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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 로드 1권(9화)
Chap. 5 아르도스에서 일어난 기적(2)


어쭙잖은 귀족 정신은 이 어린 마법사를 투기했고, 결국 정쟁의 희생물로 삼아 버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쟁에 찢겨진 토르만 자작은 만신창이가 되어 새롭게 터진 전쟁터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당시 아르도스의 영주였던 헤더 폰 아르도스.
이후, 벌어진 십년전쟁에서 오딘 왕국에 맞서 숱한 승리를 거두는 주역으로 활동했다.
이후, 구국의 영웅이면서도 정쟁의 최대 희생자가 된 헤더 백작을 따라 지금의 영지로 와서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40년도 훌쩍 넘어 버린 지금까지 5클래스를 마스터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때의 그 상처가 너무 커서 깨달음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런 자작에게 로스는 왕도에 가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라곤의 수도에도 다녀오셨으면 합니다.”
“……!”
모두의 눈이 놀람을 넘어 염려로 차오르고 있었다.
토르만 자작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로스를 보았다.
“왕도를 다녀오라 하심은……?”
“도서관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가능하다면 우리 영지에 아카데미를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고요. 자작님께서 이 땅에 남기실 마지막 선물이 될 것입니다.”
“소…… 영주님……!”
“원하시는 모든 지원을 다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 년 안에 기틀을 잡아 주시고, 개관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소영주님……!”
“하하, 앞으로 하실 일이 널리고 널렸으니 연세를 핑계로 쉬실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
자작의 눈에 벅찬 물기가 차오를 때, 오토가 중얼거렸다.
“허! 자작님께선 저보다 더 오래 사셔야겠습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도서관에 아카데미까지 하실 일도 만만찮은데, 작은 주인님께서 더 하실 일이 많다고 하잖습니까? 제겐 그런 말씀이 없으셨으니, 저더러 먼저 죽으란 말씀이지요.”
“허, 허허, 허허허허, 그럼 당연히 나보다 먼저 태어나신 집사께서 먼저 죽으셔야지, 내가 먼저 죽기를 바라셨단 말이오? 허허허, 영지 걱정 마시고 먼저 가시오. 내 이 몸뚱이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일하고 따라갈 터이니.”
“왜? 아예 먼저 죽으라고 기원을 드리시지요? 사실 자작님이 저라도 없으면 이 젊은 척하는 늙은이들 사이에서 버티실 것 같습니까? 저 보십시오. 아문센 남작님이야 그렇다지만, 크레인 남작님까지 도끼눈을 뜨고 보잖습니까?”
“아니, 왜 오토 집사께선 젊은 이 사람을 가지고 늙은 분들 사이에 끼워 넣으십니까?”
“이 보십시오, 오토 집사. 해도 너무하시네요. 이 사람이 언제 도끼눈을 떴습니까? 이 사람은 거기 계신 늙은 분들과는 아직 상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에끼! 크레인 남작, 아문센 남작! 자네들이 아무리 부정해도, 저기 저 젊은 기사들이 자네들을 끼워 줄줄 아나? 꿈 깨시게. 허허허허허.”
“하하하하…….”
“푸훗! 하하하하…….”
다시 웃음이 터지면서 긴장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귀족 같지 않은 귀족들, 회의 같지 않은 회의, 누구의 반대도 다툼도 없는 일사천리의 회의,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노예도 있었고, 기사도 관리도 귀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어색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과 따뜻함이 묻어났다.
바닥까지 내려간 어려움을 함께 겪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것이었다.
“올만 경이 벨리스 경과 함께 자작님을 수행해 주시고, 자작님은 밤에 저를 잠시 만나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소영주님.”
“실링 씨!”
“예, 소영주님.”
의사 대표인 실링이 긴장하며 말을 받았다.
회의는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삼십 분 정도가 더 지난 뒤에야 비로소 끝이 났다.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이상하다 할 만큼 철저한 상명하복이면서도 파격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의였다.

***

어두운 밤, 테이블마운틴은 검푸른 실루엣에 감겨 있다.
해발 1,500미터의 정상은 언뜻 평평한 테이블을 보는 듯, 잡목들이 드러누운 끝도 보이지 않는 넓은 고원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밭고랑 같은 협곡들이 북동부에서 서남향으로 무수하게 파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깊은 것은 수백 미터에 이르는 것에서부터 낮은 것은 수십 미터까지.
하지만 그 양옆의 대지는 자체로 고원이라 할 만큼 엄청난 넓이였다.
하긴 누구로부터 나온 말인지 모르나 테이블마운틴의 크기가 카스틴 왕국과 비교할 정도라 하니, 그 규모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 어찌 측량하겠는가?
더 자세히 보면, 대지들은 그대로 암반 덩어리였고, 암반 틈을 파고든 작은 덤불이나 관목들과 드문드문 바위의 갈라진 틈 사이로 덩굴식물들이 깔려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협곡들이다.
그 넓이만도 엄청나 개중엔 폭이 1킬로미터를 넘는 것도 있고, 협곡 안에 또 다른 협곡들이 존재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런 협곡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거대한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호수나 숱한 웅덩이, 깊은 하천, 그리고 우거진 밀림까지, 이곳이 과연 테이블마운틴인지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아직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다는 테이블마운틴의 상공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날개를 치지 않는 것이 새는 아닌 모양인데, 이 높은 곳까지 올릴 연이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그때 두 번째 쌍둥이 달, 어센드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드러냈다.
달빛에 드러난 존재는 인간. 로스였다.
6서클의 플라잉 마법으로 상공에 머물러 있는 중이다.
지난 일주일, 로스는 밤을 새우며 테이블마운틴 상공 곳곳을 탐험했다.
실로 천혜의 보고였다.
수많은 과수들과 약초들, 최상의 목재들을 품은 거대한 원시림은 로스로 하여금 왜 미리 이곳을 찾아보지 않았는지 후회하는 마음마저 갖게 만들었다.
로스의 두뇌에는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각인된 이곳에 대한 상세한 지식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아득한 고대 카이너스 왕국의 터였던 것이다.
국왕인 히트러스에 의해 배신당한 백성들과 버림받은 후예들의 터. 과거의 흔적은 사라졌고, 새로운 세계가 그곳에 펼쳐졌다.
로스가 있는 곳은 해발 천오백이 넘는 지역이었다.
북쪽의 상부에는 아직 눈이라 불리는 하얀 것들이 쌓여 있었지만, 협곡의 안쪽으로 내려오면 오히려 밑의 영지보다 더 따뜻해서 마치 오월의 초여름 밤 같은 온화함이 느껴졌다.
지난 며칠, 로스는 영지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이곳에서 찾아냈다.
각인된 지식들은 갈수록 로스에게 힘을 주고 있었지만, 그 양이 너무 엄청나 미처 적용을 못 시키고 있었다.
지난 사흘간 밤낮을 잊고 작업에 매달렸던 로스는, 오늘 마지막 작업을 마쳤다.
이제, 침식을 잊고 그린 마방진의 위력을 확인할 때였다.

나흘 전.
로스는 테이블마운틴 중서부에서 바닷가로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를 발견했다.
세 곳의 협곡이 합쳐지면서 쏟아내는 물의 양은 엄청났다.
그러나 그 엄청난 폭포도 1,200미터가 넘는 절벽에서 떨어지다 보니 중간에 바람에 날려 실제로 바다에 떨어지는 물은 얼마 없었다. 중간 지역에서 뿌려지는 안개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장관을 보던 로스는 순간적으로 마법진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 마법진들을 연결한 거대한 마방진을 구상했다.
폭포와 아르콘 북서부의 첫 번째 호수를 연결하는 마방진.
그리고 다시 사흘이 흐른 것이다.
로스는 자신의 머리통만 한 마정석에 마나를 주입한 후, 첫 번째 호수로 텔레포트했다.
메스 텔레포트.
8클래스 유저 이상이 펼칠 수 있다는 위대한 마법.
그렇다면 로스는 8클래스의 대마도사라는 말인가.

그날, 아르도스 영지에 기적이 일어났다.
호수에서 하천을 흐르고, 다시 중심 수로와 핏줄 같은 각 수로에 이르기까지 투명한 맑은 물이 넘쳐흘렀다.
그 광경을 본 영지민들의 환호는 절벽을 울린 뒤, 하늘로 퍼져 나갔다.
뒤늦게 이를 확인한 영지의 귀족들은 원인을 규명하려 뛰어다녔지만, 솟구치는 물줄기 외에는 발견한 것이 없었다.


Chap. 6 몬스터 해역(1)


한 달.
갑자기 흐르기 시작한 하천과 수로로 인해 소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원인은 알 수 없었다.
15미터 수중에서 솟구치는 물줄기의 원인을 누가 찾겠는가?
설사 찾는다고 해도 물그림자에 가려진 마방진이니, 용천 현상이 생긴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이후 영지는 빠르게 발전해 갔다.
일정한 구덩이를 파고 심은 포도 묘목은 벌써 넝쿨이 뻗어 넓은 새잎을 냈고, 바닷가의 갈대와 탈곡한 밀짚을 태운 가루가 포함된 토양은 물을 머금어 그 점성이 월등해졌다. 어떤 식물이든 심을 수 있는 토양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우선하여 옥수수를 파종했고, 일부 지역에 감자도 심었다.
또 아문센 남작은 로스로부터 특이한 선물을 받았다.
야콘이라는 고대에 경작되었다가 대륙이 나뉘면서 사라진 구근식물이었다.
지금은 동토가 되어 버린 시비리(Sibiri) 지역의 산물이었다는 작물이 아문센 남작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아문센은 그런 로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당장 이 야콘을 어떻게 재배할지가 더 큰 걱정거리였기 때문이다.
아르도스 영지는 이전부터 목축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언제나 목초가 부족했다.
비록 아르도스 영지가 타 영지에 비해 갑절이나 크기는 하지만 양질의 토양이 부족하고 거의 대부분의 대지가 암반이어서 목초지의 한계가 명확했다. 그렇기에 목축을 한다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 화목 대신에 사용하는 생활 연료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몇 마리씩 목축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큼 목재뿐 아니라 화목도 구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로스는 일 년 전부터 모트모스 상단을 통해 구한 밀짚으로 들판을 덮기 시작했고, 일 년이 지난 지금 썩어가는 밀짚 사이로 잡초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정말 경이로운 생명력이었다.
이렇게 몇 년 만 지나면 암반의 상부는 마사토로 변할 것이고, 그때는 목장을 만들어도 무방할 것이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란셋이 수로에서 모은 토사를 뿌린 대지에서 엄청난 풀들이 우거졌다는 사실이다.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우거지는 넓은 초지에 소와 양들을 풀어 놓은 지 불과 며칠도 안 되어, 잉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먹이가 풍부해지자 짐승들이 먼저 알고 출산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한 달 전부터 쌓기 시작한 밭 둘레의 담까지 완성되자 수로와 함께 마치 체스판을 그린 듯 정돈된 모양이 나타났다.
수많은 돌들을 사용했음에도 수로 주변에는 아직 많은 석재들이 쌓여 있었다.
로스는 결국 남은 석재들로 도서관으로 쓸 건물을 지으면서, 서부 지역의 석재들부터 장화의 콧등 부분인 해머 케이프(hammer cape, 해머곶) 해안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영지 전역이 활기로 넘쳐 나고 있었다.
새 생명이 잉태되고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로스의 눈이 바닷가로 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