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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13화)
5장 나랑 잘래요?(3)
“뭘 원하오?”
“당신은 강호인인가요?”
“뭐, 그런 셈이지.”
“고수인가요?”
“고수였소. 한때는 드넓은 강호에서 가장 촉망받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었으니까. 지금은 별 볼 일 없게 변했지만.”
순간, 임추량의 입가로 씁쓸한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홍미옥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말했다.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무공?”
“네, 무공!”
“강호를 동경하는가 보구려.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호라는 곳은 서른 넘은 애 딸린 유부녀가 동경할 만한 곳도, 또 그렇게 만만한 곳도 아니오.”
“그건 내 사정이니 그쪽이 신경 쓸 것 없잖아요.”
“그렇긴 하군. 그렇지만 노파심 때문에 이것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소. 호사가들이 떠들어 대는 강호는 진짜 강호가 아니오. 절대 동경할 만한 곳이 아니라는 뜻이오. 좀 더 자세히 파고들어 살펴보면 아주 무서운 곳이오.”
“그래서 가르쳐 주겠다는 건가요, 말겠다는 건가요?”
“물론 가르쳐 줄 생각이 없소.”
임추량이 단칼에 잘라 말했다.
“이유가 뭐죠?”
“강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어느 정도는.”
“아니, 당신은 강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오. 방금 내게 그런 거래 조건을 내건 것이 바로 그 증거요.”
홍미옥이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임추량은 빙글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강호인은 무공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오. 그런 무공을 그저 하룻밤 즐긴 대가로 꺼내 놓을 것 같소?”
“…….”
“혹시 누가 그렇게 말했나 보구려.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둘 중 하나일 거요. 제대로 된 무인이 아니거나, 그쪽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임추량의 설명을 모두 들은 홍미옥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사내의 말이 진짜일까?’
강호인들이 무공을 중히 여긴다는 것은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가는 지레짐작만 했을 뿐,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했다.
홍미옥이 가진 것은 사내들이 군침을 흘리는 반반한 얼굴과 몸.
가장 소중한 것을 내준다면 그 사내도 가장 소중한 무공을 내놓을 거라 여겼으니까.
‘내가 속은 걸까?’
그래서 홍미옥의 머릿속이 아득하게 변해 갈 때, 임추량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듯 웃으며 말했다.
“저 영감, 또 왔네.”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닐세. 그러니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라고. 기대하게. 오늘은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내 놓을 테니까. 아, 물론 그전에 일단 목부터 한잔 축이고 시작해야겠지.”
염노가 앞에 따라 놓은 술을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켰다.
“캬아.”
기분 좋게 트림을 한 염노가 아직 술이 모자라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들려줄 이야기는 바로 패천호혈장에 관한 걸세!”
좀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럽던 객잔 안은 순식간에 조용하게 변했다.
패천호혈장이란 단어가 만들어 낸 파급 효과였다.
객잔 안에 흐르고 있던 침묵을 깬 것은 허리에 칼을 찬 중년의 한 무인이었다.
“패천호혈장이면 사혈권 권수창의 독문 무공이 아닌가.”
“어? 자네, 아주 잘 알고 있구만.”
“사혈권이 대단한 고수이긴 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자. 대체 그자의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이유가 뭔가?”
“허! 거, 성격도 급하기는. 내 말을 잘 들어 보고 어디 한 번 맞춰 보게. 호랑이는 죽을 때 가죽을 남기는 법이고, 사람은 죽을 때 이름을 남기는 법이지. 그럼 무인은 죽을 때 뭘 남기겠나?”
눈치 빠른 누군가가 어느새 다시 채워 놓은 술 한 잔을 들이켜며 염노가 물었다.
“병기?”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객잔 내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대답하자 염노는 혀를 끌끌 찼다.
“자네, 강호인 맞나? 사혈권 권수창은 권법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일세. 그런데 무슨 병기를 남기겠나? 쯧쯧.”
병기라는 대답을 한 사내에게 타박을 주자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넘치던 객잔 안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객잔 내부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염노가 아까 질문의 답을 내놓았다.
“무인이 죽을 때 남기는 것은 바로 무공일세.”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년 무인이 다시 입을 뗐다.
“하지만 패천호혈장은 분명히 절전됐다 들었는데?”
“누가 그래?”
“소문이…….”
“강호에 돌고 도는 소문 중에 믿을 만한 게 과연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자네 말일세…….”
처음부터 관심을 드러내고 있던 중년의 무인 앞으로 다가간 염노가 그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올렸다.
“말이 꽤 짧군. 그러다가 제 명에 못 죽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새파랗게 젊은 놈이 반말을 찍찍 내뱉는 거야!”
“당신이 누구…… 아니, 누구…… 신데요?”
“알면 다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목마르니까 술이나 한 잔 따라 봐. 보자, 어디까지 얘기했지?”
다짜고짜 윽박지르는 염노의 기세는 사뭇 대단했다.
꽤 험상궂게 생긴데다가 한 성격 있을 것처럼 보이던 중년 무인이 꼼짝도 하지 못할 정도로.
“염노, 정신이 반쯤 나간 늙은이.”
그 중년 무인을 대신해서 대답한 것은 담서인이었다.
물론 혼잣말이었다.
큰 소리로 얘기해서 산통을 모두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염노에게서 시선을 뗀 담서인이 고개를 돌렸다.
곧 홍미옥과 마주 앉아 있는 임추량을 발견했다.
“아, 징그럽게 왜 자꾸 웃는 거야?”
담서인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임추량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칭 살인 미소를 날렸다.
그 살인 미소로 인해 임추량은 더 멍청해 보였다.
“나도 여자이지만, 여자란 정말 알 수가 없는 존재야.”
저렇게 한심한 미소에 넘어가다니.
담서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진짜 돌겠네!”
홍미옥과 마주 앉아 있는 임추량의 탁자 위에는 값비싼 요리가 무려 세 가지씩이나 놓여 있었다.
“뭐야? 어향육사, 회과육에 탕초배골까지?”
저 요리들에다가 백아주까지 더한다면 족히 은자 다섯 냥은 나오리라.
“아주 날을 잡았네, 잡았어.”
임추량이 저걸 계산할 리가 없었다.
쥐꼬리만큼 받은 착수금을 믿고 마구 시킨 것이리라.
담서인이 한숨을 내쉴 때, 염노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해 냈다.
“내가 왜 이 자리에서 뜬금없이 그 이야기를 꺼내느냐? 내가 노망 들지 않은 이상 그 이유는 있지! 바로 패천호혈장이 지금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야! 모두 알지? 눈먼 무공 비급은 먼저 줍는 놈이 임자라는 거.”
사람의 욕심은 무섭다.
염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두 눈에는 좀 전과 달리 어느새 욕심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사람들 가운데 중년 무인이 더 기다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게 사실이오?”
“에이, 평생 속고만 살았나? 맹세컨대 난 거짓말 따위는 입에 올리지 않아.”
염노는 당당했다.
염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담서인마저 깜박 넘어갈 정도로.
“입만 열면 거짓말이면서.”
담서인이 툴툴거렸다.
그렇지만 지금 이 말을 꺼낸다 해도 누구도 믿지 않으리라.
사람이란 원래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족속이니까.
욕심이란 그래서 무섭다.
그리고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매화자로 나섰어도 평생 먹고사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염노의 언변은 노련하고 뛰어났다.
“그래서 패천호혈장이 지금 어딨다는 겁니까?”
“누군가 가지고 있겠지.”
“그게 누구요?”
“거참, 젊은 놈이라 그런지 성질도 더럽게 급하구나. 너 같은 놈만 있으면 세상에 매화자는 다 굶어 죽을 게다.”
슬쩍 본론을 꺼내는 척하다가 다시 노련하게 주변부로 빠져나갔다.
이미 염노가 꺼낼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담서인마저 감칠맛이 날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새 또 한 잔의 술을 얻어먹은 염노가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시선들을 즐기며 다시 이야기를 풀어냈다.
“원래는 정도혁이란 무인의 손에 패천호혈장이 들어갔지. 정도혁이 누군지 모르겠지? 그게 당연한 거야. 별호조차 없는 삼류 무인이니까. 옛말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 보물은 정해진 임자가 없다고. 딱 그런 경우였지. 패천호혈장이라는 보물이 저절로 굴러 들어왔으니 이제 정도혁에게 남은 건 딱 하나뿐이었어. 그 무공 비급을 들고 조용한 곳에 짱 박혀서 열심히 익힌 다음에 절정고수로 변신해서 떵떵거리며 사는 거였지. 근데 문제가 생겼어.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술 한잔 걸치다가 강호인과 시비가 붙은 거지. 참 멍청한 놈이야. 술 먹고 싶은 것 한 번 참고 곱게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콕 틀어박혀서 몇 년만 고생했으면 절정고수가 되는 거였는데 말이야. 그러니 모두 명심해. 술은 마물이라 몸에 안 좋아.”
언변은 청산유수였다.
문제는 언행일치가 안 된다는 점이었다.
또 한 잔의 술을 벌컥 들이켠 염노가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멋쩍게 웃었다.
“뭐, 자네들도 인생을 오래 살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몸에 좋은 거만 하고 살면 재미가 없다는 걸. 그보다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지? 그래, 정도혁이 강호인과 시비가 붙었다는 데까지 했지. 정도혁은 죽었어. 시비가 붙은 강호인의 성격이 더러웠거든. 당연히 패천호혈장도 그 강호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지. 정도혁은 운이 더럽게 없었고, 이 강호인은 운이 엄청 좋았지. 말 그대로 보물을 거저 주웠으니까.”
“대체 그 강호인이 누구요?”
“궁금해?”
“당연한 것 아니오. 뜸들이지 말고 얼른 말 좀 하시오.”
조바심이 난 사람들이 재촉하자 염노가 샐쭉 웃었다.
“그럼 알려 주지. 바로 적살검 우동균이야.”
소란스럽던 장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우동균의 이름값이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었다.
보물은 탐나지만, 그 보물에 욕심을 내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람들을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반응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염노는 스스로 채운 술잔을 느긋하게 들어 올렸다.
“그자는 어딨소?”
그때, 누군가가 질문했다.
황갈색 장삼을 걸치고 염소수염을 기른 장한.
어깨 위로 삐죽 솟아 있는 거도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기 항주에 있지.”
“항주가 좀 넓소?”
“아주 숟가락으로 밥까지 떠먹여 달라는 심보로군.”
툴툴거리면서도 염노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까짓것 술도 얻어 마실 만큼 마셨으니 알려 주지. 그는 하촌에 있어. 주신루는 어딨는지 알지? 주신루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쭉 걸어 내려오다 보면 시전이 나오지. 그 시전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다 보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와집이 있어. 그 가운데 일곱 번째 집에 적살검이 머물고 있어.”
벌컥 술을 들이켠 염노가 소매로 입을 닦는 사이, 거도를 등에 멘 사내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왜 거기 머물고 있지? 당신 말대로 나라면 심산유곡에 콕 틀어박혀서 패천호혈장을 익힐 텐데, 왜 항주 바닥에 머물고 있냐고?”
“다 이유가 있지.”
“……?”
“부상을 입고 쫓기고 있었거든. 피 냄새를 사방에 흘리면서 심산유곡에 틀어박히면 말 그대로 날 죽여 달라는 말밖에 더 되겠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눈이 많은 항주로 들어오는 모험을 했다고?”
“쯧쯧, 자넨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만. 세상에서 가장 독한 냄새가 뭔지 아나? 오줌 냄새? 똥 냄새? 피 냄새? 틀렸어. 세상에서 가장 독한 냄새는 사람의 탐욕이 뿜어내는 냄새야. 피 내음을 감추기 위해 그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섞인 거지. 등하불명이란 말뜻을 제대로 이해한 영리한 놈이지.”
염노의 말은 반박할 말을 찾기 힘들 정도로 논리정연했다.
그래서 고요하던 객잔 내부는 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거짓이면 당신은 죽어!”
거도를 등에 멘 염소수염장한이 가장 먼저 빠져나갔다.
그리고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객잔 내부에 가득 찼던 손님들은 어느새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실력도 없는 놈들이 욕심은 더럽게 많아 가지고. 하긴 욕심이 없으면 그게 어디 사람이더냐? 자, 나도 슬슬 가 볼까?”
염노는 툴툴 웃으며 거의 마시지 않아 새것이나 다름없는 술병을 냉큼 품속에 챙기며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