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운틴 로드 1권(19화)
Chap. 10 검은 머리 오크족의 섬(2)
“아버지. 고생 많으셨어요.”
“하하, 로스, 그래도 네 덕에 편히 왔다.”
속삭이는 리믹스 백작의 헤르시온에는 오크들의 녹색 피가 말라붙어 달빛에 인광을 발하는 기이한 모습을 연출했다.
지난밤에 해머 케이프에서 출발하여 새벽 나절에 섬에 도착한 뒤 지금까지 거의 스무 시간 가까이 긴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리믹스 백작뿐만 아니라 기사들의 얼굴 역시 피로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실력을 자각하면서 느끼는 가벼운 흥분이 피로를 잊고, 힘을 내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토르만 자작님, 크레인 남작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힘드셨지요?”
“허허, 무슨 말씀을요. 소영주님께서 앞을 맡아 주시고, 영주님의 검이 오라를 뿜어대니, 이 늙은 마법사는 그저 따라만 다녔습니다. 그래도 크레인 남작은 저보다야 재미를 봤을 겁니다.”
“어이쿠! 소영주님, 말도 마십시오. 란셋, 저 사람이 아예 저를 늙은이 취급을 하면서 작전에 끼워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토르만 자작님의 말씀은 그저 하는 소리입니다. 차라리 저를 소영주님께서 데려가 부려 주십시오. 못할 말로 다시는 란셋 대장과 작전 안 하렵니다.”
“영주님과 소영주님을 뵙습니다!”
나직하지만 강단 있는 군례.
오른 주먹을 가슴에 대고 짧게 머리를 숙인 란셋은 기사들의 보고를 받고 오던 중에 크레인 남작의 말을 들은 모양이다.
크레인 남작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로스는 빙그레 웃었다.
“무사하셨군요. 란셋 아저씨. 수고 많으셨어요.”
“영주님께서 직접 참여하셨고 소영주님도 계신데, 제가 무슨 수고를 했겠습니까? 더군다나 크레인 남작님이 기사들이 당도하기도 전에 온통 휘저어 버리시니, 소직은 이군 기사들과 함께 정리밖에 안 했습니다.”
“하하, 어쨌든요. 부상자는 어떤가요?”
“지금 보고받고 확인했습니다. 가벼운 찰과상이나 근육 이상 정도의 부상뿐, 뼈가 부러지거나 중상을 입은 기사는 없습니다. 모두가 소영주님의 가르침 덕입니다.”
란셋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하, 란셋 아저씨의 아부도 수준에 오르셨군요. 어머니가 들으셨으면 아마도 ‘란셋은 그렇게 말도 잘하면서 왜 레이디들에게는 벙어리가 되지?’ 하며 반문하실 겁니다.”
“소……영주님……!”
“하하하하……하!”
크레인 남작이 크게 웃다 제 풀에 놀라 입을 막았다.
적당히 란셋 대장과 화해하려는 제스처가 오히려 모두의 눈총을 받게 된 것이다.
“하하, 염려 마십시오. 이 주변에는 컨트롤 사운드(control sound) 마법이 펼쳐져 있어서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허! 그런 마법도 있었습니까?”
“하하, 토르만 자작님께서 펼치신 걸요.”
“여하튼 우리 소영주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네요. 핫하.”
머쓱한지 크레인 남작은 호들갑스러웠다.
이군에서 그 말썽을 피웠으니 왜 아니 그렇겠는가?
첫 번째 마을에서 암습을 하느라 마음대로 검을 휘두르지 못한 크레인 남작은 두 번째 마을이 나타나자마자 검을 뽑아 들고 마을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미친 인간 하나에 방심한 오크들이 조직적인 대응을 하기도 전에 사방에서 기사들이 진입하면서 손쉽게 처리했다.
하지만 자칫 오크들이 눈치채고 도망이라도 쳤다면, 복잡해질 뻔한 사태였기도 했다.
사실 위에서 로스가 지켜보고 있었는데, 오히려 마을 중앙으로 크레인 남작이 들어가면서 오크들이 모여들었고, 그 뒤를 기사들에게 내어 주면서 별다른 대항도 못하고 전멸당했던 것이다.
물론 크레인 남작이나 란셋 대장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크레인 남작은 그 핑계로 칼을 휘두르려는 의도였고, 란셋은 이를 이용해서 작전을 순조롭게 진행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작전에 있어 대장의 권한은 지고한 것.
마음대로 행하는 장수라면 없느니만 못했다.
십년전쟁을 거쳤던 크레인 남작이 그 사실을 몰랐을까?
란셋 대장의 작전 능력을 알고 있고 서로가 신뢰했기에 행한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란셋 역시 그저 말장난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충! 소영주님을 뵙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으십시오.”
화급히 일어나 나지막하지만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리는 기사들에게 로스는 두 손을 저으며 자리를 권했다.
머뭇거리는 기사들.
“앉으세요. 앉아서 쉬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로스의 강권에 자리에 앉았지만 좌불안석이다.
절대군주와 철저한 상명하복의 사회에서 나이를 떠나 로스는 그들에게 스승이었고, 주군과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려움 없이 이곳까지 올 수 있어서 고맙고, 중상 없이 무사하니 더더욱 고맙습니다.”
“안 죽으려고 열심히 싸웠으니까요.”
“큭!”
감초 같은 산초 소대장의 대답에 몇몇 어린 기사들이 입을 틀어막았고, 차츰 주변의 몇몇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래요. 살려면 열심히 싸워야지요. 그런데 그렇게 웃다가는 숨 막힙니다. 여긴 토르만 자작님 덕에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웃어도 됩니다.”
“하하하하.”
“푸핫하하.”
“그리고 산초 경은 돌아가서 절대 죽지 않도록 제가 특별 훈련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헉!”
“프핫하하하하하.”
“헛허허허.”
산초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주변이 들썩일 정도로 웃음이 터져 버렸다.
가장 무서운 적을 앞두고 웃을 수 있는 여유. 그것은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며 그만큼 긴장을 풀어 주고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하하, 지금부터 누구든지 제 말을 가로막으면 산초 소대장과 같이 특별 훈련에 처하겠습니다. 이제…….”
“소영주님…….”
“가르시아 소대장?”
“그럼, 저도 산초 소대장과 같이 수련을 시켜 주십시오.”
“어라? 가르시아 소대장, 정말 해 보자는 거야?”
“흥! 소영주님께 훈련받아 나를 앞지르려 하는가 본데, 어림없는 소리! 소영주님, 저에게도 훈련을 시켜 주십시오.”
“끄응!”
산초 소대장과 가르시아 소대장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 형 동생 하는 친구였다.
크레인 남작의 차남인 산초와 아문센 남작의 차남인 가르시아는 한 살 터울로 그 부친들이 그랬듯이 그 자녀들도 서로 우애하며 형제처럼 지냈다.
원래 두 남작 역시 어려서부터 한 집안같이 살아서 사석에서는 스스럼없이 아명을 부르며 형 동생 하는 사이였고, 그 장자들인 포크와 피어리 역시 친 형제같이 지내는 사이였다.
특히 가르시아는 나이 차이도 많지만, 책만 읽고 있는 그 형 피어리와 있는 것보다는 같은 또래인 산초와 어울리는 것이 더 좋았기에 어려서부터 아르마 성의 집을 떠나 아르진 성에 살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책을 읽기 보다는 산초와 함께 검을 휘둘렀고, 또 그러다 보니 크레인 남작의 검술을 배웠으며, 결국에는 집안의 전통인 행정가가 아닌 기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타고난 기사인 산초와 노력형의 기사인 가르시아는 언제나 맞수였고, 산초가 특별 수련을 한다고 하자 자신도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저놈들을 누가 말려요. 소영주님, 이참에 아예 저놈들을 지옥 구덩이에 몇 년 던져 넣으십시오.”
못 말리겠다는 투로 머리를 흔드는 크레인 남작이다.
둘 다, 그 형들에 비해 많은 터울로 태어나다 보니 크레인 남작이나 아문센 남작은 작은 아들들에게 단호히 대하지 않았고, 결국 그대로 커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잘못 큰 것도 아니지만, 워낙 좌충우돌에 장난기가 심했다.
“예, 약속대로 특별 훈련과 함께 지옥 여행도 시키겠습니다.”
“아버지!”
“헉! 아, 아저씨!”
“하하하하.”
“큭큭큭!”
“또다시 제 말을 끊을 분들은 없으시겠지요?”
갑자기 식어 가는 분위기. 무언지 심각함이 감돈다.
“……!”
슬그머니 손을 드는 이들.
두 명의 부대장들과 남은 소대장들, 이어서 분대장들이 들고 잠시 후에는 모든 기사들의 손이 들렸다.
“허!”
“이런!”
두 번의 교전으로 기사들은 확실히 자신들이 강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모든 것이 지옥 훈련의 결과라는 것을 실전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여태 제가 시킨 훈련이 아무래도 약했던 모양입니다. 정말 돌아가면 확실하게 훈련을 시켜 드리겠습니다.”
“크으……!”
“끄으윽!”
“허억! 왜, 왜 나를……?!”
전과는 다른 의미의 신음성이 터지면서 기사들의 원망 어린 시선이 산초를 향했다.
지금껏 받은 훈련이 약하다니, 앞으로 받을 훈련은 얼마나 강하겠는가?
기사들의 원망은 원흉인 산초에게 화살이 되어 박혀 들고 있었다.
“좋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깨달으셨음을 알겠습니다. 내가 가진 것만 내 힘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힘이 더 강했기에 해양 오크 중에 가장 강한 검은 머리 오크들의 마을 네 개를 여러분의 손으로 지운 것입니다.”
“……!”
모두의 눈이 불타고 있었다.
로스에게 그 기운은 확실하게 다가왔다. 저들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신뢰, 더불어 충성.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쉬겠습니다. 이후, 우리는 저 산 육부 능선에 자리한 수장의 마을을 공략할 것입니다. 수장 마을은 우리가 거쳐 온 마을과는 다릅니다. 저곳에 존재하는 수장도 수장이지만 수장 아래 있는 전사 오크들은 매우 강합니다. 거기다 최소 두 마리의 부수장급 오크가 있을 것이고, 후계자가 되는 오크들도 몇 마리 있을 것입니다.”
“아……!”
로스는 이미 정탐한 바와 자신의 머리에 있는 기억들을 사용해 설명했다.
“더군다나 주술을 쓰는 주술사 오크들과 일반 오크들의 두 배 크기인 전사 오크의 대장들은 자칫 방심하다가는 우리가 당할 수도 있습니다.”
“으음……!”
“거기에 우리는 시간의 제약이 있습니다. 늦어도 두 시간 안에, 최대 세 시간 안에는 수장 마을을 이곳 에크베이트 섬에서 지워야 합니다.”
“허!”
“앗!”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출발 전에 로스가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놀람의 탄성이 터졌다. 난데없이 들린 한 이름 때문이었다.
에크베이트…….
에크베이트 폰 어플라인.
아르도스 영지의 그 누구도 이 이름을 잊지 못한다.
영지민 가운데 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다.
그 이름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이름에 담겨진 의미 때문에 그들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전 남부 영지 시절 아르도스 백작가의 기사단 이름이며 기사단장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르도스에서는 기사단의 이름을 기사단장의 이름을 따 부르는 전통이 있었다.
에크베이트 남작, 십년전쟁의 승리를 이끈 주역.
헤더 폰 아르도스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이 이름이 따랐고, 카스틴을 넘어 온 아틀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용장이요, 지장으로 알려진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주군과 후퇴하는 영지민을 위해 오딘 왕국의 대군과 아라곤 제국의 기사들을 맞아 장렬하게 산화한 이름이기도 했다.
“이 에크베이트 섬에 남은 오크 마을은 세 개. 동부 해안에 있는 오크 마을과 일군이 지나쳐 온 동북부에 위치한 마을, 그리고 저 위의 오크 수장의 마을입니다.”
“어차피 없애야 할 존재들인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먼저 그곳을 칠걸 그랬다.”
문득, 리믹스 백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후의 문제지만 막상 뒤에 남겨진 존재는 부담인 것이다.
“아닙니다. 아버지. 만일 그곳을 치고 왔다면 우리는 날이 밝은 후에야 이곳에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이렇게 한가하게 쉴 틈도 없었고, 지친 상태로 다시 최대 강적들과 마주쳐야 했겠지요.”
“그렇구나. 그래, 계속 하려무나.”
“예, 아버지. 이 오크 수장의 마을에는 주술사 오크나 혹은 검은 머리 오크들이 다른 마을로 연락을 취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으음……!”
“그렇다면 가까운 동북부 마을이 십 킬로미터, 오크 부대가 준비하고 오는데 넉넉잡아 한 시간 정도, 그들까지는 어찌 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남부의 해안 마을은 세 시간 정도 걸리지만 그 인원이 수장 마을 말고는 가장 많습니다. 그들까지 온다면 우리는 승리를 자신할 수 없습니다. 서남부에 위치한 인접한 두 섬에 거하는 검은 머리 오크족도 네다섯 시간 정도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
“결국 우리는 최악의 경우 이곳에서 검은 머리 오크족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최단 시간에 수장 마을을 공략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힘을 회복할 시간을 얻게 될 것입니다.”
“……!”
모두의 눈에 굳은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부터 한 시간을 쉽니다. 그리고 미리 정한대로 분대별로 움직입니다. 분대장들이 숙지한 지도 속에는 오르는 길과 주변 초소가 나와 있습니다. 지정한 곳에 이르면 신호를 기다리십시오. 이것으로 작전 회의를 마칩니다. 이상입니다. 지금부터 최대한 몸을 회복시키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승리를 신께 기원합니다.”
“신이시여! 아르도스에 영광을!”
“신이시여! 아르도스에 영광을!”
리믹스 백작의 선창에 기사들이 한목소리로 복창했다.
이글거리는 그들의 눈은 나직한 외침에도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산초 소대장! 가르시아 소대장!”
“옛! 포크 부대장님.”
“두 소대가 삼십 분씩 돌아가며 경계를 선다.”
“충!”
“아, 포크 부대장.”
포크의 지시에 토르만 자작이 제동을 걸었다.
“예! 자작님.”
“이미 주변에 알람 마법이 설치되었으니 모두 눈을 붙이게 하게. 내가 깨어 있으면 되니 염려 말고.”
“아닙니다, 자작님. 젊은 저희가 경계를 서겠습니다.”
“이놈, 산초! 내가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냐?”
“헛! 아닙니다. 자작님!”
“그럼 네가 소대장이 되더니 나를 무시하는구나!”
“에이! 아닌 줄 알면서 왜 이러세요?”
산초의 얼굴이 죽을 쑤는 중이다.
괜히 나섰다가 간만에 토르만 자작에게 말꼬리가 잡힌 것이다.
“그게 아니면 어서 자라. 요놈아.”
“에이……. 요놈아가 뭡니까. 요놈아가.”
“허! 이놈이? 그래 이놈아! 너는 젊다며?”
“아! 알았습니다. 자작님, 고맙습니다. 잘 쉬겠습니다.”
“풋! 너 이놈, 영지로 돌아가서 보자꾸나. 너 분명히 기억해 둬라. 내 가만있지 않을 터이니.”
“끄응……!”
“하하하, 산초 소대장이 오랜만에 토르만 경에게 워터 볼을 맞는 장면을 볼 수 있겠구려.”
“헉! 여, 영주님!”
“허허허, 영주님, 이번엔 워터 애로우(water arrow 물 화살)나 콜드 볼(cold ball 냉기 물덩이)로 저놈의 입을 얼려 버려야겠습니다.”
“자작님, 그래봤자 1, 2서클인데, 산초 소대장이 당하겠습니까? 저 보십시오. 다들 자려는데, 혼자 떠들잖습니까?”
“소영주님…….”
“아예 4서클 워터 토네이도(water tornado 물 회오리)나 5서클 스노우 토네이도(snow tornado 눈 회오리) 정도로 얼려 버리십시오. 그 정도는 돼야 산초 소대장이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허허, 그렇군요. 확실히 저놈에겐 4, 5서클은 돼야 약발이 먹히겠습니다.”
“끄어어…….”
산초의 들이키는 숨소리가 처량하게 숲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