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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6화)
3장 지나가던 협객이라니(1)


“골치가 아프긴 뭐가 아프다는 거야? 이렇게 간단한 의뢰가 어디 있어? 딱 까놓고 말해서 식은 죽 먹기잖아. 보나마나 삼류일 게 빤한 무인 하나 죽이는 게 대체 뭐가 어렵다고. 귀찮아서 떠맡기 싫으니까 줄줄 늘어놓는 변명일 뿐이지.”
“마누라.”
“…….”
“어이, 마누라.”
“설마 지금 나 부른 거예요?”
“그래.”
“왜요?”
“비 맞은 중처럼 뭘 그렇게 계속 중얼거려? 정신 시끄러워.”
채신머리 없이 흙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고양이의 목을 쓰다듬고 있던 염노가 넌지시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
그 말을 듣고서 담서인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평소에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염노였다.
그래서 함께 나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미는데, 계속 말을 걸어오니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 점심 먹은 지 한 시진도 안 지났거든요?”
“어허, 이렇게 험한 일 하는데 그깟 소면 한 그릇 먹고 버틸 수 있나. 착수금 넉넉하게 받았을 테니 뭘 좀 먹지?”
“착수금을 넉넉하게 받기는 뭘 넉넉하게 받아요? 인건비도 안 나올 판국이구만.”
“에이, 쪼잔한 놈!”
금세 토라진 염노가 쉬지 않고 궁시렁댔다.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느니, 돈에 환장한 놈이라느니.
원래 듣기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물리는 법이었다.
하물며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말을 계속 들으면서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귀찮아서 시전에서 파는 육포라도 사서 저 입에 물려 놓으면 좀 조용해지지 않을까 고민할 때였다.
“저놈인가?”
염노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뗐고, 담서인도 두 눈을 빛냈다.
소심한데다가 더럽게 우유부단하기까지 해서 잔뜩 속을 태웠던 최종길의 마누라와 바람이 난 강호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염노와 함께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한 시진 전이었다.
그리고 놈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며 잠복한 지 한 시진 만에 마침내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요?”
“뭐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낯이 익긴 한데…….”
“그런데요?”
“잘 안 보여.”
잔뜩 기대하고 있던 담서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염노는 나이를 먹은 탓에 노안(老眼)이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서 보면 알 것 같아.”
“위험할 것 같은데.”
“그럼 그냥 포기할까?”
듬성듬성 빠진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태평하게 웃고 있는 염노를 노려보던 담서인이 치미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비록 노안이 오고 남의 속을 뒤집어놓는 데 선수이긴 했지만, 저 중년인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염노가 필요했다.
“일단 따라붙죠. 그리고 기회를 엿보다가 접근해 보도록 하죠.”
“그러지. 근데 조심해야 돼.”
“왜요?”
“저놈, 꽤 고수일지도 몰라.”
‘고수라고?’
담서인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는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중키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강호인이란 사실을 알리고 싶은 듯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안광이 형형한 것도 아니었고, 내공이 일정 수준 이상 쌓인 증거인 태양혈이 불룩 솟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별로 고수처럼 보이지 않는데.”
그래서 영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채 말하자 염노가 혀를 끌끌 차며 덧붙였다.
“눈깔에 힘을 잔뜩 주고 다녀야만 고수가 아냐. 쓸데없이 태양혈을 살피지 말고, 저놈의 걸음걸이를 봐라.”
“걸음걸이?”
“굳이 의식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보폭이 일정하지. 그리고 양어깨도 전혀 흔들리지 않잖아.”
“그게 고수랑 무슨 상관인데요?”
“이 무식한 마누라. 잘 들어. 보폭이 일정하다는 건 하체가 안정됐다는 뜻이고, 어깨가 흔들리지 않는 건 암습 같은 돌발 상황이 닥쳤을 때 최단 시간 안에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준비가 됐다는 증거야. 저렇게 걷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어. 제대로 수련을 해서 몸에 밴 놈들만이 저렇게 걸을 수 있는 법이지.”
담벼락에 기대서 있던 염노가 말을 마치자마자 미리 언질도 없이 갑자기 중년인에게로 다가가려고 했다.
“어디 가요?”
염노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서 소매를 붙잡았을 때였다.
“막 기억이 났다.”
“갑자기 뭐가요?”
“저놈이 누군지 알 것 같아.”
“아깐 잘 안 보인다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그래서 가까이 가서 확실히 살펴보려고.”
염노가 소매를 붙잡고 있던 담서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불안한 시선으로 그런 염노를 지켜보던 담서인이 물었다.
“무슨 계획은 있어요?”
“계획? 당연히 있지.”
“뭔데요?”
“그건 두고 보면 알아.”
염노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은 다음, 중년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혹시 사고 쳐서 일 그르치는 거 아냐?”
담서인이 보기에 염노는 정상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치매 걸린 노인처럼 기행을 일삼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아주 가끔씩만 멀쩡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노와 이곳에 동행한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염노의 기억력 때문이었다.

“이 강호에서 활동하는 놈들 중 내가 모르는 놈은 없을걸!”

염노는 술만 마시면 장담했다.
처음에는 헛소리라 치부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 말만큼은 사실이었다.
예전에 어떤 중년 여인이 강호소사전담반을 찾아와 의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중년 여인은 사업 실패로 형편이 어려워진 친정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남편 몰래 사채를 끌어 썼다가 무공을 익힌 사채업자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그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단 그 사채업자를 찾아갔다.
의뢰를 제대로 처리하기 위한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은 상대해야 할 자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그 사채업자는 별호조차 없는, 고작 삼류 축에도 끼지 못하는, 말 그대로 이름 없는 무인이었다.
당연히 그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불확실한 것은 위험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그래서 쉽게 일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염노가 나섰다.
그리고 염노는 단번에 그 사채업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덕분에 그 의뢰는 쉽게 해결이 가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염노는 강호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절정고수는 당연히 알고 있었고, 강호에 널리고 널린 삼류 무인들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염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담서인이지만, 염노의 눈썰미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한테 맡기고 맘 푹 놓고 기다리거라.”
최종길의 마누라와 바람이 난 사내를 향해 떠나기 전, 염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렇지만 시키는 대로 마음을 푹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막휘야!”
무작정 사내에게 다가간 염노는 손을 들어 다짜고짜 뒤통수를 후려쳤다.
물론 사내는 순순히 뒤통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마치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움직여 그 손을 피해 내면서 허리에 걸려 있던 장검의 검병에 손을 가져갔다.
스릉.
그리고 사내는 허리에 걸려 있던 장검이 단순히 멋으로 차고 다니는 장식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매섭게 뻗어 나온 검극은 염노의 목젖을 뚫기 직전에 멈추었다.
“누구지?”
싸늘한 눈초리.
하지만 염노는 겁먹지 않았다.
“이 불효막심한 새끼, 네 애비도 몰라보느냐?”
“……?”
“내가 니 애비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놀라운 연기였다.
입에서 침을 튀겨 가면서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는 염노를 바라보던 담서인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대단한 계획이라도 세우고 다가간 줄 알았는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리고 아쉬움에 치를 떨었다.
‘저 사내가 검을 멈추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번 기회에 염노를 아예 저 세상으로 보내 버릴 수 있었을 텐데.’
“미친 노인인가?”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확인하고서 마지못해 앞으로 나섰다.
염노가 객사하는 것은 요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일을 그르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또 왜 이러세요?”
담서인이 달려 나가 염노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보거라. 네 형을 찾았다.”
“진짜 왜 이러세요? 형이 죽은 게 벌써 십 년 전이잖아요.”
“네 형이 죽다니? 보거라. 여기 네 형이 멀쩡히 살아 있지 않느냐?”
염노는 마지막까지 열연을 펼쳤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온 이상, 장단을 맞춰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협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보시다시피 저희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셔서 가끔씩 이러신답니다.”
“치매라니? 멀쩡한 날 왜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게냐?”
염노는 이제 담서인의 멱살까지 움켜쥐고 흔들었다.
“네 형을 찾았는데 에미는 대체 어디 간 게냐?”
“그만하세요.”
“그만하긴 뭘 그만해? 네 에미는 어디 갔냐니까?”
“어머님도 삼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이런 썩을 놈. 멀쩡히 살아 있는 네 에미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이쯤 해도 될 텐데.
담서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염노는 그 바람을 들어주는 대신, 마치 빙의라도 된 것처럼 더욱더 열연을 펼쳐 냈다.
퍽!
어지간한 유랑 극단의 배우들보다 훨씬 실감나는 열연을 펼치던 염노는 기어이 담서인의 뒤통수까지 후려갈겼다.
빈정이 상해서 얻어맞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매섭게 노려볼 때, 사내는 어느새 사라져 버린 후였다.
“이런 나쁜 놈!”
“이제 그만해요.”
“뭘 그만해? 이 싹수가 노란 놈!”
“갔다니까요.”
“엥? 벌써 갔어?”
염노의 표정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을 확인한 담서인이 울컥했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단순한 연기가 아닌 것 같았다.
아까 뒤통수를 후려치던 염노의 손속은 무척 매서웠다.
분명히 감정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물증이 없었다.
심증만 가지고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짜 이럴 거예요?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찾아가서 죽을 뻔했잖아요?”
“지금 날 걱정하는 게냐?”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렇게 무모한 짓을 벌이다가 일을 그르치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래요?”
담서인이 언성을 높였지만, 염노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받아쳤다.
“원래 위험이 클수록 얻는 것도 많은 법이지.”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누군지는 알아냈어요?”
“그래.”
“누군데요?”
“우동균!”
“우동균?”
“적살검이라는 별호도 갖고 있지.”
기억을 더듬던 담서인이 곧 두 눈을 치켜떴다.
“적살검 우동균?”
“너도 알아?”
“일 났네, 일 났어.”
적살검 우동균은 삼류도 이류도 아닌 일류 고수.
역시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철무경의 말이 씨가 되었다.
이번 의뢰는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