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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9화)
4장 그럼 지금까지 외면했던 사람들은?(2)


담서인이 처음부터 하고 싶던 말은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의뢰라 판단했다.
소심한데다가 우유부단하기까지 한 중년 남자 최종길에게 싫증이 난 부인이 그저 그런 삼류 무인과 바람이 난 거라 여겼으니까.
그리고 기껏 삼류에 불과한 무인 하나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의뢰를 받아들였는데…….
상황은 도중에 급변했다.
최종길의 부인과 바람이 난 강호인이 삼류가 아니었다.
거의 일류에 근접한 고수인 적살검 우동균이었다.
“이제 와서 포기하자고?”
가장 먼저 발끈하고 나선 것은 임추량이었다.
“그래요.”
“그래선 안 되지.”
“왜요? 갑자기 정의감이 막 불타올라요?”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술도 좀 고프고…….”
슬쩍 말끝을 흐리는 임추량을 바라보던 담서인이 인상을 썼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임추량에게 협의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술과 여자!
머릿속이 온통 두 가지로 가득 차 있는 한심한 양반이었으니까.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임추량은 고수가 아니었다.
무인이 가장 멀리해야 할 두 가지인 술과 여자를 모두 밝히는데 대단한 고수일 리가 없었다.
예전에 술에 취했을 때 주절주절 늘어놓기로는 한때 강호에서 촉망받던 후기지수였다고 했지만, 취하면 무슨 말을 못할까.
만취하면 동네 파락호도 무림맹주인 검선 독고진과 드잡이질을 할 정도의 고수가 되는 법이었다.
그런 임추량이 우동균 같은 일류 고수를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술 적당히 밝혀요.”
“왜?”
“그러다 죽어서 총각 귀신 돼요.”
그 충고를 듣고 움찔하는 임추량을 힐끗 살핀 다음, 염노에게 시선을 던졌다.
“왜? 겁나냐?”
마침 시선이 마주치자 염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뗐다.
“겁나죠. 우동균은 고수잖아요.”
“실력이 쓸 만하긴 해도 그래 봤자지.”
“그럼 염노가 죽일 수 있어요?”
“당연하지. 그깟 놈이야 한주먹감도 안 돼. 예전에 내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얘기해 준 적이 없었나?”
물론 들었다.
그것도 귀에 인이 박힐 정도로 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저 지겨운 이야기를 다시 들어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함부로 나서지 말아요.”
“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그러다 진짜 죽어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소리치는 염노에게 진심으로 충고를 건넸다.
움찔한 염노가 입을 다물자 담서인이 덧붙였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어머나.
엉겁결에 속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다행히 염노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저거, 날 걱정해 주는 거 맞지?”
“그런 것 같습니다.”
“마누라가 따로 없네.”
“염노는 좋겠소. 저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고.”
“말년에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 둘만 있으면 인생을 헛산 건 아니라고 하던데. 난 다섯이나 있으니 꽤 잘살았어.”
다섯이라…….
과연 저 다섯 명이 누굴까?
그리고 저 다섯 명 중에 설마 자신도 포함되는지 조금 궁금했지만, 담서인은 호기심을 그냥 묻어 두기로 했다.
염노와 더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기할 거죠?”
마지막으로 철무경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리고 당연히 포기할 거라 예상했는데, 그 예상이 빗나갔다.
“당연히 포기하지 않는다.”
“왜요?”
“믿음을 배신할 순 없으니까.”
철무경이 대답했다.
그리고 아직 끝이 아니었다.
“최종길이라는 자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의뢰했을 것이다. 상대는 강호인인데다가 고수.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겠지. 그 절박한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겠느냐?”
“그야 그렇지만…….”
“우리가 아니면 누구도 최종길을 도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번 의뢰를 끝까지 맡기로 결심했다.”
철무경이 열변을 쏟아 내는 것을 보던 담서인이 짤막한 한숨을 토했다.
‘예전에는 저러지 않았는데.’
확실히 최근 들어 철무경은 변했다.
납득하기 힘든 갖가지 이유를 들이대며 ‘불가!’를 외치던 때와는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찾아보기 힘들던 정의감이 가슴속에 자리 잡은 다음 막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고서점을 인수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 고심하던 담서인이 탄식했다.
철무경이 변한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책 때문이었다.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어 댄 영웅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겨 적어 놓은 협객에 관한 책을 계속 읽다 보니 자기가 대단한 협객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뭐, 돈도 없고.”
가만, 이것도 아닌가?
슬그머니 덧붙이는 철무경의 이야기를 듣던 담서인이 질문했다.
“두 사람을 죽일 방법은 있어요?”
최종길이 원한 것은 자신의 아내, 홍미옥과 그녀와 바람이 난 강호인, 두 사람을 모두 죽이는 것이었다.
둘 중 여자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공도 모르는 평범한 아낙네였으니까.
하지만 우동균은 달랐다.
일류 고수를 대체 무슨 수로 죽인단 말인가.
“꼭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바싹 타들어 가는 담서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철무경은 느긋하게 말했다.
그리고 비장미가 넘치는 표정을 지은 채 한마디를 덧붙였다.
“강호의 악인들로 인해 평범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지. 나는 차마 그들을 외면할 수 없다.”
철무경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담서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까지 외면했던 사람들은?”

* * *

새근새근.
벌써 한참 전에 꿈나라로 간 아들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최종길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뒤척였다.
아내가 곁에 누워 있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뒤척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뒷간에 다녀오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아내를 감시하느라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설친 탓에 최종길은 늦잠을 잤다.
눈을 뜨고 이불을 개고 나자 하나뿐인 아들이 보였다.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뽀얀 피부, 짙은 눈썹과 쭉 뻗은 검미, 그리고 똘망똘망 빛나는 눈동자까지.
이제 겨우 여덟 살이지만 아들은 귀티가 났다.

“자네 아들 맞아?”

함께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이런 농을 던질 정도로 아들은 아내를 쏙 빼닮았다.
이전까지는 저런 농을 들을 때마다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가볍게 받아넘겼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진짜 내 아들이 맞을까?’
의심이 깃들었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자연스레 차가워졌다.
그리고 한 번 의심이 깃들자 아들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내새끼라면 밖에 나가서 뛰어놀아야지. 늘상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는다고 밥이 나와, 돈이 나와?’
최종길로서는 한 글자도 알아보기 힘든 책을 펼친 채 보고 있는 아들에게 한소리 하려 할 때, 방문이 열렸다.
홍미옥이 간단하게 차린 아침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 호풍이, 아침부터 책 보고 있었어?”
“네!”
“기특하기도 하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홍미옥을 보자 괜히 화가 났다.
그래서 최종길이 퉁명스레 말했다.
“요즘 들어 일손이 무척 딸려. 그래서 말인데, 오늘부터 호풍이를 데리고 나가서 슬슬 밭일을 가르쳐야겠어.”
그 말이 끝나자 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던 홍미옥의 표정이 돌변했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제대로 못 들었어? 밭일을 가르치겠다고.”
“우리 호풍이가 서당에 나가는 거 몰라요?”
“그깟 서당에 다녀서 뭘 하는데? 글 같은 것 배워 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 제 이름 석 자만 쓸 줄 알면 그걸로 충분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 해요.”
“뭐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날 봐, 까막눈이래도 잘살고 있잖아.”
“잘살아요?”
“요즘 같은 흉년에 밥 안 굶고 살면 되는 거 아냐?”
“됐어요. 당신 같이 무식한 사람하고 무슨 말을 하겠어요? 여하튼 우리 호풍이는 서당에 가야 하니까 그런 줄 알아요.”
홍미옥은 딱 잘라 말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멈췄으리라.
하지만 오늘은 최종길도 격해진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무식해?”
“당신 입으로 방금 까막눈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무식한 나랑 사는 게 쪽팔려?”
“그만해요.”
“뭘 그만해? 그동안 쪽팔려서 어떻게 살았어?”
“그만하라고 했어요.”
“날마다 후회했겠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땅 파서 농사 지어 번 돈으로 밥 먹고사는 것뿐인 까막눈이랑 혼인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머리는 그만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뜨겁게 달구어진 가슴이 식지 않았다.
“그래요. 후회막심이에요. 당신이 내게 청혼했을 때 왜 받아들였을까? 내가 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절대로 당신과 혼인하지 않았을 거예요.”
홍미옥이 표독스레 노려보며 소리쳤다.
살쾡이처럼 잔뜩 독이 올라 있는 그 눈빛을 마주하자 가슴이 서늘했다.
그리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래서…… 그래서…….”
최종길이 더듬거리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으려다 망설였다.

―그 빌어먹을 새끼랑 바람을 핀 거야?

정말 하고 싶던 말은 이것이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레들린 것처럼 헛기침을 할 때였다.
“그만 싸워요.”
“…….”
“…….”
“싸우는 거 싫으니까!”
두 눈이 새빨갛게 변한 채 소리치는 아들을 바라보던 최종길이 벌떡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가뜩이나 비좁은 방에 자신이 머물 공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