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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17화)
6장 녹슨 낫(4)
쏟아지는 한여름의 뙤약빛은 강렬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무더웠다.
하지만 그늘 한 점 찾기 힘든 밭에서 아버지는 묵묵히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불평 한마디 늘어놓지 않은 채.
“잠시 쉬었다가 할까?”
곡괭이질을 멈춘 아버지가 허리를 펴고는 굵은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소매로 닦아 내며 운을 뗐다.
수풀이 우거진 덕분에 작은 그늘이 만들어진 밭의 언저리.
그곳에서 털썩 주저앉은 아버지의 곁에 다가간 호풍도 주저앉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온, 이제는 미지근하게 변해 버린 물로 마른 목을 축이고 있을 때, 아버지가 넌지시 물었다.
“어때? 글공부가 재밌어, 농사일이 재밌어?”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살핀 호풍이 희미하게 웃었다.
벌써 반년 전에 벌어진 일.
하지만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우선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달라졌다.
아직 어린 호풍이었지만 눈치는 있었다.
서로를 미워하고 밀어내기 급급했던 부모님의 관계가 다시 돈독해졌다.
물론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했지만, 이제는 다시 예전의 금슬 좋은 부부로 거의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호풍의 일과도 바뀌었다.
오전에는 서당에 나가서 글공부를 했고, 오후에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흘렀다.
그 이유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경험해 본 후에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하자는 부모님의 합의 때문이었다.
“농사일이 더 재밌어요.”
초조한 기색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반색했다.
“역시 그렇지?”
만면에 웃음이 번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호풍이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질문을 던진 건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어머니의 앞에서는 다른 대답을 꺼내 놓았다.
글공부가 더 재미있다고.
그때, 어머니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번졌던 것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직 어머니한테는 말씀하시지 마세요.”
“응? 왜 그러느냐?”
“아직 제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았잖아요. 그전에는 어머니가 실망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 들어 보니 네 말이 맞구나.”
“그럼 그렇게 해 주실 거죠?”
“녀석, 네 애비도 사내다. 그리 입이 싸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걱정 따윈 붙들어 매라는 듯 장담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호풍이 슬쩍 시선을 외면했다.
‘효도라는 거, 별로 어렵지 않네.’
기뻐하는 아버지를 보자 호풍의 기분도 좋아졌다.
자신이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아직 반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자신의 작은 거짓말로 인해 서로 기뻐할 터였다.
“넌 좀 더 쉬거라. 애비 먼저 일을 시작할 테니까.”
무거운 곡괭이를 든 채 다시 뙤약볕이 쏟아지는 밭으로 나서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
어느새 굵은 땀방울이 매달려 있는 이마.
곡괭이질을 할 때마다 상의를 벗은 아버지의 팔에서는 투박한 근육이 꿈틀댔다.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보기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자신이 꿈꾸는 모습은 아니라는 사실을.
호풍의 시선이 아련하게 변하며 그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피가 튀고, 살점이 뜯겨져 나가고, 마치 거짓말인 양 쉽게 죽어 나가던 사람들을 처음 본 순간 몸서리쳐질 정도로 무서웠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공포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저씨가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해 준 순간, 거짓말처럼 온몸으로 퍼져 나가던 떨림이 멈추었다.
“강호가 어떤 곳이냐고 물었지? 저게 바로 강호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인 만큼 욕심이 판치는 곳.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의 목숨 따위는 가볍게 여기는 곳. 그리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곳. 하지만 저게 강호의 전부는 아니다.”
“……?”
“또 다른 강호는 의와 협이 살아 있는 곳이지.”
이름조차 모르는 아저씨는 그렇게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듣는 순간, 강호라는 곳에 동경을 품었다.
그리고 점점 멀어지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호풍의 눈에 각인처럼 틀어박혔다.
‘저 사람처럼 될 거야!’
그 순간에 다짐했다.
그렇게 소년은 꿈을 품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룰 방법을 호풍은 이미 알고 있었다.
숨을 쉬는 방법과 손과 발을 놀리는 방법.
패천호혈장!
아저씨는 그 방법의 이름을 일러 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 이름을 기억 속에서 지우라고 했다.
그래서 호풍은 그리하기로 했다.
대신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언젠가, 언젠가…….
비정하기 그지없는 강호에서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겨서 강호에 출도할 때에.
7장 빚이 좀 있거든(1)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그 바람에 실려서 먹잇감을 앞에 두고 포효하는 호랑이의 형태를 갖춘 구름이 빠르게 흘러갔다.
정파무림의 구심점이자 무림맹을 이끌고 있는 검선 독고진이 고개를 들어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팔자 좋군!”
그때, 누군가 흥을 깼다.
비꼬듯이 흘러나온 한마디를 듣고서 독고진은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대신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형편없는 몰골을 살폈다.
원래 눈처럼 하얀 장삼은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자상에서 새어 나온 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적의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고 왼쪽 어깨와 허벅지에는 원래 주인이 누군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두 자루의 검이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인 상처였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시커멓게 물든 왼손은 중독의 증거였다.
무형지독!
무공이 입신지경에 이르렀다고 알려진 독고진이 해독에 실패하고, 왼손에 독기를 간신히 밀어 넣어 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극독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독고진의 표정은 편안했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명색이 무림맹주인데 울 수는 없잖은가?”
담담하게 입을 뗀 독고진이 마주 선 사내와 시선을 마주쳤다.
현 마교의 교주인 천마 구효서!
악마의 현신이라 불리며 강호인들에게 공포와 경외의 대상인 그가 뒷짐을 진 채 미간을 찌푸렸다.
“오만하군.”
“그럼 어찌할까? 무릎이라도 꿇고 살려 달라고 빌까?”
“나쁘지 않군.”
“그럼 살려 줄 텐가?”
독고진이 빙긋 웃으며 질문을 던졌지만, 구효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불가!”
“소문보다 통이 작군!”
“원래 소문이란 부풀려지는 법이지.”
“그 소문이 맞기를 바랐는데…….”
독고진은 감정의 변화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며 다시 물었다.
“왜지?”
“그저 기분에 취해서 살려 보내 주기에 자네는 너무 무서운 자야.”
“그거 칭찬인가?”
“물론 칭찬이지.”
“다른 사람도 아닌 천마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군.”
심각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독고진이 껄껄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효서가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맑은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투명한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마의 독문 병기답게 마혈검에서는 요사스런 기운이 흘러나왔다.
“기분 나빠.”
“뭐가 말인가?”
“그 웃음.”
“이젠 웃지도 말란 말인가?”
“아니. 두 번 다시 웃지 못하게 만들어 주지.”
구효서가 살기를 끌어 올리며 협박했다.
하지만 그 협박은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독고진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웃음은 오히려 짙어졌다.
“날 죽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나 보군.”
“…….”
“난 안 죽어. 아니, 못 죽어!”
독고진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허세!
그래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바라보던 구효서가 진중하게 충고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된 것 같으니 다시 설명해 주지. 너희 정파 놈들이 자랑하던 멸마대는 전멸했고, 파사대 역시 지금쯤 우리 애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서 숨이 붙어 있는 놈이 거의 없을 거야. 아, 혹시 자네의 호위를 담당하던 수신위 놈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나을 거야. 그놈들은 벌써 한참 전에 저세상으로 갔거든. 다시 말해서 지금 자네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올 충성스런 수하들은 남아 있지 않다는 얘기지.”
“역시 철저하게 준비했군.”
“상대가 자네니까. 자네만 죽이면 마도천하를 이루는 것은 시간문제인데, 어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겠나?”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구효서가 덧붙였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독고진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왜 웃지?”
“어차피 그놈들에게는 기대도 안 했네. 녹봉만 많이 받아 처먹고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놈들이었거든.”
“……?”
“날 구하러 올 놈은 딴 놈이야.”
“흥, 허세는 그쯤 부리지. 더 하면 추해 보여.”
“허세가 아니야. 진짜 한 놈이 올 거야.”
구효서의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깊어짐과 동시에 독고진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웃음도 깊어졌다.
그 순간, 독고진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빚이 좀 있거든.”
빚이 있다니?
천마 구효서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독고진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처음에는 허세라고 여겼는데, 단순히 허세를 부린다고 판단하고 넘기기에는 어딘가 찝찝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기대하지 말게. 대체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몰라도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로 담이 큰 사채업자는 없을 테니까.”
“사채업자라…….”
“빚이 있다면서?”
“하여간 무식한 마교 놈들과는 대화가 안 통하는군.”
“지금 뭐라고 했나?”
“뭔가 크게 착각을 하고 있는가 본데, 빚을 진 것은 내가 아니야. 그 친구가 내게 빚을 졌지.”
독고진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 말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구효서가 인상을 쓸 때, 독고진이 설명하듯 덧붙였다.
“왜? 빚이라고 하니 그저 돈하고 사채업자밖에 생각나는 게 없나 보지? 하긴 수틀리면 칼질부터 해대고, 잔대가리 굴려 가면서 음모를 꾸미는 데만 혈안이 된 마교 놈들이 마음의 빚이라는 게 뭔지 알기나 할까?”
“빨리 죽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군.”
“거참, 진짜 말이 안 통하는군. 아까도 말했지 않나, 난 여기서 안 죽는다고. 아니, 못 죽는다고.”
“무슨 개소리를…….”
구효서가 더 참지 못하고 마혈검에 막 진기를 주입할 때, 독고진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 마침 저기 오는군.”
구효서의 등 뒤로 독고진의 시선이 향했다.
하지만 구효서는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