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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19화)
7장 빚이 좀 있거든(3)
흠칫.
술을 따르던 제갈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 목소리는…… 설마?’
천천히 고개를 돌린 제갈후의 두 눈이 흡사 귀신을 마주한 것마냥 커졌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하게 빗어 넘긴 반백의 머리와 눈가의 주름,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이 낯익었다.
평소에 즐겨 입던 백의가 아니라 말라붙은 피로 인해 적의로 변한 의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일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맹주…… 님?”
놀란 제갈후가 한참 만에 간신히 입을 떼자, 독고진이 빙긋 웃었다.
“그새 벌써 날 잊었나?”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긴 중원제일의 지자라 불리는 자네가 그럴 리가 없지.”
“그런데 어떻게……?”
“왜? 내가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 궁금한가?”
“…….”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가 아닐세.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지.”
잔뜩 힘이 실린 독고진의 이야기를 듣던 제갈후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혈혈단신의 독고진이 대체 무슨 수로 마교의 천라지망을 뚫고 살아 돌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숨이 붙은 채로 이 자리에 돌아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볼 만하겠군!’
제갈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독고진이 죽은 것으로 알고 그 공석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물어뜯으면서 싸우고 있는 장로들.
그런 그들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 독고진을 마주하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도 궁금했다.
그러나 제갈후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는 이내 사라졌다.
독고진이 살아 돌아옴으로써 내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봉합이 될 터였다.
하지만 외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제갈후가 근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독고진을 살폈다.
‘시커멓게 변색된 왼손은 극독에 중독됐다는 증거. 밀랍인형처럼 창백한 얼굴은 내상을 입었기 때문일 것이고, 눈에 보이는 외상도 절대 가볍지 않아. 최소한 몇 달은 요양해야 되겠군.’
제갈후가 한숨을 토해 냈다.
멸마대와 파사대, 그리고 호천단까지.
무림맹의 정예라 할 수 있는 무력 집단들이 괴멸된 상황이었다.
‘이런 판국에 마교 놈들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아니, 마교 놈들은 당연히 정마대전을 벌이겠지. 이렇게 좋은 기회를 흘려보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제갈후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때, 속 편하게 술병을 들어서 들이켠 독고진이 씨익 웃으며 입을 뗐다.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 맞춰 볼까?”
“……?”
“마교 놈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준동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겠지.”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멸마대와 파사대, 호천단이 괴멸 직전까지 간 것은 알고 있네. 아까운 죽음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빈 잔은 다시 채우면 되는 것일세.”
빈 잔을 다시 채우자는 독고진의 말에 담긴 속뜻은 무림맹의 무력 집단들을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리하는 것이 맞았지만, 거기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시간이었다.
‘과연 마교가 그때까지 기다려 줄까?’
간악한 마교 놈들이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할 때, 독고진이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덧붙였다.
“마교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걸세.”
“하지만…….”
“그건 내가 장담하지.”
독고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제갈후는 무림맹의 책사로서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독고진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갈후가 품고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일러 주지는 않았다.
* * *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그래서 더 무서운 사람.”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앞에 둔 채 제갈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 벌써 오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당시 독고진이 했던 말은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
분명히 다시는 찾아올 수 없는 기회임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마교는 거짓말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예상 밖의 사태를 접한 제갈후도 은밀히 그 이유를 파악해 보았다.
내분이 발생해서 자중지란에 빠졌다는 설에서부터 마교주인 구효서가 갑자기 미쳤다는 낭설까지.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지만 그다지 신뢰가 가는 정보는 없었다.
그나마 구효서가 폐관수련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가장 신뢰성이 있어 보였지만, 이 역시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그 시기에 폐관수련에 들어간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좀 더 정확하고 그럴듯한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지만, 제갈후가 동원한 정보력으로서는 그게 한계였다.
그리고 제갈후는 곧 그 작업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 내부의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이장로와 오장로가 축출됐지.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 붙어 세력 다툼을 벌이던 나머지 장로들도 모조리 좌천되거나 자리를 지키는 데 실패했고.’
죽었다 살아난 독고진의 행보는 빨랐다.
예정된 수순이기는 했지만, 대비할 틈도 주지 않았다.
반대 의견은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밀어붙였다.
‘장로들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끝나자 다음으로 멸마대와 파사대, 호천단을 재편했지. 결국 뜻대로 무림맹을 완벽히 장악했군.’
사실 독고진은 예전부터 불만을 품었다.
제갈후와 독대를 하며 술을 마실 때마다 늘 자신의 입김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무림맹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제갈후도 어떤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권이 개입되며 이전투구의 장으로 바뀐 무림맹을 개혁하는 것은 요원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 사건 후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권한이 대폭 축소된 장로들은 허수아비가 되었다.
그리고 장로들의 면면도 이름 있는 명문세가의 인물은 배제되었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단체들의 인물들로 채워졌다.
게다가 무림맹의 주축 세력인 멸마대와 파사대, 호천단의 수장도 맹주가 지명한 사람들로 바뀌었다.
후르릅.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제갈후는 입속에 퍼지는 담백한 차향을 음미하며 독고진을 떠올렸다.
‘정녕 무서운 사람!’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늘 입가에 매달고 있는 독고진의 첫인상은 시골 촌부와 다름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웃음에 속아 넘어갔지만, 제갈후는 아니었다.
―웃는 얼굴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심의 소유자.
그게 바로 독고진의 진면목이었다.
그리고 오 년 전에 있던 그 일이 바로 맹주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은 결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제갈후가 다시 찻잔을 들어 말라 버린 목을 축이기 위해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맹주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제갈후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맹주전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눈살을 찌푸렸다.
독고진의 진면목을 알게 된 탓일까.
그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진 제갈후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제갈후가 맹주전으로 들어갔을 때, 독고진의 얼굴을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독고진은 보름 만에 얼굴을 마주함에도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내 딸을 어찌 생각하나?”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제갈후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솔직히 말해 주면 되네.”
“맹주님의 하나밖에 없는 여식이지요.”
“무슨 뜻이지?”
“자식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부모입니다. 제가 맹주님께 드릴 수 있는 대답은 아주 객관적인 평가뿐입니다. 그 객관적인 평가라도 듣고 싶으신 겁니까?”
“말해 보게.”
“천하절색에 안하무인처럼 굴지만 속내는 무척 여리고 약한 편이지요. 그 약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겉으로는 센 척하는 거라 짐작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맹주님을 아주 싫어합니다.”
독고진도 이미 알고 있을 사실들이었다.
그러나 남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듣고 나니 기분이 상한 듯 독고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래, 자네 말대로 날 싫어하지. 난 그게 잘 이해가 가지 않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단 말인가.”
맹주님은 앞만 보고 달려오셨지요.
가끔씩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셨으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겠지요.
부인의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보았다면, 아니, 부인의 얼굴이라도 가끔씩 마주했다면 안색이 나빠졌다는 것을 진즉에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부인을 그렇게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리고 따님도 맹주님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을 텐데.
잠시 고민한 것뿐인데도 맹주가 던진 질문에 대한 정답들이 풍어철에 어망에 걸린 고기들처럼 줄줄 끌려 올라왔다.
그러나 제갈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늘이 내린 천재라 불리는 제갈후였지만, 남의 집 가정사에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아주 위험한 짓이었으니까.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조차 모르는. 그 녀석에게 지금 누리는 혜택들을 주기 위해서 이 애비가 얼마나 애를 썼는가는 전혀 모른다니까.”
독고진이 한탄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제갈후는 맞장구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