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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 로드 1권(5화)
Chap. 2 리치 히트러스(3)


처음엔 그런대로 마법에 미치고, 검술에 미치고, 학문에 미치며, 세월의 공허함과 싸웠다.
그러나 그것도 겨우 몇 백 년이면 인세에 찾을 수 없는 성취를 이루어 버렸다.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 세월들.
할렘을 이루어 여인의 육체에 빠졌던 시간들.
술에 미치고 요리에 미치고 모든 기술들에도 미쳐 봤다.
그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했다.
결국 마족처럼 피에 미쳐 타인의 존재를 말살하는 것에서 기쁨을 찾았다.
곧 그것조차 너무 많은 피에 식상해 버렸지만…….
그나마 개중에 가장 성취감을 많이 주는 유희였다.
히트러스는 오델란을 마지막으로 새로운 목표를 정했다. 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레무니아를 일통하고, 마계를 정복해서 그 힘을 얻어야 했다.
레드 일족 라바의 레어 근처에서 마계의 문을 찾은 히트러스는 잠자고 있던 라바를 쫓아내야 했다.
에이션트 급 드래곤이지만 수면에 빠졌던 라바는 손쉽게 쫓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레드 일족을 대표하여 마계의 문이 있었던 자리에 레어를 튼 라바가 각성하여 다시 치른 싸움은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었다.
결국 라바는 처치할 수 있었지만, 무리한 힘을 쓴 바람에 라바가 소멸되어 버렸다.
이를 마족의 등장으로 오인한 레드 일족의 수장인 포브스와 그 일족이 찾아옴으로써 히트러스는 멈출 수 없는 싸움을 하게 된다.
시에라네 산맥 동부에서 시작된 쫓고 쫓기는 전투는 레드 일족 다섯 마리가 소멸되고, 미리안 제국의 서부와 산맥의 동부가 완전히 파괴되어 사막이 되어 버렸다.
레드 일족 다섯 마리를 헬 파이어와 오러 블레이드 빔으로 소멸시킨 히트러스는 도주를 결심한다.
이미 드래곤 로드인 막시무스에게 알려졌을 것이고 머잖아 다른 드래곤들이 나타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은 포브스 둘 정도를 상대할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로드인 막시무스와 겨룰 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야 했다.
그래서 포브스의 헬 브레스 공격을 몸으로 받으면서 워프를 강행했다.
라바의 레어로 워프한 히트러스는 자신의 몸이 온전치 못함을 깨닫는다.
레드 일족과의 무리한 전투와 마지막 포브스의 헬 브레스 공격에 몸이 파괴된 것이다.
서둘러 바닥에 숨겨진 마법진을 찾은 히트러스는 레어를 파괴하여 흔적을 지운 뒤, 뮤란 대륙에 있던 자신의 처소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곳도 안전치 않았다.
무엇보다 몸을 고칠 틈이 없었다.
드래곤들의 추적이 시작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저의 은신 비트까지 숨어든 히트러스는 드래곤들의 추적이 사라질 때까지 리치가 되어 오랜 시간을 수면에 빠지게 된다.
생체 현상을 죽여 마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것은 2차 신마대전 당시에 몸을 숨겼던 방법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어난 히트러스는 과거 자신의 왕국이 있었던 아틀란으로 돌아온다.
1차 신마대전 당시 왕국이 있었던 자리는 2차 신마대전을 거치면서 대륙이 나누어지고 급격한 조산운동으로 솟아난 테이블로스 산맥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특히 왕국의 남서부는 직벽으로 평균 1,300미터가 넘게 솟아오른 테이블마운틴에 들어가 버렸고 왕궁 역시 남부 테이블마운틴에 속했었는데 오랜 세월 속에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궁 지하에 있던 비트들은 마법진으로 보호되고 있었기에 워프로 찾아들어 가기에 무리가 없었다.
마법진으로 보호되는 방에는 각기 워프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났는지 기억조차 의심스러운 장소에 돌아온 히트러스는 그때부터 신을 꿈꾸며 준비하기 시작했다.
레무니아를 가지려면 먼저 드래곤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런 후에야 마계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드래곤들을 누를 수 있는 힘이 절실했다.
목표가 생긴 히트러스는 기뻤다. 활력이 넘쳐 나고 산다는 의미를 찾게 되었다.
드래곤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육체를 구하지는 않았지만,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되는 리치의 상태가 오히려 일을 하기에는 더 편했다.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준비가 갖추어져 갈 때, 히트러스의 몸에 급작스런 변화가 찾아들었다.
과거 포브스의 헬 브레스와 전투의 후유증으로 리치가 되었지만, 여전히 육체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간 육체는 소멸해도 라이프베슬만 있으면 언제라도 부활이 가능했다. 리치인 상태로 영생할 수 있었던 것은 라이프베슬에 주입한 힘이 항상 몸을 제자리로 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혼전이의 부작용으로 급작스럽게 생기는 육체의 붕괴에는 미처 라이프베슬이 반응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영혼전이로 얻은 육신이 강력한 충격으로 붕괴되는 위기 상황에서 리치로 변한 후유증이었다.
순식간에 찾아드는 육체의 붕괴에 히트러스는 조급하게 육체를 필요로 했다.
그때, 패밀리어인 루프가 찾아 준 것이 지금의 육체였다.
9살의 꼬마와 21살의 여자. 그 곁에 있던 기사는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렸다. 그리고 붕괴되는 육신을 막기 위해 여자의 생명력을 갈취했다.
그럼에도 육체의 붕괴는 그 도를 넘어섰다.
결국, 아무런 준비 없이 영혼전이를 시행해야만 했다.
그리고 15년.
히트러스는 그간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지금의 육체는 임시 거처였다. 완벽한 육체를 준비를 하기 위한 임시용 육체.
그런데 이 육체의 주인이 가진 정신력이 놀라웠다. 불과 아홉 살이었던 아이가 영혼전이를 거부한 것이다. 조급하게 진행되는 영혼전이 과정에서 마법의 강력한 힘을 이겨 내고 저항하는 영혼은 여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괴사와 같았다.
아마도 타고난 강한 정신력이 자신의 고모와 피붙이가 죽는 것을 목도한 원한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이겨 내고 저항하는 것 같았다.
히트러스에게는 너무 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영혼전이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미루다가는 이미 붕괴의 막바지에 이른 육체와 함께 자신의 영혼마저 소멸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히트러스는 방법이 없었다. 영혼을 소멸시킨 뒤에 영혼전이를 하는 것은 늦었다.
그래서 아예 먼저 아이의 육체로 들어가 육체에서 영혼을 소멸시키려 했다.
그 방법은 성공했다.
그런데 불과 15년 만에 육체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능력을 회복하지 못한 육체라지만 너무 빨랐다.
어차피 영혼전이를 위한 준비가 끝나면 다른 육체로 바꿔치기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수련에 전념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수련을 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의 성취도 이루었다.
육체의 각성에는 이르지는 않았지만, 6클래스 마스터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몸이었다. 이 상태로도 최소 50년은 넉넉히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의 붕괴가 생기다니…….

마침 몇 년 전, 루프가 발견한 몸뚱이가 있었다. 근래 그 몸뚱이는 루프에 빠져 종종 가까이 놀러 오곤 했다.
영혼전이의 가장 호기는 두 달이 동시에 떠올라 암흑에 속한 마나의 양이 최대치가 되는 강림축일인 디센트 갈라였다.
하지만 육체의 붕괴 속도도 문제였지만, 방대한 지식의 각인과 수많은 세월 동안 축적해 온 힘을 주입하려면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
결국 히트러스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완전하지 못하면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완벽히 준비해서 그다음 육체로 갈아타기로.

우우우웅…….
마방진이 신음을 내지르며 대기에 충만한 마나들을 흡수하고 있었다.
다시 그 마나는 마정석에 모이고, 이 정제된 마나들이 히트러스의 라이프베슬을 통해 아이에게로 주입되었다.
퍼득이던 아이의 몸은 이미 죽은 듯 늘어졌고, 그 머리맡에 히트러스가 라이프베슬에 손을 얹고 좌정해 있다.
쿠아아앙!
갑자기 석실이 흔들리며 마방진과 마정석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히트러스의 입이 조금 열리면서 빠져나온 하늘색 연기가 서서히 라이프베슬로 다가갔다.
어느 순간, 히트러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 안 돼!”
끼아아아!
갑자기 라이프베슬에서 기성이 터져 나오며 히트러스가 라이프베슬을 놓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진물이 흐르던 히트러스의 퀭한 눈에서 암광이 솟아났다.
“이…… 빌어먹을 노, 놈! 여, 여태 잘도 숨어 있었구나……!”
라이프베슬로 들어간 하늘색 연기가 떠는 듯 흔들렸다.
“이제 명하니 그곳에서 나와라!”
지옥의 어둠 가운데서나 나올 듯한 음성.
그것은 언령, 바로 언령이었다. 히트러스는 전력을 다해 언령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전 차원을 통틀어 언령을 이겨 낼 존재는 많지 않다.
하물며 육신을 떠난 영혼이 타인의 라이프베슬에 머무르며, 언령을 거부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라이프베슬로 파고들던 하늘색 연기가 서서히 빠져나왔다.
연기를 바라보며 히트러스는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빌어먹을 놈! 지난 15년간 용케도 숨어 있었구나. 마지막에 나 대신 영혼전이라도 할 참이었느냐?”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과 달리 히트러스의 안색이 나아졌다.
“이 육체의 붕괴 역시 네놈의 짓이 분명하구나. 하지만 어떻게……? 안 돼!”
히트러스가 육체의 붕괴 원인을 찾고 놀라는 순간, 갑자기 하늘색 연기가 라이프베슬로 숨어들어 갔다.
히트러스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분노에 찬 언령이 떨어졌다.
“이제 명하노니 나가! 나가라! 이, 이런! 크흐윽……!”
삐이익!
히트러스는 언령을 내리다 당혹한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카나리아의 울음소리라 여겨지지 않는 루프의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하늘색 연기가 라이프베슬을 통과해 아이의 정수리로 들어갔고, 이어 라이프베슬이 그 색을 잃어 갔다.
히트러스는 덜덜 떨며 두 손으로 라이프베슬을 감쌌다. 원래의 빛을 잃어 암갈색으로 변한 라이프베슬의 여러 부위에 균열이 나타나고 있었다.
영혼전이를 마치면 힘을 잃는 라이프베슬이었다. 15년 동안이나 숨어 있던 아이의 영혼이 영혼전이의 최종 단계인 라이프베슬을 통해 새로운 육신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명한 언령에 따라…….
“아, 안 돼…….”
하지만 이미 영혼전이로 마지막 힘을 소진한 라이프베슬은 허무하게도 부서지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와 같이 흘러내리는 라이프베슬.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가늘게 떨고 있는 카나리아 루프.
울부짖듯 신음하던 히트러스는 원독에 찬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이놈!”
오른손에 모이는 검은빛 죽음의 기운은 6서클의 죽음의 손 데드 핸드(death hand)였다.
순간.
“크아아악!”
아이를 내려치던 히트러스는 크리스털 관에서 사정없이 퉁겨 나 바닥을 뒹굴었다. 동시에 어디서 솟아났는지 크리스털 관 위로 뚜껑이 덮였다.
바닥에 떨어진 히트러스는 죽은 듯이 미동도 없었다. 그 눈과 귀,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르던 핏물도 멈추고, 차츰 말라 갔다.
마방진을 통해 끊임없이 마나를 흡수한 마정석은 다시 마방진의 설계대로 크리스털 관으로 모은 마나를 보내 주었고, 점차 마정석의 빛도 희미해져 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변의 마정석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거의 사라질 무렵, 죽은 듯 미동도 없던 히트러스가 조금씩 꿈틀거리더니 힘겹게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히트러스는 원망과 한탄, 그리고 진득한 미련을 남기고 차츰 빛으로 화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찾아든 정적.
어느 순간, 크리스털 관의 뚜껑이 열리면서 아이가 부스스 일어났다.
마치 몽유병을 앓는 것처럼 일어난 아이는 제단 곁의 마방진에 몸을 세우고 있었다.
마방진에서 솟아난 흰빛이 아이를 감싸 안는 것과 동시에 아이는 석실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