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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8화)
3장 지나가던 협객이라니(3)
‘이 남자, 대체 뭐지?’
홍미옥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스스로 협객이라 밝힌 남자를 살폈다.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소저가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을 발견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나섰소. 많이 놀랐겠지만 이젠 안심해도 되오.”
이제 안심해도 된다고 남자는 말했다.
그러나 그리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기생오라비처럼 곱상하게 생긴 얼굴, 아니, 곱게 늙어 가고 있는 얼굴은 왠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저 기괴한 웃음.
한쪽 입꼬리만 말아 올린 미소는 매력적이기는커녕 멍청해 보였다.
“우선 옷부터 입으시오.”
움찔하고 있던 홍미옥은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자신이 상의를 벗고 속살을 드러낸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 홍미옥이 서둘러 상의를 다시 걸쳤다.
‘고개라도 좀 돌려 주면 좋을 텐데.’
홍미옥의 바람과 달리 사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니,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마치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꿀꺽.
심지어 마른침까지 삼켰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이 사내 덕분에 위기를 넘긴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나서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사내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정말 고맙소?”
“네? 네!”
“그럼 내 부탁 하나 들어주시오.”
“……?”
“어디 들어가서 둘이서 오붓하게 술 한잔합시다.”
“술…… 요?”
“이렇게 험한 일을 겪었는데 잠이 오겠소? 자고로 안 좋은 일을 빨리 잊어버리는 데는 술의 힘을 빌리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는 법이오.”
갑자기 술타령이라니.
전혀 예기치 못한 제안이었다.
그리고 홍미옥은 지금 낯선 남자와 술을 마실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제가 급하게 가야 할 곳이 있어서…….”
그래서 사내가 꺼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홍미옥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갈의를 입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나서 일당으로 받은 동전 주머니를 찾기 위해 품속을 뒤질 때였다.
“혹시 이걸 찾소?”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사내의 손에 들려 있는 동전 주머니가 보였다.
“맞아요. 돌려주세요.”
“가져가시오.”
사내는 순순히 동전 주머니를 돌려주었다.
“어쨌든 감사했습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넨 홍미옥은 보따리를 집어 들고 걸음을 옮겼다.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꾹 참았다.
“잠시만.”
“또 뭔가요?”
“오늘은 급한 일이 있다고 했으니까 어쩔 수 없고, 대신 다음에 만나면 꼭 한잔 같이한다고 약속하시오.”
대체 무슨 수작일까?
사내는 무척 끈질겼다.
마음이 급한 탓에 끈덕지게 달라붙는 이 남자가 귀찮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차피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홍미옥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약속한 거요? 아, 내 이름은 임추량이오. 잊지 말고 꼭 기억해 두시오. 곧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린 채 멍청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는 사내를 살피다가 홍미옥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사내의 이름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재수가 없었어!’
그래, 오늘은 재수가 없을 뿐이었다.
홍미옥은 그저 미친개에 물렸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래도 더 큰일을 당하기 전에 위기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어딘가.
게다가 일당으로 받은, 돈이 든 주머니까지 되찾았으니 최악은 아니었다.
홍미옥이 품속에 잘 갈무리한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이 돈을 되찾았으니 내일부터 아들을 다시 서당에 보낼 수 있으리라.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는 잔치 음식이 든 보따리를 꽉 움켜쥔 홍미옥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4장 그럼 지금까지 외면했던 사람들은?(1)
용선 고서점이 문을 닫는 것은 술시.
술시가 지나자마자 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자, 슬슬 시작해 볼까?”
책에서 시선을 떼며 철무경이 말했다.
담서인이 가장 먼저 시작하려 했지만, 임추량이 조금 더 빨랐다.
“좋은 여자더군요.”
임추량이 다짜고짜 던진 말을 듣고서 담서인은 맥이 쭉 빠졌다.
세상에 이보다 더 모호한 말이 어디 있을까.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심정인 듯 일제히 눈총이 쏟아지자 임추량이 재빨리 덧붙였다.
“적어도 헤픈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근거는?”
“저한테 넘어오지 않았으니까요.”
임추량이 신빙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얼토당토않은 근거를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꺼냈다.
‘저 입을 확 꿰매 버리면 좋을 텐데.’
임추량을 매섭게 노려보던 담서인이 이 말도 안 되는 근거를 들은 철무경과 염노의 반응을 살피고 한숨을 내쉬었다.
놀랍게도 철무경과 염노는 마치 이 근거 없는 분석에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염노야 원래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렇다 쳐도, 대형까지 대체 왜 저래?’
하지만 담서인의 반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임추량은 신이 나서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살인 미소에 넘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정조 관념이 뚜렷한 여자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면…… 남자에 관심이 없든가.”
대체 저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담서인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볼 때, 임추량이 씨익 웃고는 좀 더 그럴듯한 근거를 댔다.
“관상학적으로 봐도 헤픈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색을 밝히는 여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가 있고, 귓불이 도톰하고, 콧대가 높으며, 입술이 얇고 붉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이 네 가지 요건 중 어느 것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특이점은?”
“음, 몸은 말랐는데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슴이 컸다는 것 정도?”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그야 직접 봤으니…… 하하, 이게 아니고. 뭐, 굳이 직접 보지 않더라도 옷태를 보면 대충 견적이 나오니까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임추량이 도중에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퍼뜩 떠오른 듯 다시 입을 뗐다.
“아, 하나 더. 돈을 좋아하더군요.”
“돈?”
임추량이 간략하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후 덧붙였다.
“보통 여자들이라면 겁탈을 당할 뻔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자리를 어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을 겁니다. 다른 건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여자는 달랐습니다.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던 사내의 품속을 뒤져서 빼앗겼던 돈을 찾고 난 다음에야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빼앗긴 돈이 많았나 보지?”
“푼돈이었습니다. 동전 서른 문.”
임추량이 재빨리 대답했다.
이번에는 임추량의 말이 옳았다.
은자도 아니고, 동전 서른 문은 절대 큰돈이 아니었다.
동전 서른 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객잔에 들러서 한 끼 식사를 푸짐하게 할 수 있는 게 전부였으니까.
딱 까놓고 말해서 동전 서른 문 정도 잃어버리더라도 사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철무경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동전 서른 문이 푼돈인가?”
“푼돈이죠.”
“지금 수중에 동전 서른 문 있나?”
철무경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임추량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네요.”
“동전이 모이면 은자가 되는 법이지. 그리고 돈의 가치란 함부로 재단할 수 없어. 동전 서른 문이 부자에게는 하찮은 푼돈이겠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며칠 굶은 사람에게는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큰돈이니까.”
철무경이 구구절절 옳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세상 물정 잘 모르고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 여자들이라면 저 멋진 말에 반해서 얼굴이 달아올랐으리라.
그러나 아쉽게도 담서인은 더 이상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 여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나이도 적잖이 먹었고, 강호소사전담반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다 보니 감수성은 진즉에 닳아 없어져 버렸다.
‘책을 읽는다고 돈이 나와, 밥이 나와?’
지금 대형은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을 외웠다가 그대로 줄줄 늘어놓는 게 빤했다.
그래서 콧방귀를 뀔 때였다.
“다음은 누가 할까?”
철무경이 재차 질문했고, 다시 담서인이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한발 늦었다.
간발의 차로 염노가 더 빨리 입을 뗀 것이다.
“그놈 정체를 알아냈네.”
“누구던가요?”
“우동균이란 놈이야.”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염노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임추량이 다시 나섰다.
“우동균이면…… 적살검?”
“그래, 그놈이지.”
“어라, 그 새끼 아직 살아 있었네?”
임추량이 흥미를 드러냈다.
과부들의 사생활과 항주 기루들에 새로 들어온 기녀들의 이름과 외모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임추량이 알고 있을 정도이니, 이건 적살검 우동균이 그만큼 대단한 고수라는 증거였다.
“이제 곧 죽겠지.”
“엥?”
“우리가 이 의뢰를 맡았으니까.”
염노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말했다.
물론 희망사항이었다.
담서인이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누가 죽여?’
염노는 다시 치매가 도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담서인이 한마디 쏘아붙이려 할 때였다.
“당연하지요. 악인의 최후는 죽음이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철무경까지 가세했다.
“만약 악인들에게 천벌이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서서 악인들에게 벌을 내려야죠.”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철무경이 덧붙였다.
감수성이 풍부한 젊은 여자들은 물론이고, 젊은 협객들의 마음까지 움직일 정도로 비장한데다가 결연하기까지 한 출사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담서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실패했다.
“틀렸어요.”
“뭐가?”
“잘 모르나 본데, 원래 나쁜 놈들이 더 잘 먹고 잘사는 법이에요. 그리고 악인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어요.”
“왜지?”
“이 세상엔 악인이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철무경을 힐끗 살핀 담서인이 덧붙였다.
“이번 의뢰, 깔끔하게 포기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