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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권(12화)
제5장 검마수련(劍魔修鍊)(1)


쏴아아아아…….
높디높은 절벽으로부터 곧장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가 새하얀 포말을 뿌옇게 피어 올린다. 하얗게 튀어 오른 물방울들은 느릿하게 날아 고여 있는 물속으로 작은 파장과 함께 스며든다.
그것은 마치 색이 다른 은하수를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고서에 이르기를, 은하수는 땅의 한수(漢水)가 하늘에 올라 형성되었다 하니 어쩌면 이 폭포의 물도 언젠가 저 하늘의 은하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각설하고, 맑고 깨끗하여 ‘청정 폭포’라 이름 붙은 곳답게 폭포의 물은 하늘과 같은 옅은 청색이었다. 속 안까지 낱낱이 보일 만큼 맑은 청색의 수면이 강옥(鋼玉)처럼 반짝였다.
단세천은 바로 그 폭포의 아래쪽, 새하얀 포말이 눈부시게 피어오르는 장소에 있었다.
쏴아아아아!
폭포수가 강하게 그의 전신을 강타했다. 그의 몸에 부딪친 폭포수가 물방울이 되어 쉼없이 튀어 올랐다. 분명히 강렬한 압력이 짓눌러 올 텐데도 그는 되레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현실에서도 버텨 냈던 압력이다. 게임에서라고 버텨 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폭포가 내는 시끄러운 소음도, 어깨를 짓눌러 오는 압력도 더는 그에게 장애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외부와의 교감을 일체 끊어 버리고 오로지 내부로만 침잠해 들었다.
현재 그의 마음은 그야말로 명경지수, 지독히도 깊숙이 가라앉아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과도 같았다.
그 상태로 그는 한 가지 화두에 몰두했다.
‘철검십이식이란 무엇인가?’
철검십이식(鐵劍十二式).
그것은 천년검해록상에 수록되어 있는 일흔두 가지의 무예 중 하나로, 강력함만으로 따졌을 때 세계에서 손에 꼽아볼 수 있을 만큼 고절한 검술이었다. 또한 총 열두 개의 검식으로 이루어진 중검술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세천의 상념은 그렇듯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무겁고, 진중한 것. 철검십이식의 ‘본질’에 대한 탐구였다.
‘철검이란 쇠로 만든 검을 의미한다. 무릇 쇠로 만들어진 검이란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굳셈[堅固]과 무엇이라도 베어 버릴 듯한 날카로움[銳氣]을 갖기 마련. 그렇다면 철검십이식의 철검의 요지는 것은 굳셈과 날카로움이리라.’
단세천은 철검십이식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철저히, 그리고 낱낱히 파헤쳐 갔다. 하나씩하나씩, 철검십이식의 묘용이 그의 머릿속에서 분석되어졌다.
그러나 그의 앞에 선 철검십이식은 마치 양파가 자신의 껍데기를 가벼이 벗어 던지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쉽게 그 진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하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철검십이식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가볍게 내미는 발걸음 하나, 검을 휘두르는 손목의 움직임 하나까지. 그의 의식은 한없이 철검십이식에 몰입하여 갔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검과 자신을 소통하게 만드는 의식!
‘철검십이식의 기본적인 무리는 ‘상대의 흐름을 자신의 무거움으로 깨뜨리는 것[對敵之流 以我重破]’이다. 이는 이유제강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제압하는 것이 상대의 강함, 즉 흐름[流]이라는 것은 같으나, 그 방법이 강(强)에 속하는 중(重)과 약(弱)에 속하는 유(柔)라는 것이 다른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철검십이식에 대한 단세천의 탐구는 더욱 깊은 영역으로 향했다. 검초를 따지는 것에서 검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거기서 또다시 진보하여 검의를 파악하는 것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 또한 있는 법.
단세천의 명상 수련은 예기치 못했던 방해자에 의해 멈춰졌다.
“세천!”
‘이 목소리는…… 시호인가.’
명상 상태에서 깨어난 단세천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쏟아지는 물에 가려져 흐릿한 시야 너머로 작은 소녀가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얀 소녀, 시호였다.
“점심 시간이야!”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던가.
단세천은 가부좌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폭포 아래에 있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압력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있었다. 그건 그의 몸을 휘돌고 있는 수라기 덕분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때에 그는 오로지 육체의 힘만으로 폭포의 압력을 버텼다.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 있었던 것은 그 탓이다. 온전히 육체의 힘만으로 폭포의 압력을 거슬렀으니, 표정이 굳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표정만 바뀌었으니 그것을 칭찬해야 할지도.
중요한 점은 단세천이 어떤 표정으로 폭포의 압력을 견뎌 냈는지가 아니다. 그가 육체의 힘만으로도 폭포의 압력을 견딜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바로 중요한 점이었다.
그저 육체의 힘만으로도 폭포의 압력을 견뎌 내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을 수 있는데, 거기에 수라기의 힘까지 더해진다면 폭포 안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탁탁.
폭포를 완전히 빠져나온 단세천이 몸을 털었다. 마치 먼지가 털려 나가듯 그의 몸에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열양지기인 수라기의 힘이었다.
물기를 완전히 털어 낸 단세천이 시호를 보며 물었다.
“오늘은 웬일로 혼자 왔느냐?”
“엄마 바쁘대.”
“흐음, 또 흑랑 놈들이 침입했나 보구나. 끈질긴 녀석들 같으니.”
“…시호는 그런 거 몰라.”
“시호는 몰라도 괜찮은 이야기란다.”
단세천과 시호는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거처로 향했다.
현재 시호는 단세천과 함께 그의 거처에서 지내고 있었다. 시호의 엄마인 구미호 미호 선인이 낭아봉의 흑랑 일족과의 대립 때문에 도통 시호를 돌봐 줄 시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세천으로서도 굳이 시호를 돌보는 일을 거절할 이유가 없어 계속 돌봐 주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그는 내심 시호와 함께 지낼 수 있어서 기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혼자 동굴에 있는 것보다는 귀여운 시호와 함께 있는 쪽이 더 나으니까 말이다.
“오늘은 뭘 해 먹었으면 하느냐?”
“우웅, 고기 볶음 먹고 싶어!”
“고기 볶음이라…… 그래, 무슨 고기 볶음이 좋으냐? 사슴, 늑대, 그도 아니면 토끼?”
“늑대!”
“오냐. 잠깐만 기다리거라.”
시호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준 단세천이 요리에 들어갔다.
우선 꺼져 가던 모닥불의 불씨를 되살리고, 가방 속에 있던 검은색 철 냄비를 비롯한 요리 도구들과 늑대 고기, 향신료 등의 재료를 꺼냈다.
검은색 철 냄비를 비롯한 식칼, 국자, 도마 같은 요리 도구들은 단세천이 얼마 전에 산을 내려가 사 온 것들이다. 아무리 시호가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다지만, 어린아이에게 매일같이 고기 구운 것만 먹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 하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면서까지 사 왔던 것이다.
단세천은 늑대 고기를 적당히 잘라 미리 만들어 둔 양념과 잘 버무린 후, 냄비에서 가볍게 볶았다.
실로 간단한 요리법이다. 그렇다고 맛이 없어 보이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만약 맛이 없어 보였다면 지글지글 익어 가는 고기 볶음의 냄새에 시호가 기대에 찬 얼굴을 할 리 없었으니까.
탁.
“자, 완성이다. 맛있게 먹거라.”
“잘 먹겠습니다!”
단세천이 고기 볶음을 담은 그릇을 탁자─로 쓰이고 있던 돌─위에 내려 놓자마자 시호의 손에 들려 있던 숟가락이 움직였다.
고기 한 점을 숟가락에 담은 다음, 입에 가져가서 냠! 소리를 내며 먹는 시호. 입 안의 고기를 오물오물 씹으며 얼굴에 홍조를 띠는 모습에서 실로 살인적인 귀여움이 느껴졌다.
일부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괴이한 성벽(姓癖)을 가진 이들이라면 시호의 귀여움을 결코 견뎌 내지 못할 터였다. 물론 단세천에게 그런 성벽 따위는 없었으므로 그저 귀엽다고 느낄 뿐이었다.
“맛있느냐?”
“응! 맛있쪄!”
입 안 한가득 고기를 담고 있던 터라 시호의 말이 약간 샜다. 그래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단세천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그들이 한참 식사를 하고 있을 무렵, 호연봉 아래에서 깔짝거리는 흑랑들로 인해 식사에 오지 못했던 미호 선인이 도착했다.
“어머, 벌써 식사를 시작하셨군요.”
“미안하오. 시호가 워낙 배고파 하기에…….”
“후후, 농담이에요. 별로 질책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러니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빙긋 웃은 미호 선인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한 달 전, 미호 선인이 시호를 찾아 습격해 왔을 때부터 그들은 쭉 식사를 함께해 왔다. 단세천은 시호와 함께 지내므로 당연히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었고, 미호 선인은 식사 때만큼은 짬을 내어 자신의 딸과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에서 식사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레 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20일 정도 그런 식으로 같이 식사를 하려니, 이제는 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 되었을 정도다.
“어찌하다 식사에 늦은 것이오?”
“하아…… 이번에도 전과 같아요. 흑랑들이 저희 일족을 상처 입히고 도망쳤지요.”
“요새 그들의 방종이 잦아진 듯하구려.”
“예. 이번 달에만 벌써 다섯 번째예요.”
미호 선인의 고운 얼굴이 찌푸려졌다. 흑랑들이 그녀의 일족을 공격하기가 이달 들어서만 벌써 다섯 번. 보통 한 달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 연이어 다섯 번이나 벌어진 것이다. 그 사실이 그녀를 못내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런 미호 선인의 마음을 알아차린 단세천이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다. 흑랑 일족이 직접적으로 쳐들어왔다면 모를까, 지금 상태에서 끼어드는 것은 간섭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결국 빤한 위로밖에 할 수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오. 과한 걱정은 건강을 해친다 했소. 다 잘될 것이외다.”
“후후후, 고마워요.”
미호 선인이 살포시 웃었다. 밤하늘의 달빛마냥 은은한 미소였다. 선술을 부리는 여우인 구미호의 미소는 지극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이성을 잃고 매혹되어 버렸을 만큼.
그러나 단세천과 보통 사람과의 사이에는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하늘과 땅 정도로 말이다.
고작 여인의 미소 정도에 흔들릴 만큼 그의 정신력은 약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저 가벼운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드시오.”
빈 그릇에 고기 볶음을 약간 덜어 낸 단세천이 그것을 미호 선인에게 건넸다.
“맛있게 먹을게요.”
“그래 주면 요리한 사람으로서 고맙겠소이다.”
그릇을 건네받은 미호 선인의 눈에 미약한 이채가 담겼다. 그 이채는 사뭇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었기에 단세천으로도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후로 식사는 평탄하게 이어지다 끝이 났다.
식사를 모두 마친 후, 고기 볶음을 배부르게 먹은 시호가 볼록 솟아난 배를 통통 두들기며 헤실 웃었다.
“배불러!”
“맛있었느냐?”
“응!”
고개를 까딱거리는 시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단세천이 고개를 돌려 미호 선인을 바라보았다. 기품있는 동작으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은 미호 선인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뭘 할 생각이오?”
“호연봉 정상의 제 거처에서 흑랑 일족의 동태를 살펴볼 생각이랍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잘되었구려. 지금부터 실전 수련에 다녀올 생각이오. 내가 수련에서 돌아올 때까지 시호를 맡아 주었으면 하오.”
단세천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던 미호 선인이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후.”
“왜 웃는 것이오?”
“왠지 입장이 뒤바뀐 것 같아서요. 원래는 은공께서 시호를 맡아 주시는 거였는데 말이죠.”
생각해 보면 그녀의 말대로였다. 엄마인 미호 선인이 외인인 단세천에게서 시호를 잠시 ‘맡아’ 준다니, 이것이 입장이 뒤바뀐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