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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 로드 1권(17화)
Chap. 9 로스의 부모(2)


로스는 어머니 르엔느의 방을 찾았다.
언제나 가슴 벅차오르는 순간이다.

절벽에서 돌아와 다시 뵈었을 때, 어머니는 그 모습 그대로 늙어 계셨다.
꽃같이 아름다웠던 어머니 르엔느는 결혼과 함께 닥쳐온 가문의 몰락과 영지의 이전, 그리고 십오 년 전 닥쳤던 그 일, 그리고 한 달 전의 일로 아픔과 그리움, 슬픔으로 늙어 있었다.
그 그리움이 얼마였던가?
로스는 어머니의 품에서 몇 날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팔 년이 흘렀다.

“어머! 이게 누구니? 우리 로스가 이 엄마를 만나러 왔구나.”
르엔느는 그 눈가에 그늘처럼 남아 있는 고통을 지우며 로스를 반가이 맞아들였다.
“네, 어머니. 어제 종일 아름다운 어머니를 뵙지 못했더니 힘도 없고 의욕도 나지 않는 것 같아서요.”
“호호, 우리 로스, 제법 레이디를 대할 줄 아는구나. 그래, 이 엄마가 뭐를 해 주면 되겠니. 네가 좋아하는 감자파이를 구워 줄까? 마침 좋은 재료들이 들어왔나 보더구나.”
“그거 정말이세요?”
“호호호, 로스. 넌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이 엄마의 파이를 좋아하는구나.”
“그럼요, 어머니. 저는 세상에서 어머니의 감자파이가 제일 맛있어요.”
“호호호, 정말 오늘 로스가 이 엄마를 기쁘게 하려 작정한 모양인데? 좋아! 오늘 아들을 위해 엄마가 최고로 맛있는 파이를 만들어 주지.”
“와! 어머니, 정말 고마워요.”
로스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르엔느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로스가 안기기엔 르엔느의 품은 너무 왜소했다.
그럼에도 로스는 그 품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 만족을 느꼈다.
“호호, 우리 로스가 갈수록 더 어린아이가 되어가는구나. 이러다 다른 레이디들이 이 엄마를 질투하는 것 아닐까? 호호호.”
“후후, 어머니,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어머니를 질투해도 좋아요. 하라고 하세요. 저는 어머니만 계시면 돼요.”
“호호호호, 정말, 오늘 우리 로스가 작정을 했는걸. 그래, 그 거짓말 고마워, 믿을게. 호호, 오늘 이 엄마가 없는 솜씨도 다 발휘하마.”
르엔느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모든 상념들을 털어내고 있었다.

혼인하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낳은 아이…….
그래, 그 아이는 이곳에서 태어났지.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똑똑했고 언제나 내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었어.
아이는 다른 귀족들이 상상치도 못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밝았지.
남부 영지를 도망치듯 떠나면서 하녀들도 흩어져 버렸고, 모두가 감내하는 어려움에 부엌으로 들어간 나는 리믹스와 아이를 위해서, 가족들을 위해서 요리를 해야 했어.
어려운 영지 사정에 영지민들과 똑같은 식탁에 앉았던 시아버님과 가신들, 리믹스, 그리고 내 사랑했던 아이.
하루 두 끼씩 먹는 것도 미안해 하셨던 시아버님.
빵을 새로 굽기엔 반죽이 숙성되지 못했고, 아침에 먹던 삶은 감자를 내놓기엔 아버님과 가신들에게 너무 미안했어.
고기나 치즈는커녕, 계란 한 알도 없는 텅 빈 창고.
그래서 만든 것이 삶은 감자를 갈아 구운 감자파이.
들어간 것은 소금 약간과 양파와 비트 조각.
배가 고팠던지 부엌을 찾은 아이에게 화덕에 붙어 있는 오븐에서 막 익은 파이를 꺼내 주었어.
누르스름하게 익은 감자파이를 후후 불며 먹은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거라며 한껏 만족한 미소를 지었지.
그리고 이후로 가끔, 정말 가끔이지만 아이를 위해 감자파이를 구웠어.
그 아이가 그렇게 떠난 뒤, 난 감자파이를 잊었어.
그런데 십일 년 전, 이 아이가 오던 날.
나는 없는 재료에 문득 감자파이가 생각난 거야.
구수하게 잘 익은 감자파이를 받아 든 아이는 환하게 웃었어. 그 아이처럼…….
그러나 아이는 말이 없었지. 언제나 작은 동물들과 어울리고 사람들을 피하였던 아이.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그저 미소만 짓던 아이.
네가 그렇게 사라진 그 한 달.
…….
그리고 네가 돌아온 그날과 네가 깨어난 날.
네가 아닌, 내가 죽음에서 살아난 거야.
네가 첫마디에 감자파이라 해서 난 얼마나 놀랐던지.
그리고 기뻤던지.
그래, 넌 내 아들이야.
그 아이가 내게 보내준 내 아들이야.
널 위해서라면 이 엄마는 무엇이든 해 줄 거야.

“어머니, 정말 맛있어요.”
“호호, 그래? 이제 힘이 나니?”
“네, 어머니. 이젠 정말 힘이 나네요.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표정이 시무룩해지는 로스를 보며 르엔느는 가슴이 덜컥 떨어진다.
그런 르엔느를 보며 급하게 표정을 바꾸는 로스.
“금방 또 어머니가 보고 싶을 텐데 어떻게 참지요?”
“어머……?! 호호호호호, 정말……! 우리 로스가 이 엄마를 정말 행복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구나. 아, 누가 우리 로스의 아내가 될지 진심으로 부럽구나. 아마도 우리 로스가 흘려주는 기름에 빠져 죽는 줄도 모를 거야. 호호호”
“끙! 어머니. 정말 저는 어머니밖에 모른다니까요?”
“호호호, 누가 뭐래니? 지금이야 그렇겠지만 우리 로스도 아리따운 레이디와 혼인을 해야지?”
“아우……. 어머니.”
“호호, 모트모스 상단의 로디안 백작 따님이 꽤 미인이라 소문이 났더구나. 그렇지?”
르엔느는 매우 재미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로스 역시 그것을 알기에 일부러 더욱 애교를 부렸다.
“우웅. 어머니 그만하세요. 전 어머니밖에 없다니까요.”
“호호호, 아마도 그 따님의 이름이…… 누구더라?”
“알았어요, 어머니. 나중에 드리려던 것인데, 지금 드려야겠네요.”
갑자기 로스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응? 이게 뭐니? 이거 로스가 엄마에게 주는 거니?”
“네, 어머니. 이번에 토르만 자작님과 바닷가에 갔다가 우연히 주운 거예요.”
“어머나! 정말 아름답구나. 로스.”
“그렇지요, 어머니. 전 이것을 본 뒤, 세상에서 우리 어머니가 가장 어울릴 거라 생각했어요. 자작님 말씀에 따르면 고대의 보호 마법과 몸을 치료하는 마법이 인챈트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영롱한 빛을 뿌리며 상자에서 나온 목걸이는 아름다웠다.
정숙과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호두만 한 하트형 블루 사파이어를 중심으로 작은 녹색 에메랄드와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두 줄로 감싸고, 한 개의 콩알만 한 붉은 루비가 하트의 꼭짓점에 붙어 있는 목걸이.
화려할 것 같으면서도 전혀 화려하지 않고, 보석의 도도함이 튈 것 같은데도 오히려 깊은 신뢰감 같은 편안함에 믿음의 고귀함마저 묻어나면서, 어떤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워, 로스.”
“어머니 제가 걸어 드릴게요.”
“후우……. 평생 리믹스가 한 번도 못해 준 것을 로스 네가 하는구나. 하지만 로스…….”
“네, 어머니.”
“아무래도 이 아름다운 목걸이의 주인은 이 엄마가 아닌 것 같구나.”
“네? 어머니 무슨 말씀……?”
“이 엄마가 아르도스로 온 이후, 엄마는 모든 보석을 내놓았단다. 처음엔 전쟁에서 이겨 내기 위해, 다음엔 영지와 주민들을 위해서였지. 거기엔 이 엄마의 친정인 에식스 공작가의 표식과도 같은 보석도 있었단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이 엄마는 후회한 적이 없단다. 이런 목걸이는 너무 탐이 나서 이 엄마는 감당할 수가 없지. 로스, 네 마음은 정말 고맙고 잘 받았다. 고마워. 로스, 내 아들.”
“어머니……!”
“호호, 정말 아쉽네. 아들, 이걸 팔면 우리 영지민들이 얼마나 배 불릴 수 있을까?”
“어머니!”
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이미 영지는 굶주리지 않았고, 또 앞으로 영지는 갈수록 부유해질 것이다. 이제 아르도스에 거하는 그 누구도 굶주림이라는 말은 생각지도 못할 것이고, 장차 레무니아의 그 누구든지 아르도스를 부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과거에 살고 있었다.
근래 오토 집사는 찬모와 하녀들을 들였고, 부식들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영주관의 창고를 채우는 일부터 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부엌에 들어가 요리를 했고, 음식도 그렇게 달라진 것을 못 느낄 정도로 차렸다.
다만 치즈와 가끔 고기가 나온다는 것 정도. 거기에 요즘 해산물이 나오면서 새로운 요리로 해산물 요리가 등장하는 정도였다.
로스는 어머니에게 다시 공녀 시절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어머니에게 고함을 지르고 만 것이다.
르엔느는 그런 로스의 마음을 아는 듯,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정말 아쉽다니까? 하지만 팔아서는 안 되겠어. 너무 소중한 마법이 인챈트되어 있거든.”
“그래요. 어머니, 너무 귀한 마법이 인챈트되어 있어요. 그러니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해 줄 거예요. 그리고 우리 영지는 이제 어머니 생각처럼 가난하지 않아요.”
“호호, 로스. 네가 우리 아르도스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을 안단다. 하지만 로스?”
“네, 어머니.”
“호호, 우리 로스의 얼굴이 많이 부었는걸! 하지만 로스, 미안하지만 이 엄마는 이걸 목에 걸 수 없겠구나.”
“어머니, 제발요. 팔 수도 없는 것을 왜 못 거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이 엄마는 이 목걸이를 네가 가졌으면 한단다.”
“네?!”
“고대인의 마법은 정말 대단하다고 하더구나. 더군다나 보호 마법과 치료 마법이 걸려 있다고?”
“네! 항상 몸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게 해 준대요.”
“그래, 로스. 엄마는 아제 살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깝단다. 더군다나 네 아빠는 엄마보다 더 늙었고…….”
르엔느는 로스를 달래며 설득하려 했다. 그때,
“이거 참으려 했더니 섭섭해서 나와야겠구려. 르엔느.”
“어머! 리믹스!”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리믹스 백작이 들어왔다.
“웬일이세요? 두 남자가 오늘 동시에 제 방을 찾아 주시고?”
“후후, 르엔느, 말 돌리지 마시오. 내가 당신보다 더 늙었다는 이야기는 뭐요. 나이가 더 많다는 이야기요?”
“호호, 리믹스. 서운해 마세요. 사실 당신이 나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잖아요? 난 당신이 없는 세상을 살 수 없답니다. 그러니 당신과 함께 신께 돌아가려면 제가 빨리 늙어야지요.”
“오오, 르엔느, 내 사랑스런 여인이여! 그대의 입술은 달콤한 장미의 향기보다 더 부드럽게 내 마음을 녹여 버리는구려.”
“호호, 당신은 항상 내 마음의 태양이랍니다. 당신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지요.”
로스는 부모의 닭살 행각을 보며 묵묵히 탈출로를 생각했다.
로스의 그런 생각과는 상관없이 두 부부의 대화는 가장 처절하고 슬픈 이야기를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르엔느, 내게 당신을 향한 이 마음을 표현하도록 허락해 주시오.”
“그래요, 리믹스. 말씀해 주세요.”
“르엔느, 내 사랑하는 여신이여. 만일 그대가 나를 두고 떠난다면 나는 당신이 떠났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미 당신에게로 달려가고 있을 것이오. 난 태초에 마법에 걸린 아이처럼 당신의 품을 그리며 그 품을 찾아 헤매는 소년.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오우거처럼 당신의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난 수도자. 내가 존재하는 모든 의미는 바로 당신이 불러 주는 내 이름이라오.”
“감사드려요. 리믹스. 당신은 영원한 나의 기사님. 신께서 만일 당신을 먼저 부르신다면 나의 심장은 그 즉시로 터져 당신이 있는 곳에 저도 있을 거예요. 저는 기사님의 품에서 보호를 받는 어린 암사슴. 당신의 사랑이 없으면 두려워 잠시도 살 수 없어 시드는 꽃 아프로디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직 당신만의 사랑으로 살 수 있는 르엔느랍니다. 제게 사랑하는 당신의 품에 안길 수 있게 해 주세요.”
“오오, 사랑하는 내 아내여! 내 그대의 고운 뺨에 입 맞추고 싶소. 불타는 이 열정이 당신의 콧등을 스치고 솟구치는 화산의 불꽃처럼 꺼지지 않는 내 심장의 정념이 그대의 입술에 머무르고 싶구려.”
“아아, 리믹스!”
“르엔느!”
처절과 슬픔은 아름다움과 사랑을 넘어 활화산이 되어 온 천지를 불태우려 했다.
“제발, 아버지! 어머니!”
“어라, 로스?”
“어머! 로스! 아직 있었니?”
백작과 르엔느 부부는 로스가 투명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새삼 놀라는 척했다.
“아버지, 너무 하시는 것 아닌가요? 어머니와 겨우 시간 좀 내고 있었더니.”
“무슨 소리냐? 네가 벌써 두 시간이 넘게 네 어머니와 함께 있었음을 모르는 줄 아는가 보구나. 네가 감자파이를 세 개나 먹은 사실도 나는 알고 있다.”
“윽! 그러게 오셨으면 들어오시지, 왜 밖에서 염탐을 하세요?”
“흠! 염탐이라니? 난 내 아내를 아들이 어떻게 구워삶아 감자파이를 얻어먹는지 배우려던 것뿐이다. 나도 가끔은 내 아내가 만들어 주는 감자파이를 먹고 싶거든!”
“어머! 리믹스, 그럼 벌써 와 있었던 거예요?”
“하하, 그렇소. 르엔느, 당신을 방해하지 않으려 했지만 로스 저 녀석이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것 같아 나섰다오.”
“호호, 그렇지요?”
“제가 뭘 모른다는 것이지요?”
“네 어머니는 보석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지!”
“흥! 그렇게 잘 아시는 아버지께서 왜 아들에게 영지를 다 맡겨 놓은 채, 수련만 하고 계시지요? 전 그 덕에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도 보지 못하고 어제 종일 나가 있어야 했다고요.”
능청과 과장으로 부풀려진 대화. 하지만 로스와 부모는 그 속에서 모처럼 가족만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어머! 그게 정말이니. 로스?”
“네, 어머니. 아버지께서 저를 아예 영주 대리로 만들어 버리셨어요.”
“리믹스, 정말이에요? 로스를 제 품에서 떼어 놓은 것이 당신이에요?”
“아아! 르엔느, 그게 무슨 말이오? 사실은 저기 저렇게 웃고 있는 로스 녀석이 내게 문 웨이브(moon wave, 월파)라는 검법을 알려 줘서 나를 당신의 품에서 쫓아낸 거란 말이오.”
“아아……. 리믹스, 당신의 이야기는 무슨 말이지요? 그저 지금을 모면하기 위한 핑계인가요? 당신이 아들에게 무엇을 배우셨다니요. 저는 믿을 수가 없군요. 그리고 아들을 엄마의 품에서 떼어 낸 죄는 용서하기가 힘이 들 것 같군요. 리믹스”
“아니오. 르엔느, 당신에게 밝혀야 할 것이 있다오”
리믹스 백작은 두 손을 휘저으며 과장되게 소리쳤다.
마치 아내의 오해를 풀지 않으면 상심되어 죽을 것처럼 비장한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