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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16화)
6장 녹슨 낫(3)


담서인은 걸음을 멈추고 풀이 죽은 호풍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호풍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여덟 살.
피와 살점이 튀고, 팔다리가 잘려 나가 바닥을 뒹구는 끔찍한 광경을 마주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그래서 어떤 말로 위로해 줄까를 고민하다가 축 늘어트리고 있는 호풍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가끔씩은 위로의 말을 던지는 것보다 그저 곁에서 말없이 지켜봐 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나!”
“응?”
무심코 대꾸하던 담서인은 흠칫했다.
자신은 지금 남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대체 어떻게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단숨에 알아채고 누나라고 부르는 걸까?
“방금 뭐라고 그랬어?”
“누나요.”
“어떻게 알았어?”
“그냥요.”
아, 이 타고난 미모는 감출 수가 없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피부가 상해도 타고난 미모는 어딜 가지 않았다.
근데 이 어린 꼬마조차도 단번에 자신이 여자라는 걸 알아챘는데 어떻게 강호소사전담반의 동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걸까?
“예쁘잖아요.”
호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서 담서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아이들의 눈은 정직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껏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때였다.
“들꽃이.”
“엥?”
“나무가, 바람이, 구름이…… 그리고 이 세상이 예쁘잖아요.”
뭐야? 지금 나한테 한 말이 아니었어?
괜히 멋쩍어서 상기된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호랑이의 형상을 한 구름을 올려다보느라 한창 정신이 팔려 있을 때, 호풍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 예쁜 세상을 지키고 싶어요.”
“어떻게 지킬 거야?”
“강해질 거예요. 내가 강해지면 좋아하는 걸 지킬 수 있다고 그랬어요.”
“누가?”
“아저씨가 그랬어요.”
호풍이 말하는 아저씨가 누군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런 닭살 돋는 말을 해 줄 사람은 대형밖에 없었으니까.
‘또 애 하나 버려 놨네.’
어느 책에선가 읽은 문구를 줄줄 늘어놓았을 대형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던 담서인이 무릎을 꿇고 호풍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 말 믿지 마.”
“왜요? 거짓말이에요?”
“음, 거짓말은 아냐.”
“그런데 왜 믿지 말라는 건데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아. 강호라는 곳은 더욱더. 그리고 네가 말한 것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단다. 거의 불가능하지. 그러니까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대형의 입 발린 소리에 홀랑 넘어가서 한 번뿐인 인생을 망치는 이는 자신만으로 충분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구만 리인 이 어린 녀석이 헛된 꿈을 꾸면서 아까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담서인이 친절하게 충고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녀석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해 보고 싶어요.”
“왜?”
“그 아저씨가 멋있어 보였거든요.”
“잘못 본 거야.”
대형이 멀쩡하게 생기긴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 미남이었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일 뿐이었다.
실상을 알고 보면 한심한 백수나 다름없었다.
“그만 가자.”
“네.”
담서인은 호풍의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풍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이 눈에 들어왔다.
“우린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누나, 또 볼 수 있어요?”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겠지.”
“누나를 만나러 찾아가도 돼요?”
“아니, 오지 마.”
“왜요?”
날 만나다 보면 강호와 자꾸 엮이게 될 테니까.
그러다 보면 강호의 비정한 면을 보게 될 것이고, 그때는 간신히 가진 꿈이 산산조각 나 버릴지도 모르니까.
진짜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꾹 참은 채 적당한 말을 꺼냈다.
“나중에 더 커서 와.”
“왜요?”
“누나는 연하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언젠가 강호라는 비정한 곳에서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을 때 누나를 찾아와. 그땐 화주 한잔 사 줄 테니까.”
담서인은 호풍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돌아섰다.
그리고 한참을 걷다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강호인도 아닌 주제에.”
요즘 들어 주제도 모르고 훈계를 늘어놓는 버릇이 생겨 버렸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게 다 대형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탓에 물이 든 탓이었다.
“나도 멋진 협객이 되고 싶었는데.”
갑자기 울적해졌다.
그래서 오늘은 아예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찰랑.
술잔에 가득 채워진 화주를 바라보던 담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망설이고 있자 임추량이 어깨를 탁, 쳤다.
“넌 또 왜 오만상을 쓰고 있냐? 의뢰도 멋들어지게 해결했는데.”
“뭐, 해결이야 했죠.”
“그럼 된 거지.”
살짝 붉게 변한 임추량의 곱게 늙어 가는 얼굴과 술잔을 번갈아 바라보던 담서인이 결국 술잔을 들었다.
임추량의 말이 옳았다.
과정이야 어쨌든 의뢰를 해결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손 안 대고 코를 푼 셈이네요.”
적살검 우동균은 일류 고수로서 무척 위험한 자.
그래서 담서인은 이번 의뢰를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일은 쉽게 풀렸다.
우동균은 패천호혈장이란 비급을 노리고 찾아온 강호인들의 합공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으니까.
“누가 풀어 줬든 코를 푼 게 중요한 것이지. 막힌 코를 스스로 풀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
염노가 간만에 강호의 노고수처럼 말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담서인이 불쑥 떠오른 의문을 풀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염노는 우동균이 패천호혈장을 얻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그러니까 어떻게요?”
쉽게 물러서지 않고 대답을 재촉하자 염노는 볼품없이 헝클어진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보자, 어디서부터 설명해 주면 저 머리 나쁜 놈이 이해를 할까? 그래,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구나. 전에 내가 한 번 얘기한 적이 없었나? 예전에 내가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관해서. 안 했어? 그럼 다시 하지 뭐. 예전에 내가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면 말이지, 내 손에 강호, 아니, 천하의 운명이 걸려 있을 때가 있었는데…….”
“됐어요. 대충 알 것 같으니까 그만해요.”
예전에 내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로 시작하는 염노의 이야기는 이미 귀에 인이 박힐 정도로 들었다.
그리고 담서인은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질 그 이야기를 끝까지 참고 들어 줄 자신이 없었다.
술잔에 반쯤 남아 있던 화주를 마저 들이켠 담서인이 어둠이 깃들어 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후두둑.
아까부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담서인이 말없이 술잔만 비우고 있는 철무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게 끝인가요?”
아까부터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던 찝찝함의 이유를 간신히 찾았다.
“이번 일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구나.”
철무경은 담서인이 가진 불만을 단숨에 눈치챈 것 같았다.
강호소사전담반에 합류할 때만 해도 협객을 꿈꿨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척척 해결해 주고, 그릇된 것들을 바로잡아 올바른 방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협객.
그러나 지금은 잘 모르겠다.
이게 과연 협객의 삶인지조차.
그 마음을 읽었을까?
철무경이 빈 잔에 술을 채워 주며 입을 뗐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점차 바뀌어 나가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건 너무 작은 일이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던 담서인은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대형의 말이 옳았다.
강호소사전담반의 설립 취지가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뭔가 미진함을 느낀 이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들의 의미는 뭐죠?”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인하고 싶었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으려면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술잔을 손에 쥔 채 잠시 망설이던 철무경이 이윽고 대답했다.
“씨를 뿌리는 거지.”
‘씨를 뿌린다?’
무척이나 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철무경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희망이라는 씨앗이지.”
“쩝!”
담서인이 입맛을 다셨다.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딱히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 말을 꺼내는 철무경의 태도였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에 깃든 것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
그런 철무경의 신념이 담서인에게 작게나마 위로가 되어 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형이라면…….’

믿을 만한 사람.
아니, 믿어도 되는 사람.

담서인에게 있어 철무경은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헛된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확신은 생겼으니까.
‘하긴 오합지졸에 불과한 우리가 큰일에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적살검 우동균 같은 일류 고수도 막 죽어 나가는 곳이 진짜 강호인데.’
담서인이 작은 탁자 앞에 모여 앉아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늘 뜬구름 잡는 것처럼 모호한 말만 늘어놓는 대형 철무경.
곱게 늙어 가는 얼굴 하나만 믿고 술과 여자를 밝히는 임추량.
좋았던 시절의 추억만 곱씹으며 쓸쓸히 늙어 가는 염노.
동료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여 있긴 했지만, 사실 그리 믿음은 가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들은…… 선혈이 난자한 강호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라는.
대형이 채워 준 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던 담서인의 생각이 비로소 패천호혈장에 미쳤다.
적살검 우동균이 운 좋게 얻은 비급.
그러나 그가 죽었으니 이젠 패천호혈장의 주인도 바뀌었으리라.
“그런데 죽은 우동균이 갖고 있던 패천호혈장은 진짜였나요?”
“진짜였다.”
확신에 찬 철무경의 대답을 듣자 더 아쉬웠다.
패천호혈장의 비급을 얻는다면 일류 무인으로 올라서는 것은 한순간이었을 텐데.
“누가 얻었을까요?”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던진 담서인의 질문에 철무경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단 한 점의 욕심도 깃들지 않은 담담한 시선으로 철무경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누군가는 얻었겠지.”
“아깝지도 않아요?”
“전혀.”
“진짜 속도 좋아.”
“보물은 원래 임자가 있는 법이다.”
“속 편해서 좋겠네요.”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당연하죠. 나도 이제 절반은 강호인인데.”
“그럼 몇 수 가르쳐 줄까?”
“뭘 가르쳐 줄 건데요? 고금제일무공?”
“원한다면.”
“됐네요.”
담서인이 잘라 말했다.
기껏해야 삼류 무인인 대형이 고금제일무공을 알 리가 없었다.
당연히 삼류 무인인 대형에게서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고작 삼류 무인 주제에 욕심이 없어, 욕심이. 이러니 이런 변두리에서 허접한 일만 맡고 있지.”
담서인이 쏘아붙이며 투덜거렸지만, 철무경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 또한 씨앗이 되겠지.”
아까부터 그놈의 씨앗 타령은.
그럴 거면 차라리 농부가 될 것이지.
담서인이 철무경에게로 향해 있던 시선을 황급히 뗐다.
그리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제발 그렇게 웃지 말라고.
그렇게 웃을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