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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14화)
6장 녹슨 낫(1)
“하아, 하아.”
보보를 뗄 때마다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땀방울이 흘러내려 눈으로 파고들었지만, 운신의 편리를 위해 치마를 양손으로 움켜쥔 탓에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내의 이름은 몰랐다.
여태껏 알려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딱 하나, 자신의 성만큼은 알려 주었다.
‘분명히 우가라고 했어!’
사내는 자신을 우 대협이라 부르라고 했다.
하지만 홍미옥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사내의 앞에서는 의식적으로 입을 열지 않았고, 사내가 보지 않을 때는 보통 이렇게 불렀다.
―개새끼!
어쨌든 성이 우가라는 것만으로 매화자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 등장한 자가 그 사내라고 여긴 것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증거가 있었다.
매화자가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도중 밝힌 집의 위치.
그 집의 위치는 사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홍미옥은 바로 객잔을 빠져나왔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임추량이라는 사내가 뭐라고 말했지만,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홍미옥은 비로소 우가가 머물고 있던 기와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어둠에 잠겨 가는 기와집을 바라보았다.
매화자가 들려준 이야기.
그게 모두 사실인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야기의 사실 여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것은 우가가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무공을 내놓은 후여야만 했다.
발소리를 죽인 채 홍미옥이 마당을 걸었다.
그리고 우가가 머물고 있을 방의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막 잡았을 때였다.
벌컥.
갑자기 문이 열렸다.
동시에 시퍼런 뭔가가 다가와 목젖에 닿았다.
그게 검신이라는 건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왜? 또 발정이라도 났나 보지? 어쨌든 안 그래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제 발로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군.”
검을 든 채로 우가가 나왔다.
목젖에 닿아 있던 검신이 떨어졌지만, 홍미옥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뱀처럼 매섭게 빛나는 사내의 두 눈을 바라본 순간, 움직이기는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두 손이 덜덜 떨렸다.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홍미옥은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버텼다.
“당신이 적살검…… 우동균, 맞아?”
간신히 입을 떼자 우동균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은 알려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우동균에게서 뿜어지는 진득한 살기가 홍미옥을 꽁꽁 묶었다.
그러나 홍미옥은 여기서 겁을 집어먹고 포기할 수 없었다.
“들었어.”
“어디서?”
“객잔의 매화자에게서.”
“이런 개 같은.”
잔뜩 표정이 일그러지는 우동균을 노려보며 홍미옥이 어렵게 입을 뗐다.
“약속을 지켜.”
“무슨 약속?”
“전에 약속했잖아. 나랑 자면…… 틀림없이 무공을 알려 준다고.”
“미친년!”
홍미옥이 억지로 쥐어짜 내 건넨 말을 듣고서 우동균은 코웃음을 쳤다.
“설마 그 약속을 믿었어?”
“…….”
“이 한심한 년아, 네 몸뚱어리에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해? 내 무공을 알려 줄 만큼? 역시 못 배운 년이라 그런지 멍청하기 그지없군.”
덜덜덜.
순간, 오한이 찾아온 것처럼 홍미옥의 온몸이 떨렸다.
남편에 자식까지 있는 유부녀의 몸으로 외간 남자와 살을 섞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땅을 파서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것을 유일한 진리로 믿고 사는 남편은 제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하는 까막눈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고 혼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의 그런 성실하고 우직한 면에 끌려서 혼인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런 면이 남편으로서는 듬직했지만 아버지로서는 아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과 남편이 겹쳐질 때마다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아들인 호풍이를 평생 농사만 짓는 까막눈에 무지렁이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면서까지 몸을 줬다.
아들을 위해서란 미명하에.
“그거라도 줘.”
“미친년, 지가 곧 죽을 판국인지도 모르고 또 뭘 달라는 거야?”
“패천호혈장!”
홍미옥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동균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도 매화자에게서 들었나?”
“그래.”
“흥, 빨리 여길 떠야겠군.”
“못 가. 무공을 주기 전에 당신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
“이거, 진짜 웃기는 년이로군.”
코웃음을 치던 우동균이 아래로 늘어트리고 있던 검신을 들어 올렸다.
시리도록 푸른 검신.
그 검신을 겨눈 채로 우동균이 빈정거렸다.
“살 몇 번 섞었다고 해서 속정이라도 들었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거 큰 착각이야. 너 같은 년은 지천으로 널렸어.”
우동균의 입가로 떠오른 섬뜩한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고 허공으로 솟구쳤던, 푸른빛이 감도는 검신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노려보던 홍미옥이 예정된 죽음을 직감하고 질끈 눈을 감을 때였다.
“여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홍미옥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남편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태까지 당연히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런데 왜 여기 나타났을까?
이 사람이 여기 서 있는 것이 의미하는 게 뭘까?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죽여!”
그래서 홍미옥이 외쳤다.
남편은 자신의 부정한 행동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 나타난 것이 그 증거였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남편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남편의 얼굴을 마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냥 이렇게 죽어 버리는 편이 나았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어서 죽이라고!”
그래서 홍미옥이 간절한 목소리로 재촉했지만, 허공에 솟구쳤던 시퍼런 검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거 재밌네.”
우동균이 입매를 실룩였다.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뛰는 저 멍청한 년을 죽이고 그만 이곳을 뜰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점점 재밌게 돌아갔다.
잡풀을 베는 데 사용하는 녹슨 낫 한 자루를 들고 서 있는 시골 무지렁이를 힐끗 살핀 우동균의 눈동자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마치 벌레를 바라보듯이.
“네가 이 멍청한 년의 서방인가 보지?”
사내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콧김만 거칠게 내뿜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 마. 꼬리를 친 것도 저년이었고, 가랑이를 먼저 벌린 것도 저년이었으니까.”
“개…… 새끼.”
사내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금세 흉신악살처럼 변한 사내의 표정을 살피며 우동균은 코웃음을 쳤다.
“그 녹슨 낫은 왜 들고 왔지? 설마 그 낫으로 날 죽이려고?”
“그래, 이 개새끼야!”
“이거, 진짜 재밌네.”
우동균이 클클 웃었다.
벌레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벌레일 뿐이었다.
힘없이 이리저리 기어 다니다가 누군가의 발에 짓밟혀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벌레의 삶이었다.
지금 저 손에 녹슨 낫이 아니라 천하제일의 보검을 쥐어 줘도 벌레는 날지 못하는 법이었다.
“죽인…… 다.”
“그럼 어디 한 번 해 봐.”
“진짜로 죽여 버린다.”
녹슨 낫을 허공으로 치켜올린 채 사내는 한 걸음씩 다가왔다.
콧김을 씩씩 내뿜으면서, 눈물을 쏟아 내면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내를 우동균이 가소로운 표정을 지은 채 바라보았다.
저 녹슨 낫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좀 더 보고 싶었다.
벌레가 최후의 발악을 하는 장면을.
“죽어!”
아까부터 허공에 치켜들려 있던 녹슨 낫이 마침내 아래로 떨어졌다.
“한심하긴!”
그 낫의 궤적을 살피던 우동균이 혀를 끌끌 찼다.
아까부터 전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하는 궤적.
그래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바라보던 우동균이 순간 두 눈을 치켜떴다.
푹.
잡풀도 제대로 베지 못할 정도로 녹슨 낫이 틀어박혔다.
자신의 엉덩이에 틀어박힌 녹슨 낫을 홍미옥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팠다.
지독히 아팠다.
손끝만 살짝 베여도 아픈 것이 사람이었다.
그런데 비록 녹슨 낫이라고 해도 날카로운 쇠붙이가 살점을 파헤치고 틀어박혔으니 어찌 아프지 않을까.
그런데 신기한 것은 엉덩이에 박힌 쇠붙이에 의한 아픔보다 황폐해지고 찢어진 마음이 더 아팠다.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최종길은 두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홍미옥이 그런 그를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섞인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을 때, 최종길이 힘겹게 입을 뗐다.
“왜?”
“…….”
“대체 왜 그랬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홍미옥은 대답하는 대신 부탁을 했다.
“죽여.”
“뭐?”
“차라리…… 죽여 줘.”
엉덩이에 박혀 있던 녹슨 낫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최종길은 그 부탁을 들어줄 요량처럼 허공으로 낫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낫을 움켜쥔 손에서 힘줄이 불거졌지만, 끝내 그 낫을 휘두르지 못하고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아마 갈등하고 있으리라.
미운 정도 정이었고, 부부라는 인연은 결코 가볍지 않으니까.
“어서 죽여 줘.”
“진심이야?”
“그래. 나같이 멍청한 년은 죽어야 해.”
“이 미친년!”
처음이었다.
남편이 자신에게 이런 심한 말을 한 것은.
하지만 화가 나지도 않았다.
더 심한 말을 들어도 싸니까.
그리고 낫을 움켜쥐고 있는 최종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바보!’
홍미옥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한 행동은 죽어 마땅했다.
그렇지만 소심한데다가 착해 빠진 남편은 자신을 용서하려 하고 있었다.
고작 엉덩이에 낫을 틀어박은 것으로.
‘왜 미처 몰랐을까?’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제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무식한 까막눈이고, 할 줄 아는 것은 농사를 짓는 것뿐이라며 무시하고 경멸했다.
하지만 그 단점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최종길이 가진 장점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성실하고,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착한 심성을 가진……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고 남편이었는데.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홍미옥이 눈물을 쏟아 내고 있을 때였다.
“왜? 못 죽이겠나?”
우동균이 끼어들었다.
“그럼 내가 대신 죽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