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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 로드 1권(22화)
-외전
레전드(Legend), 아르도스(2)


하지만 당장의 문제는 오딘.
해밀 공작은 양패구상을 모색했다.
해밀 공작은 직접 오딘에게 오트 대공의 신병 인도를 조건으로 컬킨디펜스 이남으로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
최악의 경우 전 점령지로부터의 철군도 모색하고 있던 오딘 왕국으로서는 최고의 조건.
실로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아르도스 백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안건은 사병들을 내놓은 귀족파의 주도로 그대로 시행된다.
문제는 그 이후에 나타났다.
국토를 회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귀족들이 전후 복구를 핑계로 차일피일 그레이너리 평야로의 진격을 미루고 있었다.
그리고 삼 개월 뒤, 단 오만의 중앙군과 함께 컬킨디펜스를 아르도스 백작에게 맡겨 버린다.
하지만 헤더 폰 아르도스 백작은 그에 상관하지 않았다. 단 오만의 군사로 그레이너리 평야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 지루했던 십년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레이너리 평야로 진군한 아르도스 백작은 승승장구해서 빼앗긴 열네 개 영지 중에 일곱 개를 탈환하는 역사를 이룬다.
그때,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귀족들이 다시 참여의 의사를 밝히며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해밀 공작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군세는 단숨에 십삼만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르도스와 귀족들은 맞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르도스 백작은 공을 가로막는 벽에 불과했다.
원래가 아르도스는 정치와는 무관하게 행동한 가문이었다. 그것이 타국의 침략이든, 혹은 반란이든, 상관없이 아르도스는 언제나 국가와 국왕의 편에 서서 싸워 이겨 왔다.
하지만 그 뿐, 이후에는 다시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그런 아르도스와 공에 눈이 먼 귀족들이 맞을 리가 없는 것이다.
공에 눈이 멀어 고토의 회복이란 명분만 앞세운 젊은 귀족들은 군령도 작전도 없었다. 그저 병사들에게 밀어붙이기만 명령했다.
실지로 세 개의 영지를 아르도스 없이 회복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하나의 영지를 회복하려 할 때, 오딘의 이십만 대군이 그레이너리 평야로 밀어닥쳤다.
피가 강이 되어 흘렀던 그레이너리 일차 접전이었다.
카스틴 오만의 병사와 오딘 일만의 병사, 도합 육만의 허무한 주검들이 평야를 뒤덮었다.
그저 전공을 탐낸 카스틴 귀족들은 오합지졸, 그 이상이 될 수 없었고, 이는 오만의 젊은 목숨과 삼십칠 명의 귀족들이 목숨을 잃는 결과로 나타났다.
기회를 잡은 오딘의 십구만 대군이 파상적으로 밀려왔다.
십구만 대 팔만. 거의 두 배 반의 군세였다.
비로소 남은 귀족들은 아르도스의 명에 따르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아르도스의 휘하에 든 카스틴은 이전과 달랐다.
전멸을 장담하고 암습한 카스틴의 숙영지는 텅 비어 있었고, 황급히 후퇴하는 오딘의 왕국군을 추격하는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후퇴하는 오딘군을 기다리는 기사단과 병사들.
2차 그레이너리 접전의 시작이었다.
예상은 깨어졌고 전설이 만들어졌다.
십구만 대군에서 살아 돌아간 오딘의 군사는 겨우 삼만여 명. 카스틴 역시 삼만여 명. 같은 숫자지만 그 의미는 너무 엄청나 비교 자체가 안 되었다.
너무 엄청난 패배에 수습하지 못한 부상자들이 그 큰 피해를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만들었지만, 뭐라 해도 전쟁이 역사에 기록된 이래 최고의 대승이었다.
역사에 존재하는 수많은 영웅들, 미누아의 컬킨이나 비스토의 히트러스도 결코 이루지 못한 전승이었다.
대륙은 들끓었다.
차츰, 오딘을 바라보던 기분 나쁜 시선이 사라지고, 새로운 강국의 등장이 아닌지 경계의 눈빛이 나타난 것도 이때부터였다.
새로운 영웅의 등장은 또 다른 강국의 등장을 의미하며, 이미 구도가 갖추어진 대륙에서 새로운 강국은 언제나 피바람을 몰고 왔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시기의 눈빛은 더욱 짙어졌고,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이후 국토 회복을 포기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아르도스 백작은 왕도에 증병을 요구했다. 이번 기회에 오딘을 철저히 굴복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적거리는 귀족들로 인해 시간이 늦어졌다.
이때, 아르도스 백작은 남은 삼만의 군세로 진격해서 열네 개 영지 모두를 회복하고, 다시 다섯 개의 오딘 영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실로 하늘도 놀랄 전승이었다.
증병과 보급만 충분했다면, 오딘 왕국의 함락도 어렵지 않았다.
이미 오딘 왕국의 마스터 셋이 죽어 나갔고, 둘은 회복 불능의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남은 다섯조차 남부 국경의 유스 왕국과 로튼 제국으로 인해 발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오딘군의 사기는 바닥인 점을 염두에 두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왕도에서 공을 치하한다는 명목으로, 전장에서 귀족들을 불러들이는 역사에 없는 미친 짓을 일으킨다.
대륙이 비웃었던 황당한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카스틴 왕국에 대한 질시와 우려는 헤더 폰 아르도스 백작 개인과 그 기사단이나 영지로 쏠리게 된다.
아르도스 백작은 완강히 불복종의 의사를 밝혔다. 그 휘하에 있던 귀족들 역시 왕도로 올라가지 않았다.
다시 왕도에서 승작을 이유로 불러들였다.
아르도스 백작은 시급한 증병 요구와 함께 승작 자체를 거절했다. 다른 귀족들 역시 거절하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몇몇이 승작을 위해 왕도로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해밀 공작의 휘하에 있던 가느롱 백작과 몇몇이었다.
폴린 드 가느롱 백작이 후작으로 승작하고, 나머지도 일위씩 승작한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전장에 남아 있던 귀족들이 흔들렸다.
다시 몇몇의 귀족이 왕도로 올라가자, 카스틴의 진영은 내부로부터 흔들렸다.
더 큰 문제는 가느롱 후작 일행이 돌아오면서부터였다.
승작한 젊은 가느롱 후작이 증병과 함께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은 것이다.
전장의 총사령관을 바꾼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겠는가?
더군다나 아직 삼십대 초반의 후작이었다.
하지만 가느롱 후작은 결코 미련하지 않았다.
그의 최대 장점은 적재적소에 사람을 잘 쓴다는 점이었다.
그는 부관으로 야심만만한 이십대 초반의 젊은 귀족 부르터 드 크란 남작을 중용하여 전쟁을 이끌었다.
그러면서 결코 아르도스 백작을 멀리하지도 중용하지도 않는,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교묘함을 구사했다.
현실적으로는 아르도스 백작 없이는 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을 수많은 전장에서 몸으로 깨달았던 가느롱 후작이었다.
그렇다고 중용하거나 재껴 놓기엔 부담이었고, 무엇보다 주군이었던 해밀 공작의 뜻을 거스른 행동이었다.
그는 고심했다. 전쟁에 패하지 않고 아르도스 백작을 처치할 방법.
해밀 공작과 자신, 귀족파를 위해 아르도스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최우선의 존재였다.
공작은 가느롱을 후작으로 승전시킨 뒤, 군사를 파견하면서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아르도스 백작을 우선하여 처치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여러 번 기회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르도스 백작은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승리를 얻어 돌아왔다.
전쟁은 다시 국지전으로 접어들었고, 귀족들도 교체되었다.
영지의 관리도 관리였지만 누군가의 의도적인 승작으로 인한 영전이었고, 또 다른 승작을 바라는 귀족들의 요구 때문이기도 했다.
차츰, 전장은 귀족들의 승작을 위한 장소로 변모되었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전쟁이 벌어진 지 삼 년이 흘렀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장은 그대로 고착되는 듯했고, 아르도스 백작 역시 영지를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었다.
총사령관도 몇 차례 교체되었지만 누구도 아르도스의 회군은 원치 않았다.
한 명의 왕당파 외에는 교체된 다섯의 사령관들 모두 귀족파이기도 했지만, 아르도스가 없는 전투는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장에서 명령은 지엄한 것.
백작은 묵묵히 왕도의 명령만을 기다렸다.
그런 백작의 변함없는 모습을 존경하던 소장파 귀족들이 불평의 소리를 냈지만, 위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백작 역시 원치 않는 일이었다. 전장에서 파벌처럼 위험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등을 돌리는 귀족들이 많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륙 모든 기사들의 영웅이었던 헤더 폰 아르도스 백작이 자신의 고국에서만큼은 외면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끝까지 남아 아르도스와 함께 한 이가 토르만 자작이었다.
해밀 공작의 사주로 귀족파의 아르도스 백작령 흔들기가 시작되고, 알게 모르게 주민들이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행적이 불분명한 도적들이 나타나 살인, 방화, 강간 등 민심을 흉흉하게 만드는 일들이 매일같이 거듭되었다.
주민들과 남은 군사들이 합력했지만 역부족.
결국 왕립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테이블로스 산맥 접경지에서 몬스터 토벌대를 맡고 있던 백작의 장자 리믹스가 아르도스로 귀환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곤 제국의 황태자인 알폰소 반트 아라곤의 임페리얼 나이트였던 젊은 크레인이 황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르도스로 돌아왔다.
그는 아라곤 제국아카데미를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수석 졸업하고 황태자에 의해 타국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황실기사단의 기사 작위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황태자의 신임이 얼마나 컸던지 가사단장과 귀족들의 집요한 반대에도 황태자의 임페리얼 나이트가 된 사건은 북부 대륙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아르도스로 돌아온 것이다.
황태자가 그를 얼마나 아꼈으면 그가 떠나는 자리에서 차라리 죽이겠다며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죽어서도 돌아가야 한다는 크레인의 말에 통곡을 터뜨리며 보내 주었다고 한다.
황제로의 등극이 기정사실이었던 황태자의 전폭적인 신임과 사랑, 그리고 준비된 출세의 길을 버리고 아르도스로 돌아온 것이다.
거기에 카스틴 왕립아카데미의 모든 기록을 갈아 치운 뒤, 아라곤 제국을 거쳐 로튼 제국에서 제국의 문물과 제도를 배우던 아문센이 급거 귀국하여 아르도스로 돌아온다.
이후, 아르도스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는다.
리믹스, 크레인, 아문센이 뭉치니 못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젊음은 때로 누구도 상상치 못하는 일들을 일으켰다.
아르도스의 삼인방은 돌아온 지 일 년 만에 영지가 안정이 되고 어느 정도 힘을 축적되자, 곧바로 전장으로 나선다.
아르도스 백작은 탐탁지 않아 했으나 그들의 합류는 카스틴 왕국군에 새로운 바람이 되었고, 실지로 그들이 나선 전장마다 승리의 나팔이 울리기 시작했다.
타고난 전사이자 장군감인 크레인과 최고의 전략가인 아문센이 만났고, 그것을 조율하고 이끄는 리믹스가 있었다.
승승장구. 두 개의 영지를 그들만의 힘으로 점령하자 오딘보다 카스틴이 더욱 뒤집혔다.
왕도에서는 이례적으로 그들에게 그 부모의 작위와 무관하게 남작을 제수했다.
현 카스틴 왕국의 국왕인 파에톤 폰트 카스틴이 왕세자의 신분으로 강력히 요청했던 결과였다.
하지만 그뿐, 다시 귀족들이 새로운 영지와 승작을 이유로 남부에 모여들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바뀌었다.
아직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저지른 일은 귀족들의 승부 근성과 욕심을 건드렸다.
특히 귀족파에 속한 이들은 광분해 영지의 전 사병을 이끌고 오는 이들조차 나타났다.
이에 해밀 공작은 자신의 최측근이자 처남인 벨레로폰 후작을 총사령관으로 임명받게 만든다.
벨레로폰 후작은 세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 모두 네 개의 영지를 점령했다.
마지막 영지 하나는 영주가 도망가고 없는 빈 성이었다.
이에 고무된 벨레로폰은 국민들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회자되던 아르도스 백작과 그 휘하에게 영지로의 회군을 명한다. 승리의 자신감과 아르도스의 명성에 대한 투기심이었다.
해밀 공작 역시, 아르도스를 전장의 제물로 삼을 수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 전장에 남겨 두는 것은 자신이나 귀족파에 있어 해라고 여겼기에 사실상 이를 승인하게 된다.
이 명령에 격분한 남은 아르도스의 삼인방이 벨레로폰을 찾아가 따졌고, 벨레로폰은 분노하며 그들을 투옥시켜 버린다.
당시 소장파 항명 사건으로 일컬어진 이 사건은, 전장이라는 특수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명령 불복종이 아닌 명백한 괘씸죄였다.
벨레로폰의 의도적일 수밖에 없는 이 분노는 해밀 공작의 의도이기도 했고, 삼인방의 출옥 조건으로 아르도스 백작과 기사단의 공적에 대해 말소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삼인방이 땅을 치고 통곡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아르도스는 역사에도 없는 무패의 신화를 이루었고, 오딘 왕국의 마스터 다섯을 무찔렀다.
하지만 사 년간의 전투에서 기사 사십이 명과 병사 삼백칠십육 명을 잃었다.
그레이너리 평야에서 기적을 일으켰던 아르도스의 귀환은 어떤 보상도 없는 상처뿐이었다.
아르도스가 귀환한 이후, 그레이너리 이남에서는 몇 번의 전투가 이루어졌고, 벨레로폰은 연속된 승리로 고무되었다.
왕국의 네 번째 공작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수많은 귀족들이 벨레로폰에게 줄을 대었고, 벨레로폰의 위세는 높아만 갔다.
이때, 아르도스에서도 잔치가 벌어졌다.
영주의 귀환과 함께 그 장자 리믹스가 약혼한 것이다.
신부는 카스틴 최고의 가문이며, 사교계 최고의 미인으로 일컬어지던 펠룩스 반 에식스 대공의 장녀인 르엔느 반 에식스.
그녀는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대륙에 숱한 염문을 뿌렸던 레이디였다.
아틀란 대륙에서는 고위 귀족의 자녀들이 일정 기간 타국의 왕도나 황도에서 수학하는 전통이 있었다.
지도력 훈련(Leadership Training)이라 부르는 이 전통은 각국의 차기 지도자들로 하여금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배우게 하려는 의도와 각 왕국의 귀족들이 교제를 통해 국제적인 교류를 활성화시키려는 의도 하에 오래전부터 성행했다.
대부분은 특별한 친분 관계가 아니면, 문명이 가장 발달했고 문물이 풍부한 아라곤 제국이나 로튼 제국의 황도에서 이 년 정도 수학하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이기도 했다. 심지어 뮤란이나 오델란 대륙에서도 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두 제국의 수도엔 항상 많은 타국의 귀족들이 머물렀고, 제국에서는 그들에게 제국아카데미의 청강생 신분을 허락하고 자유로운 거주를 허락했다.
이들은 매주 황태자의 궁에서 거행되는 파티뿐만 아니라 개인이 돌아가며 연 파티에 참석해서 서로 교제하며 친분을 쌓았고, 이때 쌓은 친분은 향후 국제 정세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다.
르엔느 공녀 역시 아라곤에서 일 년간 수학했다.
그 기간 동안 수많은 귀족들과 왕자들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서를 받아야 했다.
그중에 아라곤 제국의 황태자 알폰소와 오딘 왕국의 왕세자인 페라곤 라 오딘의 열정은 대단해서, 이미 귀국한 르엔느 공녀를 두고 진검으로 기사의 결투까지 나누었다고 하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이 결투에서 승리한 알폰소 황태자는 황제의 윤허도 받기 전에 에식스 대공가에 기사를 보내 뜻을 전한다.
하지만 에식스 대공은 곧은 사람이었다. 아르도스 백작과는 오랜 친분을 나누었으며, 자신이 나서면 정치가 흐려진다며 정치 일선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던 인물로, 왕국 전체의 존경을 받던 최고의 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