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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21화)
8장 예쁘냐?(2)


찝찝한 기분으로 용선 고서점으로 들어서자마자 아침부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염노와 임추량이 보였다.
“우리 마누라, 왔어?”
벌써 꽤 취한 염노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누라는 누가 마누라예요? 그리고 아침부터 또 술 타령이에요?”
“비 오잖아.”
“날이 너무 좋아서 마시고, 석양이 좋아서 마시고, 비가 와서 마시고…… 핑계 삼아 일 년 내내 술이네, 술.”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래.”
“무슨 생각요? 비 오던 날 강호를 구했나 보죠?”
“우리 마누라는 눈치도 빨라. 그래서 말인데…….”
“또 뭐예요?”
“돈 좀 있어?”
“돈요?”
“술이 다 떨어져서.”
“월봉 받은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그게 얼마나 된다고. 이 녀석이라도 팔아서 돈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아무도 살 생각을 안 하더라고.”
저 지저분한 고양이를 누가 돈을 주고 살까?
하품을 하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던 담서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확 옮겨 버릴걸!’
추억을 안주 삼아 술만 퍼 마시는 염노와 임추량이 걱정되어 강호소사전담반을 떠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더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집어서 바닥에 던진 담서인이 용선 고서점의 구석에 위치한 대형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부터 웬일이냐?”
철무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상에 기대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냥요.”
“그냥?”
“그냥 하나 궁금한 게 있어서요.”
“나한테?”
“그러니까 찾아왔죠.”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철무경을 마주하고 나자 자꾸 말이 삐딱하게 나왔다.
“말해 봐.”
담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덮고 시선을 던지는 철무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불여시가 대체 왜 대형을 좋아하는 거지?’
사실 철무경이 잘생기긴 했다.
굳이 비교해 임추량이 얼굴이 곱상한 꽃미남이라면, 철무경은 얼굴선이 굵고 강한 남자다운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백묘령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부족했다.
이 세상에 미남은 차고 넘쳤으니까.
그래서 곰곰이 고민에 잠긴 담서인은 곧 철무경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했다.
특유의 분위기.
책에서 금방 튀어나온 성현처럼 입바른 소리만 해대는 철무경에게는 특유의 분위기가 존재했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라 아직 세상에 때가 덜 묻은 순진한 백묘령은 그 분위기에 반한 것이 틀림없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아니요.”
“그런데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지?”
“신기하게 생겨서요.”
“어디가?”
“그러니까…… 콧구멍요.”
“사람의 콧구멍은 대부분 비슷하게 생겼는데 거기서 신기함을 발견하다니, 눈썰미가 매우 뛰어나군.”
적당히 좀 넘어가 주면 될 텐데.
철무경은 매사에 너무 진지하게 대해 피곤했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아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콧구멍에 관한 이야기였나?”
“그럴 리가요.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러니까, 대형은 여자 안 만나요?”
“여자?”
“그 나이쯤 되면 여자랑 사랑을 하고 혼인해서 자식도 낳고 사는 게 정상이잖아요.”
“날 좋아해 주는 여자가 없다.”
“있어요.”
“있다고?”
그것도 두 사람이나.
버럭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철무경을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됐다.
그는 아직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조차도 모르니까.
게다가 우린 동료니까.
담서인이 짤막한 한숨을 토해 냈다.
이런저런 핑계를 갖다 붙이긴 했지만, 말 그대로 핑계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는 철무경을 좋아하는 마음을 솔직히 드러냈다가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 좋아해요? 돈 많은 여자? 아니면 예쁜 여자? 똑똑한 여자?”
“돈 많고 예쁘고 똑똑하기까지 하면 더 좋지.”
“헐, 지금까지 입바른 소리만 하더니, 알고 보니 속물이었네.”
“속물이 아니라 솔직한 거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담서인이 입맛을 쩝 다셨다.
철무경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나자 자신과의 거리가 한층 더 멀어진 것 같았다.
“좋겠네요.”
“뭐가?”
“대형을 좋아하는 여자가 돈도 많고, 얼굴도 예쁘고, 똑똑하기까지 하거든요. 곱게 커서 세상 물정을 모르긴 하지만.”
“그거야말로 신기하군. 그런 여자가 대체 왜 날 좋아하는 거지?”
“나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한 번 만나 볼래요?”
“아니!”
철무경은 딱 잘라 말했다.
이로써 백묘령에게 만남을 주선하고 받기로 한 사례금이 단번에 날아갔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들뜬 마음을 억지로 감춘 채 담서인이 이유를 물었다.
“돈 많고 예쁘고 똑똑한 여자가 좋다면서요?”
“그렇긴 하지.”
“그런데 왜 안 만나겠다는 거예요?”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있거든.”
씩 웃으며 입을 연 철무경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담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지금 철무경이 자신에게 고백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정말이에요?”
“그래.”
“늘 이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연애를 할 시간이 없었잖아요?”
“몰래 나갔지.”
“헐! 어떤 여자인데요? 돈 많고, 얼굴 예쁘고, 마음도 착한 여자?”
“아니.”
“그럼요?”
“돈을 많이 밝히고, 얼굴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 정도이고, 겉으로는 드센 성격이지만 속은 아주 여린 여자지.”
이건 꼭 나잖아.
하마터면 버럭 소리칠 뻔한 것을 꾹 눌러 참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과 많이 달랐다.
돈을 밝히긴 했지만 많이 밝히는 편은 아니었고, 얼굴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 정도가 아니라 꽤 예쁜 편이었고, 겉으로는 드세고 속이 여린 게 아니라 겉과 속이 모두 여린 여자였으니까.
어쨌든 철무경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여자가 부러웠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철무경으로 인해 서러워졌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흘러나올 것 같은 눈물을 이를 악물고 참은 채 담서인이 따지듯이 물었다.
“난 어때요?”

딸랑.
용선 고서점의 문에 달려 있던 종이 흔들렸다.
상념에서 깨어나 퍼뜩 고개를 돌리자 젊은 여자가 용선 고서점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쭈뼛거리며 걸어 들어오고 있는 여자는 가뭄에 콩 나듯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귀하디귀한 손님을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담서인이 벌떡 일어나 날 듯이 앞으로 달려갔다.
“어떤 책을 찾으세요?”
“그게…….”
“딱 봐도 지적으로 생기셨으니까 사서삼경? 아니면 도덕경?”
“그런 게 아니라…….”
“아, 제가 나비가 꽃들 위를 거닐 듯 사뿐거리는 가벼운 발걸음을 보고도 강호의 여협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어떤 무공 서적을 원하세요? 정파? 사파? 마교? 원하시는 걸 말씀만 하세요. 명문정파인 화산파의 비전 절기인 매화검법의 필사본도 있고, 마교의 교주만 익힌다는 천마호심공의 필사본도 있답니다. 앞에 적힌 문구 보셨죠? 이건 비밀인데…… 고금제일고수들의 무공 비급들도 널려 있답니다.”
“정말 그런 비급들이 다 있나요?”
“그럼요!”
‘정직하게 살자’가 가훈인데…….
혀에 기름을 칠한 것처럼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담서인은 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이해해 줄 거라 여기며 담서인이 덧붙였다.
“자, 말씀만 하세요. 마교나 사파의 무공은 좀 꺼림칙하니, 역시 명문정파의 무공이 좋을 것 같죠?”
“제가 찾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이 정도로 얘기했는데도 여자는 계속 쭈뼛거렸다.
그리고 눈치 빠른 담서인은 재빨리 영업 전략을 바꾸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이 정도로 쭈뼛거리는 것을 봐서 이 여자가 찾는 것은 춘서가 틀림없었다.
“취향이 어떤 쪽이세요?”
“네?”
“정숙한 편인가요, 아니면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걸 좋아하시나요?”
“정숙한 편이긴 한데…….”
“그럼 춘서의 고전이라 불리는 소녀경을 추천드려야겠군요. 소녀경이 고전이라고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답니다. 사람이 사랑을 하면서 만들 수 있는 수많은 체위들이 아주 상세한 삽화와 함께 망라되어 있으니까요. 직접 보세요.”
한때는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리며 시를 읊조리던 요조숙녀였을 때가 있었는데.
시를 읊조리던 고결한 입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음담패설이 흘러나오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개탄스러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면 땅을 치시겠지.
담서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에이,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쑥스러워하실 것 없어요. 두 눈에 힘 잔뜩 주고 여기 그려진 체위를 보세요. 혹시 해 보신 적 있으세요?”
“아, 아뇨.”
“저도 못해 봤는데, 원하신다면 전문가를 불러서 여러 가지 체위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해 드릴 수 있답니다.”
술독에 파묻혀 있을 임추량을 떠올리며 재빨리 덧붙이자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인 여자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진짜 전문가인데…….”
“실은 여기가 강호소사전담반의 근거지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뭐야? 의뢰였어?’
누군가 직접 찾아와 강호소사전담반에 의뢰를 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묘했다.
야근을 밥 먹 듯이 하며 강호소사전담반을 홍보하고 깔끔하게 의뢰를 처리해 왔던 것이 마침내 빛을 발해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
“다행이네요.”
“어떤 의뢰든지 해결해 드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편히 말씀하세요.”
“정말인가요?”
“그럼요.”
지난번 의뢰인이었던 최종길 못지않게 이 여자도 의심이 많은 편이었다.
담서인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여자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혼자 일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제가 실세이긴 하지만 저를 제외하고도 한때 강호를 주름잡았던 명망 높으신 고수 세 분이 함께 일하고 있답니다.”
“그래요? 그런데 그분들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어딨기는.
아침부터 술을 퍼 마시더니 지금은 어딘가에 처박혀서 잠을 퍼 자고 있겠지.
하지만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추억을 안주 삼아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는 임추량과 염노를 직접 본다면 강호소사전담반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추락할 테니까.
“요즘 의뢰가 워낙 밀려들어서 지금도 해결하기 위해서 밖에 나가 계세요.”
자꾸 죄책감이 든다.
아무래도 ‘정직하게 살자’는 가훈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그건 차후의 문제였다.
지금 가장 급한 것은 제 발로 걸어온 의뢰인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어떤 고민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