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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7화)
3장 지나가던 협객이라니(2)
상촌에서 소문난 갑부인 황 영감의 사고뭉치 막내아들의 혼례가 끝난 것은 약 인시 무렵이었다.
하지만 혼례식이 끝난 후에도 뒤늦게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의 발걸음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그 때문에 음식을 만들어서 후원으로 나르는 일을 거들던 홍미옥이 일을 마쳤을 때는 자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고생했네.”
집사는 예상보다 일이 늦게 끝나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일당을 건넸다.
그리고 그 일당을 받자마자 홍미옥은 서둘러 돌아가려 했다.
남은 잔치 음식을 몰래 챙겨 둔 것이 차갑게 식어 버리기 전에 아들에게 가져다주고 싶어서였다.
잔치 음식을 주섬주섬 싼 보따리를 품에 꼭 안은 채 황 영감의 집을 빠져나온 홍미옥이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징그러운 늙은이!”
혼례식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내놓을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후원에 임시로 세운 허름한 천막은 작열하는 땡볕을 모두 막아 주지 못했다.
그 땡볕 아래서 온종일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 하고 허드렛일을 하는 것은 분명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벌써 환갑이 넘은 황 영감은 시도 때도 없이 추근거렸다.
“이깟 푼돈 몇 푼 벌려고 고생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하라니까. 그 예쁜 몸뚱어리가 축나는 게 아깝지도 않아? 눈 한 번만 딱 감고 내 방으로 기어 들어와. 그렇게만 하면 돈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다니까.”
일을 하기 위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때마다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던 그 끈적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고생이 많다며 다가와서 어깨를 은근슬쩍 어루만질 때는 징그러운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불쾌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평생 땅만 일구고 살아온,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있는 남편이 벌어 오는 돈으로는 생활비도 빠듯했다.
이렇게 허드렛일을 하고 일당이라도 받아야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서당에 보낼 수 있었다.
“휴, 아쉬운 사람이 참아야지.”
그래도 차가운 밤바람을 쐬고 나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홍미옥은 걸음을 서둘렀다.
인적이 끊기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뒷골목을 지날 때는 누군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 조금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지름길을 택했다.
잔치 음식이 차갑게 식어 버리기 전에 아들에게 먹이고 싶은 욕심이 두려움을 눌렀기 때문이다.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좁은 골목을 거의 뛰다시피 하며 바삐 걷고 있던 홍미옥이 도중에 헛숨을 들이켜며 멈춰 섰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흑의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좁은 골목 가운데를 막고 서 있었다.
“서방이 기다리나 보지?”
놀란 그녀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홱 몸을 돌린 후 도망치려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뒤쪽에서 한 사내가 막고 서 있다가 도망치던 그녀의 팔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이거 놔요!”
홍미옥이 소리쳤지만 사내는 팔을 움켜쥔 손을 떼지 않았다.
빙글빙글 웃으며 오히려 손에 힘을 더했다.
“아, 아파요!”
“앙탈은.”
“진짜 아프니까 이거 좀 놔요.”
“오, 뒤따라온 보람이 있었네. 얼굴이 반반한데다가 몸매도 쓸 만해.”
사내는 노골적으로 음심을 드러냈다.
욕정이 가득한 사내의 두 눈을 마주한 순간, 홍미옥은 온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며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썼다.
“누가 시켰어요?”
“응?”
“황 영감, 그 늙은이가 시킨 거예요?”
“황 영감?”
홍미옥의 이야기를 듣던 사내가 피식 웃었다.
“뭐야? 그 구두쇠 영감한테도 먹힌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클클, 숫처녀도 아닌 주제에 앙탈은 적당히 부리지? 조금만 기다려. 그 음침한 늙은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선사해 줄 테니까.”
“이거 놔욧!”
“이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돈만 밝히는 그 추잡한 늙은이하고 동서지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클클.”
사내가 음흉하게 웃으며 계속 헛소리를 지껄였다.
수치심이 너무 큰 탓에 홍미옥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다가 껄껄 웃고 있는 사내를 향해 잔치 음식이 담긴 보따리를 힘껏 휘둘렀다.
그러나 아쉽게도 회심의 공격은 빗나가고 말았다.
슬쩍 몸을 뒤로 젖혀 여유롭게 공격을 피한 사내는 벌컥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싱글거리며 웃었다.
“좋아, 너무 고분고분해도 재미가 없지. 원래 이렇게 앙칼진 면도 좀 있어야 더 재밌는 법이야.”
“대체 왜 이래요? 어서 보내 줘요. 어린 아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네. 제발 그냥 보내 주세요.”
“이걸 어쩌나? 아들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좀 약해지긴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우리도 좀 급해서 말이야.”
“…….”
“어린 아들은 오늘 밤에 독수공방해야겠어.”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오래 참았다는 듯이 거침없이 다가온 사내의 손이 홍미옥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누구라도 좋아. 제발 좀 도와줘!’
홍미옥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사내의 힘을 이기기에는 무리였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누군가 이곳에 나타나서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다 보니 자연스레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지금 그녀가 떠올린 얼굴이 십 년간 살을 맞대고 살았던 남편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내의 손은 마치 뱀처럼 움직였다.
홍미옥의 옷 위에 닿은 채 풍만한 가슴을 희롱하고 있던 사내의 능숙한 손놀림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혹시 도중에 맘이 바뀐 게 아닐까?’
홍미옥이 퍼뜩 떠올린 생각이었다.
하지만 헛된 기대였다.
잠시 멈추었던 사내의 손은 익숙하게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굳은살이 박힌, 투박하고 거친 사내의 손이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수치심과 모멸감, 그리고 무력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눈앞이 아득하게 변했다.
“제발…… 제발 그냥 보내 주세요!”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부탁했지만, 사내는 가슴을 움켜쥔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움켜쥐었다.
“아악!”
너무 아파서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치던 홍미옥의 품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받은 일당이 담긴 주머니가 떨어졌다.
짤랑.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동전들이 부딪치며 소리가 났다.
낄낄 웃으며 자기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또 한 명의 사내가 허리를 숙여 그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확인한 홍미옥이 소리쳤다.
“안 돼! 그 돈만큼은 절대 안 돼!”
악을 쓰며 소리쳤지만 갈의를 입은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기어이 주머니를 열어서 그 속에 든 동전을 확인했다.
“뭐야?”
“왜?”
“고작 동전이잖아!”
홍미옥의 반응이 워낙 격렬해서 은자가 가득 들어 있기를 기대했던 갈의사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뭐, 푼돈이긴 하지만 도랑 치고 가재 잡은 격이라 생각하지.”
그리고 갈의사내가 그 주머니를 품속에 넣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홍미옥이 서둘러 입을 뗐다.
“돌려줘.”
“뭐?”
“돌려 달라고!”
“이런 미친년! 돌려 달라고 하면 내가 순순히 돌려줄 것 같아?”
“제발 돌려주세요. 그 돈만 돌려주면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비장한 표정을 지은 홍미옥이 다급히 꺼낸 말을 듣고서 갈의사내가 동전 주머니를 다시 꺼냈다.
“뭐든지?”
“그래요. 뭐든지!”
툭.
그때까지 홍미옥의 손에 들려 있던, 잔치 음식이 든 보따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자유로워진 손으로 스스로 상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호오, 이건 또 뭐야?”
갈의사내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징그럽게 웃었지만, 홍미옥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몰려드는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두 눈을 꼭 감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가슴을 꽉 움켜쥐고 있던 흑의사내의 손이 사라졌다.
마침내 옷고름을 모두 풀어낸 홍미옥이 상의를 벗었다.
‘추워!’
하얀 속살에 찬 공기가 와 닿았다.
흠칫 놀라 부르르 몸을 떨던 홍미옥이 가슴 가리개마저 벗으려다 조심스레 두 눈을 뜨고는 깜짝 놀랐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좀 전까지만 해도 징그럽게 웃고 있던 갈의사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투박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난폭하게 움켜쥐고 희롱하던 흑의사내 역시 그 곁에 쓰러져 있었다.
대신 그녀의 앞에는 처음 보는 사내가 서 있었다.
“누구……?”
너무 놀라 가슴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홍미옥이 묻자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서 있던 사내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스윽.
황급히 소매를 들어서 입가에 흐르고 있던 닦아낸 사내가 표정을 수습했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입을 뗐다.
“난 지나가던 협객입니다.”
“지나가던 협객이라니.”
담서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저런 철 지난 대사를 날릴 생각을 할까.
오랫동안 추억만 먹고 살다 보니 임추량은 현실 감각이 떨어진 게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진짜 안 어울리네.”
담서인이 두 눈을 빛내며 홍미옥을 바라보았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던 중년의 의뢰인인 최종길과 홍미옥은 딱 봐도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최종길과 함께 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홍미옥의 미모는 뛰어났다.
“취향이 독특한 건가?”
이런저런 추측을 하던 담서인이 도중에 그만두었다.
부부 사이의 속사정은 누구도 모르는 법이었다.
어쩌면 시골 촌부나 다름없던 최종길이 알고 보면 대단한 정력가여서 홍미옥이 반한 건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코가 좀 크긴 했어. 코가 크면 정력이 좋다는 얘기를 염노한테 들었던 것 같은데…….”
자꾸 상상이 됐다.
그래서 붉게 상기된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있던 담서인이 순간 화들짝 놀랐다.
“어머, 망측하게시리.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찰싹.
담서인이 뺨을 때리며 중얼거렸다.
“아, 정말. 나 이런 여자 아니었는데.”
남자 손 한 번 잡아 본 적 없던 순진무구한 여자였는데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게 다 염노와 임추량 때문이었다.
아침저녁 가리지 않고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낄낄거리는 두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니 어느새 그들에게 물들어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임추량을 매섭게 노려보던 담서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홍미옥의 하얀 속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임추량의 입가에는 벌써 음흉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또 이상한 소리 하는 거 아냐?”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담서인이 바라볼 때, 지나가던 협객이라고 자신을 밝힌 임추량이 마치 덮칠 듯이 홍미옥을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