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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12화)
5장 나랑 잘래요?(2)


“그 양반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소. 아내를 잃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든 그 양반이 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는 딸과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소. 하긴 쉽게 좁혀지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딸이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어떤 옷을 즐겨 입는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 또 무엇이 되고 싶은지 등등. 그 양반은 딸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소. 게다가 엄마를 죽게 만든 원인이 아버지라 생각하고 있는 딸은 이미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버린 상황이었소. 원래 굳게 닫혀 버린 마음의 문은 돈과 권력으로도 열지 못하는 법이오.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그 양반은 그래서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오.”
사내의 이야기가 마침내 끝났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최종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사내가 진짜 해 주고 싶은 말.
그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가지 말고 가끔씩 주위를 살피시오. 후회할 때는 이미 늦어 버린 후일 수도 있으니까.”
한마디를 덧붙이는 사내에게 최종길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내 이름은 철무경이오.”
“철무경?”
“당신이 의뢰를 맡긴 강호소사전담반의 실세요.”
사내가 대답을 마치고 일어나며 제안했다.
“그만 일어납시다. 이번엔 내가 한잔 살 테니까.”
가타부타 대답도 하기 전에 사내는 휘적휘적 걸어 주루를 나가 버렸다.
다시 혼자 남겨진 최종길은 한참을 더 그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철무경이란 사내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이 오롯이 아내 혼자만의 탓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취기가 슬슬 사라지자 갑자기 의심이 깃들었다.
“독고진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철무경은 검선 독고진을 잘 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양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또 하나, 좀 전에 철무경이 했던 이야기는 독고진을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할까?”
많아야 삼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철무경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역시 사기꾼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의심이란 원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부피를 키우는 법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의심쩍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빈 화주 잔을 노려보던 최종길이 고개를 갸웃했다.
‘담서인이라는 그 젊은놈도 자기가 강호소사전담반의 실세라고 말했는데. 대체 누가 진짜 실세지?’
확실히 이상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깃들기 시작한 의심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같이 갑시다!”
최종길이 사내를 놓치지 않기 위해 황급히 일어나 따라붙었다.

* * *

홍미옥이 그 사내를 다시 만난 것은 영풍객잔 앞에서였다.
머릿속이 하도 복잡해서 멍하니 땅만 보며 걷던 도중 웬 사내가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뺨을 후려칠 뻔할 정도로.
“이런, 벌써 날 잊었나 봅니다?”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손찌검을 여유롭게 피해 낸 사내는 못내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
“당신을 위험에서 구해 줬던 지나가던 협객. 이래도 기억 안 나요?”
불과 며칠 전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홍미옥의 기억력이 한심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사내는 한 번 보면 쉽게 잊기 힘들 정도로 드물게 잘생긴 편이었다.
게다가 저 멍청해 보이는 웃음만큼은 한 번 보면 절대 잊기 힘들었다.
“아, 기억났어요.”
마지못해 대답을 꺼내자 사내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그럼 이름은?”
‘이름이 뭐였더라?’
전에 분명히 들었던 것 같은데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억이 안 나나 보네요.”
“그게 잘…….”
“이거, 무척 섭섭합니다.”
“…….”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여자는 그쪽이 처음이거든요.”
확실히 감정 표현이 풍부한 사내였다.
“내 이름은 임추량! 또 잊어버리면 절대 안 되오.”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혼자서 너스레를 떨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던 홍미옥이 사과했다.
“제가 요새 정신이 좀 없어서.”
“요즘 고민이 많다는 것 알고 있소.”
“네?”
“그리고 고민이 많을 때는 술만큼 좋은 게 없소. 자, 얼른 들어갑시다.”
임추량은 막무가내로 손을 잡아끌었다.
깜짝 놀란 홍미옥이 그 손을 뿌리쳤다.
“왜 이래요?”
“왜 이러긴. 전에 약속했잖소.”
“약속이라니, 무슨?”
“이야, 이거 진짜 섭섭하네.”
임추량의 표정이 인생의 낙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처럼 비통하게 바뀌었다.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서 잊어버리다니. 내 순정이 짓밟혔어.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짓밟혔어.”
세상을 다 잃어버린 사람처럼 비통한 표정을 지은 채 임추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기억이 났다.
다음번에 만나게 되면 꼭 같이 술을 한잔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
“술은…… 다음에 해요.”
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넌지시 거절의 말을 꺼냈지만, 임추량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무척이나 끈질긴 사내였다.
“에이,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다음이 어딨소? 괜히 튕기지 말고 들어갑시다.”
“하지만…….”
홍미옥이 다시 한 번 거절하려 할 때였다.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요란한 소리를 듣고서야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안주를 많이 시킨다고 해서 미워하지 않을 테니까.”
짓궂은 표정을 지은 채 임추량이 재촉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홍미옥은 어느새 임추량의 손에 이끌려서 객잔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객잔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음식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상인처럼 보이는 두 사내가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방금 주방에서 나온 듯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어향육사와 회과육이 올려져 있었다.
꿀꺽.
홍미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임추량이 점소이를 불러 어향육사와 화과육, 그리고 탕초배골까지 시켰다.
“부족하면 더 시키시오.”
“아니요.”
서둘러 손사래를 친 홍미옥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근데 둘이서 먹기에는 너무 많이 시킨 것 같은데…….”
“돈 걱정은 마시오. 물주는 따로 있으니까.”
“네?”
“하하, 혼잣말이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시오. 어쨌든 이런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으니까 맘껏 드시오.”
기분 좋게 웃던 임추량이 술잔을 내밀었다.
가만히 그 잔을 바라보던 홍미옥이 결국 술잔을 받아들었다.
한 잔 정도야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 일단 한 잔 합시다.”
술잔을 부딪치고 입으로 가져갔다.
알싸한 술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짜릿했다.
이어 뱃속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 잔 더 하겠소?”
망설이던 홍미옥이 술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가득 찬 술잔을 입에 털어 넣고 빈 잔을 막 내려놓을 때, 임추량이 불쑥 물었다.
“나랑 잘래요?”

‘하여간 사내들이란!’
홍미옥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임추량을 노려보았다.
며칠 전, 뒷골목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마침 나타나서 자신을 도와주었기에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선해 보이는 사내의 눈빛도 나쁘지 않았고, 인상도 괜찮았다.
좀 뜬금없는 편이긴 했지만 가끔씩 던지는 농담도 재미있었다.
웃는 모습이 좀 멍청해 보이는 것이 단점이긴 했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해서 임추량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배가 좀 고프기도 했고.
무척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그래서 슬쩍 마음이 풀어지려고 할 때, 임추량이 말했다.

“나랑 잘래요?”

방금 임추량이 던진 말로 인해서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 왔던 호감은 한꺼번에 눈 녹 듯이 사라져 버렸다.
“나한테 원한 게 결국 그거였나요?”
홍미옥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임추량은 당황하지도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그럼 뭐라고 생각했소?”
“…….”
“혹시 내가 그쪽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착각이라도 한 건가? 욕심이 지나치구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그렇게 눈이 낮지가 않소.”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임추량은 독설을 날렸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매섭게 노려보는 홍미옥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임추량은 계속 독설을 퍼부어 댔다.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가 본데, 당신의 현재 상황을 직시하시오. 애까지 딸린 유부녀. 얼굴이 좀 반반한 편이긴 하지만 한눈에 반할 정도로 대단한 미인도 아니고, 나이는 많고 가진 돈도 없소. 그런 별 볼 일 없는 아줌마에게 한 번 즐기는 것 말고 내가 원하는 게 뭐가 있겠소?”
홍미옥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당장에라도 임추량의 싸대기를 날리고 싶을 정도로 분했다.
하지만 더 분한 것은 지금 임추량이 꺼낸 말이 모두 틀린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반박할 말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임추량을 노려보던 홍미옥이 다시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나서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당신과 자면 당신은 내게 뭘 해 줄 거죠?”
의외의 말에 놀라서일까?
놀란 듯 두 눈을 치켜뜨고 있던 임추량이 보였다.
처음에는 임추량의 얼굴에 술을 퍼부어 버리고 이 불편한 자리를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뀐 것은 그날 밤 순식간에 두 명의 파락호를 제압하던 임추량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