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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권(6화)
제2장 검마등산(劍魔登山)(3)
메시지 창이 떠오른 직후, 단세천의 몸이 그의 의지를 무시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게 숨을 내쉬고 양손을 동시에 앞으로 뻗는다. 그 상태에서 다시 한 번 크게 호흡. 앞으로 뻗어졌던 두 손은 몸 밖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배 앞으로 모이고, 마치 무언가를 밀어 올리듯이 목 언저리까지 올려진다. 거기서 두 손이 반전한다. 손등이 있던 곳에 손바닥이 가고 손바닥이 있는 곳에 손등이 가며, 이번에는 무언가를 밀어 내리듯이 배꼽 바로 위까지 내려진다. 그리고 이어진 한차례의 묵직한 호흡.
이것이 수라마공의 기본 준비 동작이었다. 이 동작과 호흡을 통해 기(氣)의 정돈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운기가 시작되었다.
“후우웁, 하아아……!”
깊은 호흡과 함께 시작된 운기. 단세천의 주먹이 허공을 찢으며 내뻗어지고, 절도있는 동작이 이어졌다.
수라마공은 마공(魔功)이라는 이름답게 그 운기조차도 패도적이기 그지없었다. 운기라기보다는 차라리 박투술(搏鬪術)에 가까울 정도. 어째서 설명에 외문 무공으로서의 효과가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될 만큼 수라마공의 운기 방법은 거칠었다.
단세천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자신의 몸을 묵묵히 관조했다. 어디서 어떻게 호흡을 하는지, 손의 움직임은 어디가 중요한지 등등. 수라마공을 운기할 때의 움직임은 그의 머릿속에서 낱낱이 분해되고 해석되었다.
이윽고 모든 운기가 끝났다.
“후우우…….”
양발을 어깨 넓이로 벌린 단세천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눈앞으로 메시지 창들이 떠올랐다.
[수라마공]의 숙련도가 1성이 되었습니다.
내공이 10 생성되었습니다.
경지가 ‘무급(無級)’에서 ‘삼류(三流)’로 승급하였습니다.
“과연, 이런 방식이로군.”
고개를 끄덕거린 단세천이 다시 운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자동 운기였다. 한 번 더 자동 운기를 통해 운기에 대해 느껴 보려는 것이었다.
그의 몸이 다시 수라마공의 운기 경로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금 전의 운기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몸속을 돌아다니는 생소한 기운이 바로 그 다른 점이었다.
‘이 기운은…… 내공인가?’
단세천은 몸속에서 움직이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생각했다. 뜨거운 기운은 몸의 움직임과 호흡에 따라 몸 이곳저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생각대로 그것은 수라마공을 운기함으로써 생긴 10의 내공이었다.
생겨난 내공이 뜨거운 기운인 것은 수라마공이 열양공(熱陽功)이기 때문이다. 열양공인 수라마공의 내공인 수라기(修羅氣)는 당연히 열양지기(熱陽之氣)일 수밖에 없다. 만약 단세천이 익힌 것이 열양공인 수라마공이 아니라, 빙한공(氷寒功)인 빙옥마공이었다면 그가 느낀 기운은 차가웠을 것이다.
또 한 차례의 운기를 마친 단세천은 다시금 감탄을 터뜨렸다.
‘내공이라는 것을 굉장히 잘 구현했다!’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내공이라는 기운을 잘도 이만큼이나 구현해 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환상 연대기의 내공 시스템은 실로 대단했다.
몸속 이곳저곳을 누비는 뜨거운 기운과 그 기운이 지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기이한 고양감. 단순한 게임에서 새로운 무의 일면을 엿보았다면 비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단세천은 실제로 그것을 엿보았다.
그는 기이한 미소를 띤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정도의 현실감과 게임성! 이곳에서라면 나의 무술이 한차례 더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무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단세천. 그의 마음속에서 한동안 잠잠했던 무에 대한 열의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무도(武道)에 관한한 적수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하는 최강의 무인이 본격적으로 게임을 할 마음을 먹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게임에 영향을 미칠지 아직까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본인조차.
그로부터 삼 일 뒤.
숙박 기간이 끝난 단세천은 객잔을 나섰다. 객잔의 방에 처박히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수원관 거리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한차례 크게 심호흡을 한 그가 시선을 멀리 보이는 구령산에 두었다. 척 보기에도 산세가 무척이나 험해 보이는 구령산. 그의 이번 목적지는 바로 그곳이었다.
‘기본적인 내공 수련은 전부 끝냈다. 이제부터 할 일은 육체의 단련! 그러기 위해서는 구령산만 한 곳이 없을 터.’
현재 그는 수라마공의 숙련도를 2성까지 올린 상태였다. 내공 또한 무려 1년치, 수치로 따지자면 100 정도를 모았다. 일급 무공을 고작 삼 일 만에 2성까지 올리고, 내공을 100이나 모은 것은 게임사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그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무도의 고수다. 그것도 초절한 고수. 그런 만큼 자신의 육체를 누구보다도 잘 통제하고,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그러니 수동 운기에 있어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수동 운기는 유저의 몰입도에 따라 내공의 증가량이 달라지는 운기 방법. 따라서 무술을 할 때만큼은 몰입도가 최고 수준인 그가 빠른 속도로 내공을 모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가자.’
구령산에 갈 준비는 객잔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끝내 놓은 상태. 이제 이대로 곧장 구령산에 가면 된다.
단세천은 저 멀리 보이는 구령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구령산(九靈山).
수원관 근처에서 가장 산세가 험한 곳으로, 낭아(狼牙), 호연(狐淵), 웅진(熊振). 궁오(宮五), 각석(角石), 오호(五虎), 칠루(七淚), 묘안(猫岸), 구령(九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홉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이다.
비록 산이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크기에 산맥처럼 보일 정도지만, 구령산은 엄연한 하나의 ‘산’이었다.
구령산에서 주로 나타나는 몬스터는 여우나 늑대, 곰 혹은 호랑이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의 이야기고,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면 영수(靈獸)나 마수(魔獸) 등을 제법 만날 수 있다.
단세천은 현재 구령산의 호연봉을 오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야영을 하게 되겠군.”
점점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바라보던 단세천이 중얼거렸다.
그가 구령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 마땅히 수련할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비어 있는 동굴이면 족한데, 도통 동굴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올라온 호연봉의 모습을 쭉 둘러보았다. 어슴프레하게 깔린 어둠 사이로 보이는 호연봉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이곳이 가상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아무리 멋진 광경이라도 반복해서 보면 질리기 마련. 벌써 몇 시간이 넘도록 보아 온 광경이기에 단세천은 별다른 감탄 없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늑대라도 나온다면 한바탕 시원하게 싸우기라도 할 것인데, 아쉽구나.’
그런 그의 바람이 통하기라도 한 것일까?
커다란 나무의 그림자 때문에 어둑어둑해진 곳 부근에서 크르릉거리는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어둠 속에서 샛노란 눈동자가 속속 드러났다.
적의를 품고 반짝이는 샛노란 눈동자!
‘늑대인가.’
단세천은 허리춤에 매여 있는 흑철검을 느릿하게 뽑아 들었다. 흑철을 백련정강(百鍊精剛)하여 만들어진 새카만 검신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그의 반응에서 들킨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늑대 세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들은 보통의 늑대들보다 반 배 정도 더 몸집이 컸고, 털 색깔은 기이할 정도로 검었다. 단세천은 몰랐지만, 그것은 구령산의 낭아봉에서만 나타나는 흑랑(黑狼)이라는 몬스터였다.
흑랑은 날카로운 발톱과 일반 늑대보다 훨씬 빠른 몸놀림, 그리고 발톱만큼이나 날카로운 이빨을 주 무기로 사용하며 결코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최소한 셋, 많으면 수십 마리씩 몰려다녔다.
그런 면에서 단세천은 나름대로 행운아였다. 그가 만난 흑랑은 최소 단위의 무리였으니까.
‘고작 세 마리인가? 생각했던 것에 비해 너무 적군.’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크르르르.
크릉, 크르르.
흑랑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들 딴에는 나름 먹잇감에게 겁을 주려 한 행동이었을 테지만, 정작 그 대상이 된 단세천으로서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 환상 연대기에서 최초로 벌이는 전투로구나.’
흑랑들이 뿜어내는 적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세천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는 이미 젊은 나이에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숱한 전투를 겪은 무인이다. 고작 이 정도 적의쯤은 식은 죽 먹기조차 되지 못했다. 아니, 그는 되레 흥미를 느꼈다.
가진바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없다는 제약 속에서의 싸움만 해 오다 처음으로 ‘전력을 다해도 되는 상태’가 된 것이다. 단세천은 끓어오르는 투지를 숨기지 않은 채 흑랑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오거라.”
크앙!
단세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세 마리의 흑랑이 커다란 포효를 터뜨리며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양옆과 정면에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흑랑들!
짐승 주제에 제법 까다로운 합격(合擊)이다. 만약 여기 있는 것이 그가 아닌 다른 유저였다면 흑랑들의 합격에 우왕좌왕하다 그대로 당했겠지만, 흑랑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여기 있는 것은 단세천이었다. 현실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한 무인, 단세천 말이다!
“느리다!”
나직한 일갈과 함께 휘둘러지는 흑철검!
정확하고 깔끔한 궤도로 휘둘러진 흑철검이 세 마리의 흑랑을 차례로 베어 나갔다.
사사삭!
날카로운 흑철검의 칼날에 베인 흑랑들이 깨갱! 소리를 내며 멀찍이 튕겨 나갔다.
무도의 고수인 단세천이 이만한 빈틈을 놓칠 리가 없다. 그는 휘둘렀던 흑철검을 회수한 뒤, 곧장 정면의 흑랑에게 찔러 넣었다.
푸욱!
흑철검의 예기는 고작 흑랑의 가죽 따위가 버틸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흑랑은 단번에 머리를 꿰뚫린 채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단세천은 재빨리 흑철검을 뽑아내고 혹여나 있을지 모르는 다른 흑랑들의 반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죽은 흑랑을 제외한 나머지 두 마리의 흑랑은 너무도 간단하게 동료가 죽은 사실에 놀란 듯 그를 둘러싸고 으르렁거릴 뿐,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보다 시시해진 전투에 혀를 찼다.
‘역시 이런 미물로는 한계가 있는 건가.’
제법 흥겹기는 하나, 그뿐이다.
찰나에 갈려진 생사의 간극, 순간을 나누는 혼신, 방심하면 죽는다는 긴장감과 오싹한 전율, 그리고 그 이상으로 강렬한 투쟁심.
흑랑들에게서는 그런 것들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순간, 단세천은 흑랑들을 상대하는 것이 귀찮아졌다.
이런 늑대들 정도는 현실에서도 상대하려고만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전력을 다한 강자와의 대결이지, 고작 이런 ‘사냥’ 따위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