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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22화)
8장 예쁘냐?(3)
“자, 의뢰가 들어왔어요!”
임추량과 염노를 깨운 담서인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아직 술이 덜 깬 탓일까?
눈곱이 낀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라보던 임추량이 다짜고짜 불평을 늘어놓았다.
“요즘 일이 너무 많은 거 아냐?”
“술값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건 그렇지.”
“일을 해야 돈이 생기고, 그래야 또 술을 마실 수 있는 거라고요.”
다섯 살 먹은 꼬맹이도 알 법한 사실을 이렇게 다정하게 설명해 줘야 하니 입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지저분한 고양이를 쓰다듬던 염노가 끼어들어서 불만을 토해 냈다.
“마누라, 늙은이는 배려해 줘야지.”
“누구요? 술 먹을 때마다 힘이 넘치는 늙은이요? 슬슬 안주도 떨어졌잖아요. 자꾸 일을 해야 추억이 생기고, 그래야 새로운 추억을 안주 삼아 계속 술을 마시죠.”
“그런가?”
“그럼요. 오래 사셔야죠. 일하는 노년이 더 건강하다는 얘기, 못 들어 봤어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염노의 노년 생활과 건강까지 걱정해 줘야 하니 피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쨌든 임추량과 염노를 간신히 구워삶아서 대형인 철무경의 앞으로 데려가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어떤 의뢰지?”
대뜸 질문을 던지는 철무경에게 설명하기 전에 일단 밑밥부터 깔았다.
“불가라는 말, 안 한다는 약속부터 해요.”
“먼저 들어봐야지.”
“안 돼요. 이번엔 무조건 해야 해요.”
“왜지?”
“의뢰비를 후하게 받았거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자신을 돈만 밝히는 속물처럼 바라보았다.
물론 돈을 밝히는 게 사실이긴 했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이게 어디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한 것인가.
다 같이 잘 먹고살기 위함인데.
“흑오방, 알죠?”
“알지. 까만 지네 새끼들이 모여 만든 단체잖아. 뒷골목 파락호들이 모여 있는 곳 중에서도 아주 독한 편이야.”
담서인이 슬쩍 운을 떼자 임추량이 바로 대답을 꺼내 놓았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전에 그놈들이 뒷배를 봐주는 기루에서 돈 없이 술 먹은 적이 있거든. 술값 받아 내려고 아주 끈질기게 찾아오더라고.”
“갚았어요?”
“갚았지.”
“돈이 어디서 나서요?”
“몸으로 때웠지. 여기 상처 보이지? 이게 그때 그 놈들에게 칼침 맞아서 생긴 상처라니까.”
임추량이 상의를 훌렁 벗고 왼쪽 어깨에 남아 있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흉터를 보여 주었다.
“어디 가서 그렇게 옷 훌렁훌렁 벗지 마요.”
“왜?”
“똥배가 흉하니까.”
“이거 똥배가 아니라 근육이야. 만져 봐. 딱딱하다니까.”
“숙변이 뭉쳐서 단단한 거겠죠.”
분한 듯 콧김을 씩씩 내뿜고 있는 임추량에게 담서인이 냉정하게 충고했다.
“그 상처, 어디 가서 떠벌리지도 말아요. 파락호들도 감당하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소문나면 누가 우릴 믿고 찾아오겠어요?”
“벌써 기녀들에게 실컷 떠벌렸는데.”
“뭐요?”
“큭큭, 걱정하지 마. 흑오방의 파락호들이랑 싸우다 입은 상처가 아니라, 무림맹주인 검선 독고진과 싸우다 생긴 상처라고 말했으니까.”
“헐, 누가 그 말을 믿어요?”
“안 믿으면 말고. 근데 갑자기 흑오방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무인도 아닌 파락호들까지 상대하는 건 원칙에 어긋나잖아?”
임추량과 이야기하다 보면 항상 샛길로 빠져 버린다.
가까스로 다시 흑오방과 연루된 본론으로 돌아온 담서인이 걱정을 덜어 주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강호인과 연루가 되어 있으니까. 간략하게 설명할게요. 일단 의뢰인은 백서연이라는 여자이고, 남동생과 관련된 일로 의뢰를 했어요.”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염노가 질문을 던졌다.
“예쁘냐?”
9장 인간 말종(1)
하여간 남자란 족속은.
나이가 드나 젊으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의뢰는 분명히 남동생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염노는 의뢰인인 백서연이 예쁘냐는 질문부터 대뜸 던졌다.
“별로 안 예뻐요.”
“그래?”
“그런데 그걸 염노가 알아서 대체 뭐하게요?”
“딱히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제발 부탁인데 이제 나잇값 좀 하세요. 어쨌든 백서연의 남동생인 백무건이 얼마 전에 흑오방으로 들어갔답니다. 백서연의 말로는 아주 착한 아이였는데, 나쁜 친구의 꼬임에 빠져 흑오방에 가입한 것 같답니다.”
“그거 틀렸어.”
“뭐가요?”
“세상에 나쁜 친구란 없거든. 어떤 식으로든 백무건이란 놈이 변했기 때문에 엇비슷한 사람들이 주위에 모이는 거뿐이야.”
지저분한 고양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염노가 던진 말을 듣고서 담서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그런가요?”
“확실해.”
“그럼 내가 형편없이 변한 거로군요. 내 주변에 염노와 추량 선배가 있으니까.”
“좋게 생각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퍽이나 위로가 되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며 감상에 빠져들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담서인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우리가 할 일은 백무건을 구해 내는 거예요.”
“흑오방에서 빼내라는 거야? 제 발로 들어간 놈을 무슨 수로 빼내?”
“추량 선배 말대로 제 발로 좋다고 걸어서 들어간 사람을 흑오방에서 빼낼 수는 없어요. 그러니 제발 부탁인데, 내가 하는 말 좀 제대로 들어요. 우리가 할 일은 백무건을 빼내는 게 아니라 구하는 거니까요.”
“누가 그놈을 죽이려는 건가?”
“그래요. 흑오방의 방주인 벽구패가 요즘 좀 잘 나가더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서 천하문에 시비를 걸었어요. 천하문주인 천금산이 가만있을 리가 없죠. 며칠 안에 천하문과 흑오방이 제대로 붙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요.”
담서인이 설명을 마치자 임추량이 흥미를 드러냈다.
“벽구패라는 놈, 그날 술 먹고 정신줄 놓았나 보네. 감히 천하문에 시비를 걸 생각을 다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거라니까요.”
“요즘 말로 용자네, 용자.”
“어쨌든 중요한 건 벽구패가 용자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백무건을 그전에 구해 내야 한다는 거예요.”
흑오방과 천하문.
굳이 비교를 하자면 달빛과 반딧불의 차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흑오방은 뒷골목에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던 파락호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반면, 천하문은 진짜배기 무인들이 모여 만든 단체였으니까.
실제로 천하문의 문주인 천금산은 일류 고수였고, 그가 키운 제자들 가운데에는 이류 고수들도 꽤 많았다.
“뭐, 해결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천하문과 흑오방이 붙기 전에 백무건을 어떻게든 빼내기만 하면 되니까요.”
말 그대로 간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담서인이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자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철무경이 처음으로 말했다.
“불가라고 외치고 싶지만 그럼 혼이 날 것 같고, 아무래도 이번에도 무척 골치 아픈 의뢰를 떠맡은 것 같군.”
“거짓말이네.”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염노가 던진 말을 듣자마자 담서인이 맞장구를 쳤다.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요. 아니, 이것보다 간단한 의뢰가 어딨어요? 애타게 누나가 기다리고 있으니 흑오방에서 그만 빠져나오라고 설득만 하면 되는데.”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 입을 쭉 내밀고 있을 때였다.
“그게 아니라 마누라가 거짓말을 했다고.”
“내가 뭘요?”
“꽤 예쁘잖아.”
염노가 시선을 던지는 방향을 따라가자 포목점에 다소곳이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백서연이 보였다.
사실 백서연이 꽤 예쁜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결정적인 흠이 하나 존재했다.
바로 왼쪽 뺨에 남아 있는 길쭉한 흉터였다.
아마 노안이 찾아온 염노는 그 흉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리라.
“내가 십 년만 젊었으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주책을 떨고 있는 염노를 흘겨보던 담서인이 잘라 말했다.
“그래도 달라질 건 전혀 없을 것 같은데요.”
양심도 없는 늙은이!
십 년 더 젊었다고 해도 오십 줄이었다.
그런데 아직 스물도 안 된 백서연과 어떻게 해 보려려는 건 양심의 문제를 넘어서서 범죄에 가까웠다.
“분명히 달라졌을 거야.”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건데요?”
“마누라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에는 운명의 끈이 연결되어 있거든.”
정말 귀를 틀어막아 버리고 싶다.
내가 예전에 얼마나 대단했는가로 시작하는 이야기와 함께 염노의 단골 이야기인 운명 타령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방법이 하나뿐이었다.
얼른 화제를 돌려야 했다.
“저 여자가 제대로 보이긴 해요?”
“당연히 보이지.”
염노와 백서연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의심쩍은 시선을 던지며 담서인이 물었다.
“얼굴이 어떤데요?”
“예쁘지.”
“그거 말고는 없어요?”
“왼쪽 뺨에 희미한 검상이 남아 있는 게 유일한 흠이지.”
“어라?”
“왜?”
“전에 노안이 찾아왔다고 했잖아요?”
“내가 그랬나?”
“그래서 지금과 비슷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던 적살검 우동균의 얼굴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놈은 남자였기 때문이지.”
“……?”
“미인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헛소리를 늘어놓던 염노가 고양이의 목을 쓰다듬으며 두 눈을 반개했다.
마치 오래전 추억을 더듬 듯이.
그리고 기가 막힌 담서인이 방심한 사이, 기어이 운명 타령을 시작했다.
“저 아이가 검상을 입을 당시, 나도 그 장소에 있었다.”
“설마요.”
“어이, 마누라. 속고만 살았나? 저 아이가 뺨에 검상을 입었을 때가 아마 일곱 살 정도 됐을 거야. 그때도 참 귀여웠지.”
“만약 진짜라면 당시에 염노는 대체 뭘 했어요? 그 귀여웠던 아이의 뺨에 흉한 검상이 생기지 않도록 만들었어야지.”
아, 이게 아닌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염노의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에 한 발을 밀어 넣은 기분이랄까.
‘에이, 모르겠다.’
기왕지사 내친걸음이었다.
늪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늦었다.”
이런 속내를 전혀 모르는 염노는 탄식하듯 말했다.
“늦어요?”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지.”
“흉수가 누구였는데요? 강도? 산적? 아니면 흑도?”
“마교!”
진짜일까?
농담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염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래서 담서인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염노가 덧붙였다.
“저 아이, 백가장주의 여식이거든.”
‘백가장? 백가장이 어디 붙어 있는 곳이지?’
하룻밤 사이에도 수십 개의 문파가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곳이 강호였다.
그러니 그 많은 문파들을 모조리 알고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던 담서인이 마침내 백가장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 성공하고 두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 백가장?”
하지만 대답해 줄 염노는 그 자리에 없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시전의 인파들을 헤치고 백서연이 바느질을 하고 있는 포목점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는 염노를 발견한 담서인이 재빨리 소리쳤다.
“어디 가요?”
“작업하러.”
“지금 제정신이에요? 괜히 일 그르치지 말고 어서 돌아와요.”
담서인이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지만, 염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 우린 운명의 끈으로 이어진 사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