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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 로드 1권(11화)
Chap. 6 몬스터 해역(3)
“결국 부르터 후작의 염탐이라는 말이군요.”
“그렇다고 봐야겠구나. 최소한 부르터 후작의 조카인 자크 자작이 우리에게 호의를 가질 리가 없으니까.”
“하하, 아버지, 울고 싶은데 때려 주는 경우네요.”
“네 생각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작은 동물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던 아이가 어느 날부턴가 바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말 못하는 동물들보다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한다는 느낌.
어느 날부터는 스스럼없이 아버지라 어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간혹 나타나는 자신과 아내 리즈를 향한 애틋한 시선.
확실히 이전보다 호감을 표시했고, 주변 인물들에 대한 친절함도 달랐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물론 오랜 시간 동안 바뀐 현상이다.
지금도 딱히 뭐라 말할 것은 없었지만 달라졌다.
아니, 기운이 달라졌다고 할까?
싱그러운 미소와 머뭇거림 없는 대응. 하지만 그 느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았다.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리믹스는 느끼고 있었다.
리믹스 백작은 그런 아들을 보면서 결정을 해야 했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어차피 사라질 영지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자신이 그래도 힘을 쓸 수 있을 때, 아들에게 영지 운영을 맡겨 보기로 했던 것이다.
지금 아들은 자신보다 더 능숙하게 대응하고 있다.
아니, 자신조차 어쩌지 못할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로스의 눈이 크레인 남작을 향했다.
“남작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후후,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남에게 손을 벌리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인간 탈을 쓴 여우 집안에……!”
열혈 크레인 남작은 생각하기도 싫은 듯, 말을 줄였다.
“아문센 남작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의 목적은 염탐입니다. 아마도 후작은 모트모스 상단의 움직임 속에서 이상을 발견했을 겁니다. 다만 그것이 무언지 모르기에 넌지시 자크 자작을 보내 보는 것이겠지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이번에 모트모스 상단에서 구입해 운송한 양이 상당했으니까요. 곡물의 양도 그렇지만 가축이 많았던 것이 아마도 경각심을 준 것 같습니다.”
“문제는 자작이 들어와 영지의 변화를 보게 되면 왕도가 시끄러울 것이라는 점이지요. 그렇게 되면 이제 겨우 잡은 영지 부흥의 기회도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왕도의 여우와 쥐새끼들이 결코 잠잠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스의 계획에도 해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철통 보안이었다.
로스가 계획하는 일은 이곳 아르도스 영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로스는 리믹스 백작으로부터 염원을 보았고, 가신들에게서 한을 읽고는 풀어 나가기로 작정했다. 그로 인해 계획은 대폭 수정되었고 더욱 확실하고 알차게 바뀌었다.
그런데 똥파리 한 마리가 날아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포란 경, 어제 보니 광장에서 연극하는 광대들이 있던데…….”
“예, 남부 아르도스에서 함께 온 사람들입니다.”
“남부에서부터라고요? 영지민이라는 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아르도스의 주민입니다.”
“그들은 집시가 분명한데, 영지민이란 말입니까?”
로스의 반문이 길어지자, 오토 집사가 나섰다.
“작은 주인님.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집사님.”
“그들에 대해서는 저나 토르만 자작님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선대 영주님이신 헤드 백작님께서 구해 준 인연으로 영지에 남은 집시들이기 때문이지요.”
“정말 집시들이군요. 그들은 정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의외로군요.”
“초기엔 대부분 여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꽤 많은 것 같던데…….”
“제가 기억하기로는 처음에 영지로 들어온 이들은 아이들 스물여덟 명을 포함해서 백사십칠 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처음 영지에 왔을 때 제가 그들을 돌봤기에 기억합니다.”
“오토 집사께서 정확히 기억하시는군요. 이 늙은 마법사가 기억하기로 남자아이 아홉 명에, 당시 장로였던 갠지스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여자였지요.”
“맞습니다. 토르만 자작님. 갠지스 장로는 남부 영지를 떠나 올라오던 중에 죽었지요.”
“집사님, 그렇다면 그들이 남부 영지에서부터 함께 살았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작은 주인님. 십년전쟁 초기에, 선대 백작님께서 오딘 왕국 군대가 약탈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출동하셨던 적이 있지요.”
“이 늙은 마법사도 그때 함께 갔었는데, 도착해 보니 이미 남자들은 거의 죽어 버렸더군요. 그놈들은 전쟁 중에 관리하기 귀찮다고 어린 남자아이들까지 죽이고 있더군요. 흉악한 놈들…….”
보통의 경우, 유랑하는 집시들의 무리는 환영받았다. 떠돌이라 무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광대들의 곡예나 연극, 음악과 노래들은 최고의 유흥거리였기 때문에 보통의 영지에서는 환영을 받았다.
아틀란 대륙에서 영주들이 영지민을 달래기 위해 집시들을 이용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고, 어느 영지든 축제를 준비하려면 우선 주변의 집시들을 불러들이곤 했다.
더욱이 이들이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말들은 종자가 좋아 영지에서 환영받는 거래 품목 중의 하나였다. 좋은 종자의 말은 씨를 남기는 것만도 꽤 큰 금액에 거래되는 품목이기에 정기적으로 대륙을 떠돌고 있었다.
카스틴과 오딘 사이에 발발한 십년전쟁의 초기. 그레이너리 평야에서 급히 이동하던 집시 일가가 있었다. 그런데 피 맛을 본 오딘 왕국의 한 귀족 군대와 맞닥뜨리면서, 이들은 약탈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저 그 땅을 지나가는 유랑민에 불과한데, 그 귀족은 유흥거리로 약탈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것이다.
더욱이 오딘의 병사들은 평소라면 노예로 삼았을 남자아이들까지 관리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그 어미와 누이들이 지켜보는데서 죽여 버렸다.
헤더 백작이 도착했을 때, 이미 대부분의 남자들과 늙은이들은 죽임을 당한 후였다.
백작은 그 광경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즉시 검을 빼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노한 아르도스의 기사들 앞에 오딘의 군대는 처참하게 패퇴했다.
남겨진 사람들의 오열.
돌아서서 귀환하는 백작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이미 벌어져 버린 일이었다. 남자들은 거의가 죽었고, 부상당한 자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다.
남은 이들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어찌 보면 전장에서는 보편적인 모습일 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오열은 백작으로서는 지나치기 쉽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패하면 자신의 영지민들도 그리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오열 속에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남겨진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남자를 잃은 여자들과 아이들은 이 땅에서 살 수 없다. 누군가에게 다시 약탈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 갈 것이다.
결국 헤더 백작은 부상자들과 여자들을 추슬렀다. 그리고 그들을 영지로 보내 최대한 살길을 열어 주었다.
이후, 아라곤 제국의 편향적인 중재로 영지를 옮길 때, 그들은 남김없이 헤더 백작의 뒤를 따랐다.
“광장에서 연극을 하는 이들은 그들의 후예들입니다.”
“그렇군요.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자유를 잃는 것이라고 싫어하는 집시들인데, 그래도 우리 영지에 정착했군요.”
“대부분 여자들이라 도리가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집시들의 민족간의 유대감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낳은 아이까지 버려두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그들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한 것이니 정말 놀랍지요.”
“그렇구나, 로스. 이보게, 오토 집사.”
“예, 영주님.”
“로스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그들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나는 그들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산 것 같군. 자네가 그들에게 신경을 좀 더 써 주게.”
“예, 주인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그들은 원래 말이나 짐승들과 매우 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목장을 한번 맡기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것도 괜찮을 것 같구나. 그것은 네 뜻대로 해라.”
“예. 아문센 남작님, 어떠십니까?”
“하하, 마침 잘 되었습니다. 목동들이 부족하다고 펄스 경이 우는소리를 하더니, 뜻밖에 방법을 찾았네요.”
“어이쿠, 남작님. 제가 언제…….”
“이 사람아, 사람 좀 보내달라고 자네가 안 그랬나?”
“아, 그거야 그렇다는 거지요. 제가 언제 울었습…….”
“그 말이 그 말이지. 난 자네들이 와서 사람을 보내달라고 할 때가 제일 무서워.”
“하하하하…….”
“허허허허…….”
“핫하하하…….”
아문센 남작의 엄살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은 딱딱한 분위기가 풀어지는 순간이다.
잠시 후, 자크 남작 때문에 굳어졌던 마음들이 조금은 풀린 가운데 회의는 진행되었다.
“남작님, 집시들은 원래 타고난 손 재주꾼이라고 하더군요. 그들 중에 몇몇을 골라 대장장이나 기술자들에게 한번 맡겨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소영주님.”
아문센 남작은 연신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로스의 제안은 황당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연극 한 편 해 볼까요?”
“예? 연극이라뇨?”
“허허허, 연극이요? 좋지요. 이 늙은 마법사에게도 좋은 배역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하하하, 로스, 내게도 배역을 주어야만 한다.”
로스의 말에 무언가 느꼈는지 토르만 자작과 리믹스 백작이 흔쾌히 동참의 뜻을 밝혔다.
“하하하, 소영주님, 제게도 맡겨 주시면 감쪽같이 해 보이겠습니다.”
“아니? 연극이라뇨? 난데없이 무슨 연극이란 말입니까?”
“이보게, 크레인 남작. 자네도 늙어 머리가 안 따르면 아예 아문센 남작처럼 저렇게 가만히 있게. 아문센 남작은 그래도 중간이라도 가지 않는가?”
“아니, 크레인 남작님의 일에 왜 저를 끼어 넣습니까? 저는 무슨 배역을 맡을까 고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작님.”
“어라? 누가 뭐랬나? 눈치 없이 끼어들지 말라는 말이지.”
“에고, 크레인 남작님. 말귀를 그리 못 알아들으시니 늙었다는 소리를 듣지요. 예전엔 안 그러더니 왜 이럽니까? 정말 늙었어요? 부르터의 졸개가 온다지 않습니까?”
“그래, 나도 안다고. 자크 자작!”
아문센 남작이 그래도 풀어 설명하지만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크레인 남작.
답답한지 토르만 자작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 작자에게 영지를 다 보여 줄까?”
“아니, 자작님.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감히 어디를 들어와요? 당장 다리를 부러뜨리지 못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러니 소영주님께서 연극을 하자는 밖에!”
“글쎄, 그것이 연극과……?!”
무언가 깨달은 것일까?
“이제 알겠나?”
“하, 아핫하하, 그럼 저는 주연급으로 맡겨 주십시오.”
“어이쿠! 크레인 남작님 제발, 그저 이 일은 우리 젊은 기사들에게 맡기시지요.”
“이거 왜 이러나! 나도 숱한 연극을 보며 살아왔어!”
“아아…… 크레인 남작님……!”
크레인 남작이 참여한다는 말에 시끌벅적 소란스러워진다.
호탕하고 감정에 솔직한 크레인 남작.
좋은 표현으로 그런 것이지, 나쁘게 말하면 눈치 없고 주책없다는 말이 된다.
모두 고개를 흔드는 것이, 누구도 편드는 사람이 없었다.
눈치 없는 크레인 남작도 분위기가 느껴지나 보다. 아문센 남작에 이어 리믹스 백작에게 눈을 돌린다.
어려서부터 함께 지낸 친동기 같다는 세 사람이지만 이런 일에 편들 수는 없는 일. 둘 다 외면한다.
크레인 남작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무래도 기가 죽나 보다.
결국, 그 기는 로스가 살려 주었다.
“하긴 크레인 남작님이 반드시 해야 할 배역이 있습니다.
“소영주님……!”
“그래요. 남작님이 가장 중심 역할을 맡으셔야겠네요.”
“예! 맡겨만 주십시오, 소영주님. 이것들 보게, 어떤가? 음홧홧화하하하.”
“우우…….”
기가 살아난 크레인 남작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고, 좌우에서 야유하는 소리가 일었다.
기사들은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오토 집사님!”
“예, 작은 주인님.”
“모트모스 상단의 브로칸 남작님이 지점에 오셨더군요.”
“예. 이번에 물품들을 가져오는 일을 직접 하셨습니다.”
“집사님이 만나셔서…….”
이야기를 듣던 오토 집사는 함박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토르만 자작님.”
“예, 소영주님.”
“리자드맨들에게도 슬립 마법이 가능하지요?”
“허허, 예. 가능하지요. 그런데…….”
“하하, 연극에 소품으로 좀 쓰렵니다. 몇 마리를 잡아 주셔야 하겠습니다.”
“소영주님께서 연극에 쓴다는데, 당연하지요.”
“감사합니다. 이포란 경!”
“예, 소영주님. 말씀만 하십시오.”
“수고스럽지만 점심 식사에 그들의 대표를 초대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소영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