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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권(9화)
제3장 검마조우(劍魔遭遇)(3)
다음 순간, 시큰한 아픔이 왼팔의 팔뚝으로부터 퍼졌다. 흑랑의 송곳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팔뚝에 박혀 든 것이다. 구멍이 뚫린 팔뚝으로보터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피를 본 단세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를 으득 갈더니, 오른손으로 팔뚝을 물고 있는 흑랑의 콧잔등을 후려갈겼다.
퍼억!
깨갱!
고통을 이기지 못한 흑랑이 비명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그 덕에 왼팔이 자유로워졌다. 단세천은 다른 한 마리의 흑랑이 달려드는 것을 후려쳐 견제하고는, 자신의 팔뚝을 물었던 흑랑을 노려보며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타악!
그는 땅을 강하게 박찼다. 땅에서부터 올라온 힘이 강하게 돌아간 허리를 타고 축적된다.
축경(蓄勁)!
그리고 한순간, 중심을 이동시키며 허리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축적된 힘이 뒤틀리는 허리를 타고 폭발하듯이 뿜어져 나온다. 발경(發勁)!
뻗어 나가는 주먹은 마치 쏘아진 화살과도 같은 속도였다. 흑랑은 미처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단세천의 주먹을 맞이했다.
축경여개궁 발경여방전(蓄勁如開弓 發勁如放箭)!
‘활시위를 당기듯 경을 모으고 화살을 쏘듯 경을 발한다’라는 말에 더없이 적합한 일격이다.
투웅!
이전과 같은 퍽! 소리가 아닌, 둔중하게 울리는 소리를 내며 미간에 정확하게 꽂혀 들어가는 주먹. 흑랑의 털이 삐쭉 서고 눈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하나 남았군.’
단세천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흑랑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흑랑은 흠칫거리다가 이내 뒤돌아 달아나 버렸다. 어린 여자아이 때문에 따라갈 수 없었던 단세천은 미간에 내 천 자를 그렸다.
저렇게 도망친 녀석의 경우, 거의 대부분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실전 수련을 겸한다고 생각하도록 해야겠구나.’
좋게 생각하기로 한 단세천은 나머지 흑랑들의 목숨을 끊고, 그들이 떨군 아이템들을 회수했다. 그런 다음 팔뚝에 난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 치료를 한 뒤, 여자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감싼 채 덜덜 떨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여자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의 이채가 흘렀다.
그건 여자아이의 특이한 외모 때문이었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는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은색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모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여자아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기야, 보통의 여자아이가 이런 험준한 산에, 그것도 정상 부근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호연봉이라 했으니, 구미호 사촌쯤이겠구나.’
피식 웃은 단세천이 비교적 멀쩡한 오른손을 여지아이에게 뻗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여자아이가 그의 행동에 흠칫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자아이가 생각하는 그런 행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여자아이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단세천을 바라보는 여자아이.
단세천은 여자아이를 향해 그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여자아이는 적잖이 안심이 되었는지 긴장이 풀린 것처럼 이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히잉…….”
“그래그래. 괜찮다. 이제 위험은 없으니 안심하거라.”
단세천의 상냥한 말에 안심했는지, 아니면 그의 따뜻한 품 때문인지는 몰라도, 울먹이던 여자아이는 이내 그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여자아이의 반응에 머리를 긁적인 그는 일단 자신의 동굴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곳에서 계속 있다가는 언제 흑랑들이 몰려올지 모르니까.
숲이 완전히 어둠에 잠길 때 즈음, 수련 장소로 돌아온 단세천은 곧장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이 아이를 내려 둘 자리부터 마련해야겠구나.’
어린 여자아이를 딱딱한 땅바닥에 내려 둘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생각한 단세천은 한 손으로 여자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가방에서 흑랑 가죽 몇 개를 펼쳐 바닥에 깔았다. 그러고 나서 여자아이를 조심스럽게 흑랑 가죽 위에 눕혔다.
그런 다음 그는 일단 꺼져 가던 모닥불부터 되살렸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불씨가 남아 있었던 터라 장작 몇 개를 집어넣으니 자연스레 불꽃이 화륵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모닥불을 되살린 그가 다음에 한 일은 여자아이가 먹을 만한 것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 스스로는 벽곡단 하나면 충분했지만, 딸아이보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맛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벽곡단을 먹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 여인, 노인 등의 약자들에게는 무척이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그는 흑랑들로부터 얻은 아이템 중 하나인 늑대 고기를 꺼내 모닥불에 굽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최대한 깨끗한 나뭇가지에 늑대 고기를 꽂은 뒤, 조심스럽게 굽기 시작한 것이다. 혹여나 나뭇가지에 닿을까 심혈을 기울여 조절을 하자, 고기는 곧 자글자글하는 소리를 내며 맛있는 향기를 풍기며 익어갔다.
고기의 향기를 맡은 것일까?
흑랑 가죽 위에 누워 잠들어 있던 여자아이가 부스스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일어났느냐?”
여자아이는 단세천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명백하게 경계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에 쓴웃음을 지은 그는 나뭇가지에 꽂아 굽고 있던 고기 한 점을 충분히 식힌 후 여자아이에게 내밀었다. 물론 나뭇가지에 꽂혀 있던 부분은 잘라 낸 후였다.
“먹거라. 그럭저럭 먹을 만할 거다.”
흠칫흠칫하며 고기를 받아 든 여자아이가 단세천의 눈치를 보며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냠냠거리며 조심스럽게 먹던 여자아이는 고기에 이상이 없음을 확신하자, 이내 걸신들린 것처럼 고기를 먹어치웠다.
그 모습에 빙긋 웃은 단세천은 여자아이에게 고기를 더 건넸다. 이번에도 역시 충분히 식힌 고기였다. 여자아이는 그에게 완전히 경계를 풀었는지 그가 고기를 주면 주는 대로 족족 받아먹었다.
이렇다 할 식기가 없었기 때문에 맨손으로 고기를 집어먹은 여자아이는 한순간에 기름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단세천은 배부른 듯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아이의 손과 입을 자신의 옷 소매로 닦아 주었다. 어차피 버릴 옷, 이런 식으로 쓰는 게 더 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흠칫거리던 여자아이도 금세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얌전히 있었다.
여자아이를 깨끗하게 만든 단세천이 물음을 던졌다.
“이름이 무어냐?”
“…시호(翅狐).”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던 여자아이, 시호가 답했다.
만난 이후 최초로 들은 시호의 목소리에 빙긋 웃은 단세천이 다시 한 번 물었다.
“혹시 어디 갈 곳이 있느냐?”
도리도리.
시호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럼, 부모님 같은 분들은 계시더냐?”
“…엄마, 있었는데…… 헤어졌어…….”
헤어진 엄마를 떠올린 것일까?
시호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맺혀 그렁그렁해졌다. 괜한 것을 물어보았다 자책한 단세천이 시호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의 품속에서 시호가 훌쩍였다.
“괜찮다면, 네 부모님께서 오실 때까지 나와 함께 지내자꾸나.”
“…그래도 돼?”
시호가 옹알거리는 것처럼 물었다. 단세천은 안심하라는 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괜찮다. 어차피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니.”
“시호, 버리지…… 않을 거야?”
“버릴 이유가 없지 않으냐? 안심하거라. 내 능력이 되는 데까지는 널 돌봐 줄 터이니.”
그 말을 들은 시호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그의 품속에서 다시 새근새근 잠들었다.
어차피 오늘 수련은 끝내려고 했던 터라 그는 곧장 흑랑 가죽을 펼쳐 두었던 곳으로 가서 누웠다. 시호의 고사리같이 작은 손이 그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기에 그냥 같이 자려는 것이었다.
시호가 편안히 잘 수 있도록 자세를 잡은 그는 자그맣게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잘 자거라.”
그는 몰랐다.
시호가 구미호의 사촌이 아닌 진짜 구미호─정확하게는 구미호로 승격하려고 도(道)를 닦고 있는 삼미호─라는 것을, 그리고 그의 엄마가 호연봉의 주인인 미호 선인(尾狐 仙人)이라는 것을.
하긴, 그의 성격에 그것을 알게 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단세천과 시호가 만난 첫날이 흘러가고 있었다.
제4장 검마대면(劍魔對面)(1)
구령산 호연봉 정상 부근.
신령스런 산이라 하여 심마니나 나무꾼들도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잘 접근하지 않는 구령산, 그것도 구미호가 나타난다는 호연봉 정상 부근에 한 명의 청년이 서 있다.
거의 해져 있는 하얀색…… 이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회색 옷을 입고 눈앞의 암석 절벽을 마치 생사대적, 혹은 살부지수나 되는 것처럼 노려보고 있는 청년.
그는 다름 아닌 백 일 단련을 위해 산을 오른 단세천이었다.
단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암석 절벽을 노려보던 단세천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이를 악물더니, 암석 절벽을 향해 똑바로 달려들었다.
콰앙!
단세천의 몸과 암석 절벽이 부딪치며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충돌.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마 암석 절벽에 부딪친 어깨가 박살 나는 건 물론이고, 그 충격에 내장까지 진탕되어 피를 토했을 터다.
그러나 단세천은 지극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와 충돌한 암석 절벽이 우수수 부서져 내렸다.
이것이 바로 철타금강법(鐵打金剛法)의 삼단계에 이르러 얻은 육신갑의 효능이다. 육신갑은 단단하기 짝이 없는 암석 절벽조차 단순한 몸통 박치기로 부숴 버릴 수 있는 강도의 육체를 이야기한다. 육신의 갑옷이라는 이름 그대로 육체를 아예 갑옷처럼 단단하게 바꿔 버리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키워진 단단함도 고통을 완화해 주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크……!”
‘역시 장난이 아니게 아프군!’
단세천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어깨로부터 퍼져 나가는 욱신거림 때문이었다. 철타금강법은 육체를 갑옷처럼 단단하게 만들지만, 그 와중에 느껴지는 통증은 그대로 느껴야만 하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고통쯤은 이제 그에게 익숙한 것에 불과했다. 이를 악문 그는 계속해서 암석 절벽을 들이받았다.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쾅쾅! 소리를 내며 들이받는 그의 몸으로 인해 우수수 부서져 내렸다.
한참을 그렇게 암석 절벽을 들이받던 그는 방법을 달리했다. 어깨로 들이받는 게 아니라, 전신을 이용해 가격하는 것으로.
퍽퍽! 퍼버벅! 퍽!
그는 주먹, 팔꿈치, 어깨, 발, 무릎, 머리에 이르기까지 공격이 가능한 모든 부위를 사용해서 암석 절벽을 가격했다. 그럴 때마다 암석 절벽이 조금씩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헉! 허억! 헉! 헉!”
미친듯이 암석 절벽을 공격하던 단세천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육체의 내구도는 육신갑 수준으로 올라섰지만, 지구력은 그렇게까지 올라가지 않은 탓이다. 후려칠 몸은 되는데, 힘이 받쳐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윽고 절벽을 후려치던 그가 멈춰 섰다. 그 순간, 그의 앞으로 지난 보름간 심심치 않게 보아온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근력이 1 상승하셨습니다.
체력이 1 상승하셨습니다.
중간에 멈춰서인지 지구력은 오르지 않았다.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단세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지치는구나.”
단세천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래 먼지가 일었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옷이다. 굳이 모래 먼지를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