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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권(13화)
제5장 검마수련(劍魔修鍊)(2)
어쩐지 서글픔과 속상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미소에 단세천이 흠흠,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흑랑들과의 싸움이 끝나면 시호와도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을 테니 너무 자책하지는 마시오.”
“그랬으면 좋겠네요.”
“분명 그렇게 될 것이오.”
단호하게 말한 단세천이 탁자로 쓰고 있는 넓적한 돌 위의 그릇들을 집어 들었다. 실전 수련을 하러 가기 전에 미리 그릇들을 씻어 두려는 것이다. 전형적인 무인의 성격이었지만 그는 의외로 가정적인 남자였다.
‘그럼,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가방에서 흑철검을 꺼내 허리춤에 매단 단세천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서 구령산에서 만나 보았던 적들의 모습이 차례차례 스쳐 지나갔다. 흑랑, 여우(는 안 되겠고), 곰, 호랑이, 살쾡이, 뱀…….
잠시 동안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멀리 보이는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지난번에는 웅진봉(熊振峰)에서 곰을 상대했으니, 이번에는 오호봉(五虎峰)에 가봐야겠군.’
목적지를 정한 단세천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마치 제집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걸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것은 그가 이 근처의 지리를 잘 알고 있기에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구령산에 들어온 지 벌써 62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그는 한자리에 주저앉아 수련만 한 것이 아니라, 제법 구령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그 덕에 호연봉 근처의 지리는 물론이고, 다른 봉우리들의 지리도 어설프게나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오호봉에 가는 단세천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난 것이지만, 아직까지 궁오(宮五)나 칠루(七淚), 구령(九靈)에는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는지 확인해 본 적이 없구나.’
문득, 멀리 보이는 오호봉을 바라보던 단세천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구령산은 봉우리마다 각기 다른 이름이 있다. 그중 몇몇에는 동물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데, 그렇게 동물의 이름이 봉우리의 이름에 들어간 경우, 그 봉우리에서는 이름에 나온 동물이 자주 출몰했다.
예를 들어 호연봉 같은 경우, 여우 연못 봉우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에 여우들이 자주 나타났다. 게다가 정상에는 선술을 부리는 여우, 구미호 미호 선인이 살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흑랑 일족이 차지한 낭아봉도 마찬가지였다.
늑대 이빨 봉우리. 그 이름 그대로 낭아봉에서는 여러 늑대들과 흑랑 일족이 출몰하는데다가 우두머리인 대흑랑까지 있었다.
‘이른바 사냥터 나누기라는 것일 터.’
사냥터가 나눠진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챈 단세천은 실전 수련을 할 때마다 입맛에 맞는 상대를 골라 상대했다. 늑대를 상대하고 싶을 때에는 낭아봉에 갔고, 곰을 상대하고 싶을 때에는 웅진봉, 호랑이를 상대하고 싶을 때에는 오호봉에 간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궁오, 칠루, 구령은 호연봉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터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건 곧 어떤 몬스터가 나오고, 어떤 우두머리가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오호봉에 가고 있으려니 그 사실이 문득 생각난 그였다.
‘그러고 보니 오호봉의 우두머리도 본 적이 없구나.’
호연봉에 구미호가 있고, 낭아봉에 대흑랑이 있듯 다른 봉우리에도 그 봉우리를 지배하는 영수들이 있었다. 그중 단세천이 본 것은 웅진봉의 반달곰 일족의 우두머리인 만월대웅(滿月大熊), 묘안봉(猫岸峰)의 살쾡이 일족의 우두머리인 귀묘(鬼猫)까지 총 네 마리였다. 다른 우두머리들은 찾기 힘들거나, 혹은 너무 멀리 있어서 볼 수가 없었던 탓이다.
‘하기야, 지금의 나에게는 괜한 관심일 뿐이다.’
잠시 오호봉의 우두머리에게 흥미를 느끼던 단세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그의 힘으로는 한 봉우리의 우두머리인 영수들에게서 필승을 장담할 수 없었다. 실제로 싸우게 된다면 어찌어찌 이길 것도 같지만, 그렇다 해도 꽤나 큰 상처를 입게 될 터다.
물론 상처 입는 것은 두렵지 않다. 강한 존재와의 대결 중에 죽는다면 그조차 반가이 맞이할 수 있는 게 바로 단세천이란 존재니까.
문제는 우두머리와 싸워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면 미호 선인, 나아가서 시호와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호연봉을 돕겠노라고 미호 선인과 약속했다.
버리지 않겠노라고 시호와도 약속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이 두 가지 약속을 깨 버릴 만큼 그는 무책임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는 그의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크허허헝!
산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포효!
단세천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오호봉에서 출몰하는 호랑이였다. 노란색 털에 검은색 줄무늬가 그어져 있는 거대한 호랑이!
그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의 호랑이가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이번에는 꽤 빠르게 마주쳤군.’
순식간에 전투 상태에 들어간 단세천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검은색 눈동자가 차분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천천히 흑철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맑은 소리를 내며 검은색 검신이 드러났다. 흑철검을 완전히 뽑아 든 단세천이 철검십이식의 기수식을 취했다. 흑철검을 한 손으로 쥐고 바닥에 늘어뜨린 채, 가슴을 앞을 향해 당당하게 연 자세였다.
어찌 보면 빈틈투성이라 해도 좋을 허술한 자세다. 그러나 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단세천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결코 빈틈투성이의 허술한 자세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크르르르릉!
단세천의 자세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호랑이가 긴장된 기색을 비쳤다. 방금 전까지 평범한 ‘먹잇감’이었던 것이 완연한 적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리라.
크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던 호랑이의 근육이 일시지간 수축하더니, 그 커다란 몸체가 가볍게 일으켜 세워졌다.
크허허허허헝!
부우웅!
포효와 호랑이의 앞발이 공기를 가르며 휘둘러졌다. 두 발로 선 채 앞발을 휘두르는 호랑이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 경험해 보지 않는다면 감히 실감 못할 두려움이었다.
단세천은 살갗이 저릿하게 울리는 파공음에도 침착하게 반응했다. 그는 호랑이가 다가온 만큼 물러섰다. 그리고 그에 맞춰 흑철검을 위로 올려 베었다. 강맹한 호랑이의 앞발에 비해서 그의 검은 조촐해 보일 만큼 느릿했다.
그러나 느릿해 보이는 겉모습은 위장일 뿐, 그 안에 감춰진 힘은 가히 파천(破天)의 그것이다.
쩌어엉!
커헝?!
호랑이의 앞발과 단세천의 흑철검이 부딪치자 마치 쇠를 강하게 후려친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이어 호랑이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뒹굴었다. 흑철검과 부딪친 호랑이의 앞발이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간 것이다. 노란 털이 간간이 보이는 육편이 피와 함께 허공에서 산산히 흩어졌다.
느릿한 흑철검의 움직임에 담겨 있는 강력하기 그지없는 힘과 정면으로 충돌한 앞발의 말로였다.
크허헝!
부우웅!
분노한 호랑이의 다른 쪽 앞발이 허공을 갈랐다. 황급히 몸을 뒤로 기울여 앞발을 피해 낸 단세천은 감탄했다. 한쪽 발이 통째로 날아갔는 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공격이라니!
‘과연! 호랑이는 곧 죽어도 호랑이라 이건가!’
호랑이의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마주한 단세천이 길게 숨을 토해 냈다. 그는 이 호랑이를 제대로 상대할 마음을 먹었다. 아무리 미물이라고는 하나, 이 정도의 투지를 보여 주는 상대다. 같잖은 공격으로 승리를 취한다는 건 천생 무인인 그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런 치졸한 방식으로 승리를 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가 이 오호봉까지 온 건 오로지 실전 수련을 위해서지, 호랑이를 사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압!”
기합을 토해 낸 단세천이 흑철검을 휘둘렀다.
이전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는 흑철검. 그러나 그 안에 담겨 있는 힘은 호랑이의 앞발을 날려 버렸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크헝!
흑철검의 진중한 기세에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호랑이는 적잖이 긴장한 모습으로 절뚝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것이 호랑이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현재 단세천이 펼치는 검식은 철검십이식의 삼식, 철검대연(鐵劍大衍)이었다. 철검대연은 크게 넓히는[大衍] 검식! 그것을 피하려면 최소한 옆으로 움직였어야 한다. 뒤로 피하는 것은 철검대연의 기예에 말려들어 갈 뿐이다.
쉬이익!
흑철검이 그리던 궤도가 일순 격렬히 흔들리더니, 호랑이가 벗어난 범위만큼 넓혀졌다. 깜짝 놀란 호랑이가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느릿한 움직임에 담겨 있는 강력한 힘이 그물처럼 호랑이의 몸을 얽매었다. 호랑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것이 바로 철검십이식의 진정한 묘용이다.
상대의 빠름을 자신의 느림으로 제압하고[以慢制快], 상대의 강함을 그보다 더한 강함으로 압도하며[强於强壓], 상대의 흐름을 자신의 무거움으로 파쇄한다[敵流重破]!
단세천의 흑철검이 전개하는 철검십이식의 철검대연은 그러한 중검의 극의를 담고 있었다.
콰직!
흑철검은 정확하게 노렸던 곳을 후려쳐 호랑이의 머리통을 산산히 부숴 버렸다. 비틀거리며 움직이던 호랑이의 시체가 털썩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공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느릿하게 검을 회수한 단세천이 처음의 기수식을 취하며 숨을 골랐다.
단 이 검이었다. 고작 두 번의 검격만으로 오호봉의 호랑이를 해치운 것이다.
실로 대단한 무력!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떠올라 있는 건 명백한 실망이었다.
‘본래의 철검십이식은 더욱 느리고, 더욱 장중한 기세를 담은 중검이다. 그런데 나의 수준이 일천하여 고작 이 정도의 무거움밖에 담아내지 못하는구나.’
나직히 탄식하던 단세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철검십이식을 수련하기 시작한 지 고작 10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본격적인 수련을 한 것도 아닌데 너무 큰 결과를 바라는 것은 사치였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호랑이가 떨군 아이템들을 수거했다. 언제나 그렇듯 호랑이가 떨군 것은 가죽 한 장과 이빨 몇 개였다. 대강 가방에 집어넣은 그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허리를 곧추세워 다시금 철검십이식의 기수식을 취했다.
몸을 적당히 긴장시킨 그가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진득한 적의가 느껴졌다.
‘마지막 포효를 듣고 찾아온 건가.’
크르르르릉!
크헝, 크르릉!
수풀을 헤치며 나타난 것은 무려 세 마리나 되는 호랑이였다. 그것도 그가 방금 전에 죽인 호랑이보다 훨씬 거대한 덩치를 가진 호랑이들!
샛노란 안광을 흩뿌리는 여섯 개의 눈동자를 마주한 단세천은 서서히 수라기를 끌어올렸다. 단전에서부터 치솟아오른 뜨거운 기운이 몸 곳곳을 누비며 힘을 더했다.
‘기다려 줄 필요는 없겠지!’
“하아압!”
타악!
단세천의 몸이 가장 앞에 서 있던 호랑이를 향해 쏘아지듯 움직였다. 수라기로 인해 몇 배로 강화된 다리의 근력 덕분에 그는 순식간에 호랑이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는 호랑이가 채 반응도 하기 전에 흑철검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정확하게 호랑이의 중앙을 가르는 일격!
철검십이식의 이식, 철검기혜(鐵劍旗兮)였다.
그의 검은 조금도 빠르지 않았다. 아니, 호랑이에게는 우스울 만큼 느렸다. 그러나 호랑이는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것처럼 옴짝달짝도 못 하고 그가 휘두른 흑철검을 몸으로 맞이했다. 목 아래까지 올라온 흑철검을 바라보는 호랑이의 눈에 진한 공포가 어렸다.
호랑이가 흑철검을 피하지 못한 것은 간단한 이유였다.
흑철검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세가 호랑이의 몸을 사슬처럼 옭아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거억!
크허허헝!
부우웅!
단세천의 흑철검이 선두의 호랑이를 반으로 갈라 버린 직후, 오른쪽에 있던 호랑이의 앞발이 그를 노리며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