매우 짧은 시간에 끝난 춤.
“그럼 시작하지.”
백문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