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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권(11화)
제4장 검마대면(劍魔對面)(3)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힌 구미호가 단세천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크으읏!”
카가가각!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어둠에 휩싸인 호연봉에 울려 퍼졌다. 구미호의 공격을 받아 낸 단세천은 그 힘을 이용해 최대한 멀찍이 물러나는 데 주력했다.
구미호의 반응을 보아하니 시호와 긴밀한 관계에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시호의 가족이라면 그에게도 완전히 남은 아니다. 그러니 괜히 검을 휘두르지 말고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구미호가 구하려고 하는 것은 시호. 그렇다면 시호와 멀찍이 떨어지는 것으로 구미호의 분노를 약간이나마 잠재울 수 있을지 모른다. 단세천은 그렇게 생각하고 구미호의 힘을 역이용해 동굴에서 멀찍이 떨어진 것이었다.
다행히 그런 그의 의도는 먹혀들었다.
그가 구미호의 공격을 받고 동굴 입구로부터 멀찍이 물러나자 구미호가 동굴 입구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그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호는 무사하다! 동굴에서 자고 있으니, 확인해 보아도 좋다!”
흑철검을 거둔 단세천이 소리쳤다.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던 구미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겨우 구미호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그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새하얀 눈동자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필시 구미호를 따르는 여우들일 터다.
‘역시 시호는 여우 쪽 편이었구나.’
단세천은 대담하게도 평평한 바위로 움직여 그곳에 걸터앉았다.
그 대담하기 그지없는 행동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여우들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여우들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 동굴 입구를 주시했다.
구미호가 동굴에 들어간 지 일각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동굴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두 개의 인영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컸고, 다른 하나는 큰 인영의 허리춤에나 간신히 닿을 만큼 작았다.
완전히 동굴을 빠져나온 인영의 정체를 알아본 단세천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작은 인영은 예상대로 시호였다. 하지만 큰 인영은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시호가 자란다면 저렇게 될 것 같은 모습이랄까. 새하얀 소복을 차려입은 기묘한 분위기의 여인이 시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머리 위에는 여우의 그것처럼 생긴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여인이었다.
단세천은 여인의 소복 아래로 살짝살짝 드러나는 꼬리를 보고 여인이 구미호일 것이라 짐작했다.
‘시호도 본래는 여우인데 둔갑술을 펼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 테지. 그렇다면 구미호 또한 그런 술법을 부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시호의 손을 꼭 잡은 구미호는 곧바로 단세천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마치 인외(人外)─정작 본인이 인외의 종족이었지만─를 보는 것 같은 묘한 눈으로 단세천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작게 숙여 보였다.
“저는 미호라고 합니다. 시호의 어미 되는 이이지요.”
“단세천이오. 반갑소.”
단세천은 평상시와 같은 태도로 인사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느낀 것인지 잠깐 눈을 크게 떴던 구미호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우선 갑작스럽게 공격한 점, 대단히 죄송합니다. 시호를 납치해서 어떻게 하려는 것이라 생각하여…….”
“괜찮소. 그런 오해를 할 만한 상황이었으니.”
“마음이 넓으시군요.”
“그저 부모의 사랑을 알 뿐이오.”
단세천이 빙긋 웃었다. 그는 구미호가 보인 행동에 대해 깊은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그라도 그의 딸이 없어졌는데 모르는 사람이 딸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면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심했을지도.
그는 무인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아버지이고, 한 아내의 남편이었으며,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그런만큼 구미호의 잘못을 추궁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인사를 하지 않았군요. 제 아이를 구해 주셨지요. 감사드립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했을 일이었소. 굳이 그렇게 감사할 필요는 없소이다.”
“아닙니다. 만약 공(公)이 아니었다면…….”
구미호의 사례와 단세천의 사양이 끊임없이 이어지려는데, 딱 적절하게 그 순환을 끊는 목소리가 있었다.
“…엄마, 졸려.”
가만히 구미호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눈을 비비고 있던 시호가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그에 구미호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시호를 품속에 안아 들었다. 시호는 오랜만에 느끼는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단세천이 그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린 구미호가 말했다.
“동굴에서 생활하시며 무도를 수련하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소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여우 일족을 도와주지 않으시겠어요? 그에 따른 보상은 해드리겠습니다.”
구미호의 말에 단세천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도와달라니? 무엇을 도와달라는 건지 잘 모르겠소.”
“아직 공께서는 잘 모르시겠군요. 사실 제가 시호를 잃어 버리게 된 사연에는 저 낭아봉의 더러운 늑대 일족과의 전투 때문이었습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분을 참던 구미호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 호연봉의 여우 일족과 낭아봉의 늑대 일족은 오랜 세월 간 앙숙처럼 지내왔습니다.”
구미호를 대모로 삼은 여우 일족과 대흑랑(大黑狼)을 우두머리로 삼은 늑대 일족.
그들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대립해 왔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오래전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누 백년에 걸친 길고 긴 대립은 그들로 하여금 싸워야 할 이유마저 잊어버리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그저 오랜 시간 내려온 ‘법칙’에 따라 서로를 증오하고, 물어뜯고, 죽이려 들었다.
그 대립이 극에 이른 것이 보름 전이었다. 딱 단세천이 호연봉을 오르던 그때, 낭아봉의 우두머리인 대흑랑이 늑대 일족을 이끌고 호연봉을 공격해 온 것이다. 당연히 구미호는 그런 대흑랑과 늑대 일족을 격퇴하기 위해 여우 일족의 전투원들을 데리고 싸움에 나섰다.
그러던 와중에 구미호의 딸인 시호가 무리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흑랑들에게 습격받던 것을 단세천이 구해 주게 된 것이었다.
구미호의 이야기를 들은 단세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가 내심 추측하고 있던 내용과 비슷했다. 시호가 구미호의 딸이라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그렇게 된 사정이었구려. 하면 나에게 도와달라는 것은 늑대 일족과의 싸움이오?”
“예. 다행히 이번은 어찌어찌 대흑랑과 늑대 일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언제고 다시 호연봉을 짓밟으러 올 것입니다. 그때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허어, 아직 나의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소. 그래도 괜찮겠소?”
“제 공격을 막아 내실 때의 무위라면 결코 미약하지 않습니다. 부디 저희를 도와주시기를 간청드리겠습니다.”
구미호의 간절한 눈빛을 받은 단세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어도 그는 여우 일족을 도왔을 것이다. 단 보름, 15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그는 시호에게 가족과도 같은 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프로그램의 집합체인 NPC 따위에게 무슨 가족과도 같은 정이냐고 비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런 비웃음 따위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다못해 동물에게조차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게 사람이다. NPC라고 해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모든 여우 일족을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구미호.
단세천이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과례는 비례라 했소.”
“제 딸의 은인이신 분에게 이 정도의 예는 과례라 할 수 없지요. 게다가 은공께서는 저희 여우 일족을 도와주실 분이 아니십니까?”
완강한 구미호의 태도에 단세천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은공이라니. 이 또한 너무 과분한 칭호로구나.’
한 것에 비해 대접이 너무 융숭했다. 고작해야 위험에 처한 어린 여자아이를 구하고, 여우 일족을 돕겠다고 약속한 것 가지고 너무 생색내는 듯하여 그는 매우 심란해졌다.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구미호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
“은공께서 해 주신 것은 생각만큼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하마터면 미호령(尾狐靈)의 영맥(靈脈)이 끊길 뻔 했던 것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저희 여우 일족은 호연봉에서 내쫓겨 뿔뿔히 흩어졌을 것입니다. 그걸 막아 주신 겁니다. 그러니 충분히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으시답니다.”
구미호가 하얀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방울 소리 같은 웃음 소리였다.
단세천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밤하늘에는 하얀 초승달이 그를 보고 웃는 듯, 새초롬하게 휘어진 채 빛나고 있었다.

* * *

자신의 거처에 누워 있던 ‘그것’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두려워하며 덜덜 떠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그것은 그들이 주는 두려움을 즐겼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쾌함이 있었다.
호연봉에서의 패퇴. 그때의 수치스러운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 그것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었던 것이다.
크르르릉!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보름 전 구미호에게 입은 옆구리의 상처가 쓰려왔다. 그에 따라 그것의 불쾌감은 더욱 커졌다.
고작 구미호 따위에게 이런 상처를 입다니!
낭아봉(狼牙峰)의 주인이자 모든 흑랑들의 우두머리인 대흑랑(大黑狼)에게는 구미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더없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당장에라도 구미호를 붙잡아 목을 물어뜯어 버리고 싶을 만큼.
게다가 대흑랑을 더욱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구미호와 여우 일족의 공세에 굴복해 호연봉에서 패퇴해 나왔다는 사실이다.
하다못해 부하 놈들이 구미호의 딸이라는 여우 년을 잡아 왔으면 이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능한 부하 놈은 웬 인간 하나 때문에 구미호의 딸년을 잡아 오지 못했다.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대가로 앞발을 휘둘러 머리통을 깨부숴 버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속에 쌓인 분이 풀리지 않았다.
크아아아앙!
대흑랑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주변에 있던 흑랑들이 깜짝 놀라며 꼬리를 말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제야 조금 기분이 풀린 대흑랑이 혀로 자신의 주둥이를 핥았다.
이렇게 패배만 곱씹고 있어 봐야 나아지는 건 없다. 대흑랑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이 패배를 어떻게든 극복해 낸 다음, 구미호를 죽이고 호연봉을 차지하는 것이다.
크르르릉!
대흑랑의 샛노란 눈동자에 멀리 보이는 호연봉이 담겼다.
저곳에는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구미호와 더러운 여우 일족들이 있었다. 목을 쭉 빼낸 대흑랑은 하늘에 뜬 초승달을 바라보며 길게 포효했다.

아우우우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