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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3화)
2장 퇴물 집합소도 아니고(1)


“하아.”
담서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누라가 강호인과 바람이 나서 홀로 속을 끓이던 불쌍하고 한심한 중년 사내 최종길에게 했던 말은 거짓말이었다.
물론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고, 딱 한 가지만 거짓말이었다.
“실세는 개뿔!”
담서인은 강호소사전담반의 실세가 아니었다.
언제 망할지 알 수 없는 강호소사전담반을 위해서 직접 발로 뛰는 호객 담당이자 막내라는 위치가 담서인이 차지하고 있는 현주소였다.
어쨌든 최종길은 소심하고 의심이 많은데다가 우유부단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결심을 굳힐 때까지 기다리느라 시간이 더럽게 오래 걸렸고, 담서인은 동녘이 어스름하게 밝아 오는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야근!
그것도 밤을 통째로 새고 나니 속이 쓰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래서 새벽부터 문을 여는 다루에 앉아서 엽차를 홀짝이며 쓰린 속을 달래고 있을 때, 백묘령이 용케 자신을 발견하고 두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아침부터 술 마시는 거야? 그러다가 일찍 죽는다.”
아침 햇살을 받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다가오는 백묘령은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길을 걷다가 지나치는 남자들이 모두 힐끔거리며 훔쳐볼 정도로.
“술 아니라 차거든?”
“무슨 차를 술처럼 인상을 쓰면서 마시니?”
인생이 피곤해서, 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엽차를 후후, 불어 마시며 속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또 야근했니?”
“또라니? 오랜만에 야근 한 번 했지.”
“어제도 했잖아?”
예쁜데다가 머리도 좋은 년!
담서인이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랬나?”
“그런데 차 맛은 괜찮니?”
“이 다루에서 제일 싼 엽차가 맛있을 것 같아?”
“어머, 왜 그런 싸구려를 마셔? 비싼 거 마시지.”
분홍색 비단옷을 입고 손가락마다 옥가락지를 차서 ‘나 부잣집 여식이오’라고 자랑하고 있는 백묘령이 또 철딱서니 없는 소리를 했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은 알았다.
한때는 입맛이 고급이라서 더럽게 까다롭다는 말도 들었고.
하지만 다 옛날이야기였다.
이제는 엽차 한 잔 값도 아까워서 호호, 불며 아껴먹는 처지였으니까.
“비싼 거, 니가 사 주든가.”
“그럴까? 여기 용정차로 갖다주세요.”
헐, 용정차라니.
담서인에 입에 머물고 있던 엽차를 뿜어냈다.
간만에 입이 호강하게 생겼는데, 싸구려 엽차 따위로 입을 헹구고 배를 채울 수는 없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담서인의 머릿속은 무섭게 계산하며 회전하고 있었다.
‘보자, 여기서 팔고 있는 용정차가 한 주전자에 은자 닷 냥이니까…… 그 돈이면 강호소사전담반 한 달 운영비네, 운영비.’
“용정차 취소!”
“왜?”
“그냥 엽차 마시자. 대신 그 돈 나 주면 안 돼?”
백묘령이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적선하듯 손바닥에 올려놓았던 은자 닷 냥을 내밀며 말했다.
“그렇게 형편이 어렵니?”
병든 홀어머니 모시면서 아직 어린 동생들 돌보기가 어디 쉬운…….
이게 아니다.
더럽게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강호소사전담반을 홀로 이끌어가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니?
이렇게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결국 자기 얼굴에 침 뱉는 짓인 것 같아서.
“네가 걱정할 정도로 어렵진 않아. 다만 아침부터 용정차는 너무 사치란 생각이 들어서 그래.”
꼴에 자존심을 세웠지만, 먹힌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백묘령의 측은한 시선은 여전했으니.
“왜 그런 눈으로 봐?”
“너, 피부가 장난이 아니다.”
“내 피부야 언제나 백옥이었지. 비싼 돈 들여서 따로 관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타고났거든.”
“그게 아니라…… 모공이 호수 같아.”
“호수?”
“그것도 큰 호수. 네 모공에 빠져서 헤엄도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쁘고 머리 좋은데다가 표현력까지 좋은 년!
저 섬세한 표현력을 듣고서 담서인은 확신했다.
백묘령은 크게 성공한 상인인 아버지의 일을 돕는 대신 글을 썼더라도 크게 성공했을 거라는 걸.
“괜찮아. 피곤해서 그러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그러게 왜 사서 고생을 하고 그래? 내가 아버지한테 말해 뒀으니까 나랑 같이 일하자니까.”
“조건은?”
“매일 아침마다 다루에서 용정차 마실 정도는 될걸? 그리고 야근도 없어.”
“그 제안, 아직도 유효해?”
“그럼.”
솔깃한 제안이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돈은 쥐꼬리만큼 벌고 있는 지금 직장과 비교하면 꿈의 직장이 아닌가.
그래서 하마터면 당장 이직하겠다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강호소사전담반에 속한 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워서 몇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뺀질거리고, 확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 많고, 도통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과묵한 사람까지.
“다음에.”
“왜?”
“지금은 내가 곁에 없으면 안 될 사람들이 있으니까.”
담서인이 거절하자 백묘령이 쭉 뻗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미안해.”
“그런데 너무 늦지 않게 그만둬. 새벽바람 맞으면서 발발거리고 돌아다니다가는 피부 상하는 거 한순간이다. 우리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젊을 줄 아니? 너, 그러다 시집도 못 가는 수가 있어.”
백묘령은 걱정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담서인이 식어 버린 엽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그깟 피부 좀 상해도 괜찮아. 난 강호를 구하고 있으니까.”
불끈 움켜쥐고 있던 주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르 풀렸다.
이건 거짓말이었다.
강호는 영웅이 구하는 법이니까.
자신은, 그리고 자신이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은 영웅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들이었다.

* * *

고전 춘서 다량 보유.
고금제일고수들의 무공 비급 다량 보유.

“아,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엿을 먹이시네요!”
차가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휘날리고 있는 용선 고서점의 대문 앞에 붙어 있는 문구를 슬쩍 살핀 담서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부까지 상해 가면서 밤새 야근하고, 새벽바람을 맞으며 쓰린 속을 부여잡고 있자니 갑자기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때는 촉망받는 인재였던 시절이 있었다.
사서삼경을 일곱의 나이에 뗐을 때만 해도 수재 중의 수재가 태어났다고 동네가 떠들썩했다.
그러나 문제는 담서인이 여자라는 것이었다.
과거를 봐서 입신양명하지도 못하는데 수재면 어디에 쓸 것이며, 글공부를 계속해서 어디에 쓸까?
내조 잘하는 식견 있는 아내?
현모양처?
앞으로 다가올 빤한 미래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가출을 감행했다.
그 후로 남장을 한 채 사방을 떠돌다가 우연히 강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강호라는 곳은 확실히 달랐다.
여자라고 해서 차별이 없었다.
실력만 있다면 여자도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붓 대신 칼, 권력 대신 명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협의까지.
강호인의 삶은 자유로웠다.
그 자유에 대한 동경이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담서인의 가슴속에 자리 잡아 서서히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때의 열병이라 생각했던 강호에 대한 동경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졌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처럼.
그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 강호로 나섰다.
그리고 강호의 협객처럼 중원 전역을 떠돌았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강호의 영웅들에게 그렇게 쉽게 찾아오던 기연은 담서인과는 인연이 아예 없었고, 제자에게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풀던 스승은 결국 만나 보지도 못했다.
사기꾼에게 홀랑 넘어가 가출할 때 가지고 나온 돈을 모두 날렸고, 어설픈 협객 흉내를 내다가 죽을 위기도 수십 번씩이나 넘겼다.
그렇게 강호에 대한 동경이 서서히 실망으로 변해 갈 무렵에 강호소사전담반의 대형인 철무경을 만났다.

“돈 없고 힘이 없어서 강호인들과 분쟁이 생길 때마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보통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강호소사전담반을 세웠다!”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 대형은 그렇게 말했다.
보람찬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으니 일석이조,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강호소사전담반의 설립 취지는 좋았다.
담서인이 바라던 협객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강호소사전담반에 합류했다.
그게 벌써 이 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강호소사전담반에 합류한 지 이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담서인은 당시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가서 뛰어드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강호소사전담반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딱히 홍보를 하지 않으니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차차 소문이 날 것이고, 그때는 고객들이 자연스레 늘어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