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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권(10화)
제4장 검마대면(劍魔對面)(2)


아예 바닥에 누워 버린 그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감상했다. 새하얀 구름이 떠 가는 하늘은 더없이 맑고 깨끗했다. 이곳이 가상 현실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말이다.
‘운기나 해야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단세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양 발을 어깨 넓이만큼 벌렸다. 수라마공의 기본 자세였다.
깊숙이 숨을 들이마신 그는 곧바로 수라마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제법 많이 쌓인 수라기가 단전에서부터 솟구쳐 올라 그의 몸 구석구석을 휘감고 돌았다.
운기를 마친 그가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다음 수련에 돌입했다.
쉬이익! 쉬익!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휘저어졌다. 굳이 ‘뻗어졌다’라는 표현이 아니라 ‘휘저어졌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실제로 그의 주먹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휘저었기 때문이다.
그건 상대를 때리는 것에 중심을 두는 보통의 권법이 아니었다. 그저 마구잡이로 허공에다 대고 휘둘러대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것을 그냥 미친 사람의 헛짓거리라 부르면 불렀지 권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겉’만 볼 때의 이야기다. ‘안’을 보면 이렇게 훌륭한 권법이 없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으면서도 철저하게 주먹과 주먹이 마주치는 것을 피한다. 아무렇게나 하는 발차기 같지만 인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정도로 기이한 움직임을 보인다.
따로따로 놓고 보면 바보 같은 짓에 불과한데, 한데 합쳐 놓으면 철저하게 육신의 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움직임이다.
게다가 그렇게 움직이면서도 면면부절, 결코 흐름이 끊어지는 일이 없으니 대단히 뛰어난 권법이라 할 만했다. 비록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 없겠지만, 몸을 단련하는 데만큼은 그 어떤 권법보다 더 훌륭했다.
이 마구잡이인 것 같으면서도 육신의 단련에는 대단히 뛰어난 권법은 단세천이 당분간 수련하기로 결정한 권법, 연련권이었다.

민첩성이 1 상승하셨습니다.

유연성이 1 상승하셨습니다.

“후우우…….”
연무를 끝낸 단세천이 눈을 반개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수라기가 익숙하게 몸속을 휘돌며 피로를 덜어 냈다.
‘과연, 천년검해록의 무예답군.’
천년검해록(千年劍解錄).
그것은 검마단가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보였다. 동시에 현실의 그를 최강의 검객으로 만들어 준 책이기도 했다.
천년검해록은 일찍이 그의 가문, 검마단가를 세운 초대 가주가 천 년을 수련한 뒤, 그때 깨달은 것을 써냈다는 전설이 깃든 책이었다.
물론 실제로 천 년 동안 수련한 뒤에 썼을 리가 없다. 인간의 수명은 고작 백 년도 되지 않으니까. 천 년을 살면 그건 이미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단세천이 생각하기에 이름이 천년검해록인 것은 그의 가문이 천 년 동안 대를 이어 수정, 보완해 왔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가문의 가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그의 추측이었다.
각설하고, 천년검해록에는 천 년 동안 그의 가문 사람들이 세계를 여행하며 얻은 수많은 무예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것도 특별히 거르고 걸러, 천년검해록에 오를 만한 자격이 있는 무술들만.
지금 그가 선보인 연련권 또한 그 무예들 중 하나였다.
단세천이 심법 외의 무공서들을 필요치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미 무림의 숱한 무공들보다 더 뛰어난 무예들을,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지니고 있는데 굳이 다른 무공을 익힐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앞으로 십 일간은 연련권의 수련에 주력하자.’
철타금강법은 이미 목표했던 삼단계에 이르렀다. 사단계부터는 철이 필요한 만큼, 지금 당장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단세천은 이틀 전부터 시작한 ‘연련권’의 수련에 박차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보면 단세천은 참으로 대단한 무인이었다. 그가 철타금강법을 수련한 지 고작 보름, 15일밖에 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금강법의 삼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실로 기함을 토할 만한 속도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철타금강법만을 수련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수라마공과 수라행의 성취 또한 각각 3성, 그리고 2성에 들어선 상태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낮아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외공에 비해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세천!”
단세천이 동굴 근처에 도착했을 때,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빙긋 웃음을 지은 그가 목소리가 난 쪽을 향해 팔을 벌렸다.
예상대로 새하얀 머리카락의 자그마한 소녀가 그의 품 안에 날 듯이 달려와 폭 안겼다.
“수련한 후에는 먼지투성이니 안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씻으면 괜찮아.”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피식.
실소를 터뜨린 단세천은 시호를 안아 들었다. 시호는 익숙하게 그의 목에 매달렸다. 단세천 또한 익숙한 움직임으로 시호를 안은 채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 보름, 변한 것은 단세천의 무력뿐만이 아니었다. 시호와 그의 관계도 무척이나 달라졌다.
첫날에 흠칫흠칫 놀라며 단세천을 경계하던 시호는 그와 만난 지 5일 즈음 지났을 때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고, 일주일이 되던 날에 완전히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예 그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단세천은 그런 시호의 행동을 가족과 헤어져 버린 슬픔 탓이라고 생각하며, 별말없이 감싸 주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거의 가족처럼 되어 버린 두 사람이었다.
“별일 없었고?”
“…응.”
“요새 주변에 있던 흑랑들이 슬슬 없어지더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밖에 나와도 될 것 같다.”
단세천의 말에 시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와 동시에 시호가 자신의 얼굴을 단세천의 얼굴에 가깝게 들이댔다.
“정…… 말?”
“그래. 대신 여우 몇 마리가 종종 보이기는 했지만, 너라면 괜찮을 터이니.”
시호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보름 동안이나 동굴 속에 있다가 밖에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말에 신이 난 것 같았다.
단세천은 시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하얀 백발의 부드러운 감촉이 손에 한가득 느껴졌다. 시호는 얼굴 가득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그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자아, 이제 밥을 먹자꾸나. 오늘은 무엇을 먹고 싶으냐?”
“사슴 고기!”
“사슴? 웬일로 늑대 고기를 안 먹고? 매일매일 늑대 고기만 먹어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거, 질렸어.”
“뭐, 어차피 사슴 고기도 넉넉히 있으니 괜찮겠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요리 도구를 사 와야겠구나.’
100일이 지나기 전까지는 내려가지 않으려 했지만, 시호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는 단세천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다.
푸르렀던 하늘이 검게 변하고, 붉은 태양을 대신하여 은은하게 빛나는 새하얀 달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빛을 발했다.
“…….”
타닥, 타닥.
단세천은 가라앉은 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서는 흑랑 가죽을 이불 대신 덮은 시호가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무언가 기분 좋은 꿈을 꾸는 듯 시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휙. 화륵.
모닥불에 장작 하나를 던져 넣자, 꺼질 것처럼 위태롭던 불길이 강하게 되살아난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옆에 잠들어 있는 시호에 대한 생각이었다.
‘언제까지고 데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어찌어찌 수련이 끝날 때까지 같이 있는다고 해도, 그다음에도 계속 같이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마음 같아서는 계속해서 데리고 다니고 싶다. 하지만 그가 수련을 끝내고 행하려는 계획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열 살밖에 안 된 시호가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니 시호를 이대로 계속 데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동굴에 혼자 버려두고 갈 수도 없다. 또한 호연봉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하니 남들 손에 맡기는 것도 무리. 그렇다면 결국 남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원래의 부모에게 데려다 주는 것. 하지만…….’
문제는 시호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시호와 그가 만난 것은 호연봉의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거기서 흑랑들에게 포위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던 시호를 구하면서 이어진 인연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시호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호연봉에 살고 있다는 점과 흑랑에게 목표가 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다. 단세천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은 이마저도 확실한 정보가 아니라 추측이라는 사실이다.
그나마 시호 본인의 입으로 이야기한 부모, 정확히는 엄마 쪽과 헤어졌다는 것으로 보아서는 엄마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문제지.
‘어쩐다……?’
고민을 하던 단세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이렇다 할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일단 백 일 단련이 끝날 때까지는 데리고 있는 수밖에.’
결국 단련이 끝날 때까지는 시호를 데리고 있기로 생각을 굳힌 단세천은 자리에 누웠다. 푹신한 흑랑 가죽의 느낌이 전신을 감싸왔다. 눈을 감은 그는 잠을 청했다.
그때였다.
캬아앙!
여우가 울부짖는 소리가 동굴 밖에서 들려왔다.
살기와 적의가 가득 담긴 울부짖음에 단세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곧장 한쪽 벽에 기대어 세워 놓았던 흑철검을 집어 들고 재빠르게 발검했다.
스릉,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빠져나온 흑철검의 검은 칼날이 모닥불을 받아 빛을 발했다. 오랫동안 실전에서 쓰이지 않은 한을 이번에야말로 풀고 말겠다는 듯, 흑철검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한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시호는 여우 쪽 편인 줄 알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흑랑에게 노림당하는 것을 보았기에 여우 쪽의 인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같은 편인 여우가 이렇게 살기와 적의를 품다니?
‘아니, 시호가 아닌 나를 향한 것인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시호와 함께 있는 그를 보고 여우 측의 인물이 뭔가 오해를 하고 이렇듯 살기와 적의를 뿜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단세천은 잠시 흑철검을 뽑은 채로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상대는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은 시호의 안전에 신경을 쓴다는 의미다.
‘말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군.’
한차례 심호흡을 한 단세천이 동굴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동굴 밖에는 절대로 보통의 여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생김새의 여우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고고히 서 있는 여우.
날카로운 두 눈은 백색의 안광을 흩뿌렸고,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새하얀 순백의 털은 삐죽삐죽 솟구쳐 있다. 체고 칠 척(212.1cm), 신장 길이 이십 척(606cm)이 넘어갈 듯한 거대한 덩치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질리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상대를 두렵게 하는 것은 여우의 엉덩이에 달려 있는 아홉 개의 꼬리였다. 보랏빛의 문양이 새겨진 아홉 개의 꼬리.
그것은 이 호연봉의 주인, 구미호(九尾狐)의 상징이었으니까!
캬아앙!
“잠깐, 일단 대화를…… 크윽!”
단세천이 뭐라 할 새도 없이 구미호가 달려들었다.
단세천은 황급히 흑철검을 들어 구미호의 발톱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나 그렇게 구미호의 발톱 공격을 막아 낸 단세천의 몸은 뒤로 죽 밀려났다, 그것도 바닥에 두 개의 고랑을 만들면서.
압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힘의 차이였다.
“기다려라! 네가 시호를 데려가려는 건……!”
캬아아앙!
시호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일까?
구미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