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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권(14화)
제5장 검마수련(劍魔修鍊)(3)
섬뜩한 바람 가르는 소리!
그는 흑철검을 옆으로 돌려 방어했다.
채애앵!
흑철검과 호랑이의 발톱이 맞부딪치며 쇳소리를 냈다.
‘굉장한 힘……!’
손아귀가 저릿저릿한 느낌에 단세천이 혀를 찼다.
그는 수라기를 한껏 끌어올려 두 팔로 보냈다.
카가가각!
호랑이의 힘은 강했지만 단세천의 힘은 그보다 더욱 강했다. 쇠와 쇠가 긁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호랑이의 몸이 천천히 뒤로 밀렸다.
하지만 호랑이에게는 다행히도 혼자가 아니었다.
쉬이익!
크헝!
“크읏?!”
옆구리를 노리는 다른 호랑이의 앞발!
단세천은 뒤로 튕기듯이 물러나는 것으로 그 공격을 피해 냈다. 그러나 대치 중인 상황이었기에 완전히 피하지 못해 발톱이 그의 옆구리를 할퀴었다.
촤악.
옆구리에 다섯 줄기의 상처가 생겼다. 하나 육신갑 덕에 가볍게 긁힌 수준이었다.
호랑이가 아쉽다는 듯 단세천의 피가 묻은 자신의 앞발을 핥았다.
‘방심할 게 못 되는군.’
발톱에 스쳐 피가 나는 옆구리를 슬쩍 살펴본 단세천이 수라기를 온전하게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치솟은 수라기는 그의 전신을 휘돌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가 쥐고 있는 흑철검으로 몰려들었다.
‘이건 또 무슨……?’
단세천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인상을 찌푸렸다. 수라기가 그의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움직이다니?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에 그는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그 짧은 시간에 벌써 그의 내공 중 일 할에 가까운 양이 흑철검에 주입되어 버렸다. 더 이상 고민했다가는 내공의 태반이 흑철검에 주입될지도 모른다. 이 현상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한 그는 재빨리 내공을 회수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도리어 흑철검에 주입된 내공의 양이 늘어나는 결과만을 가져왔을 뿐, 이렇다 할 방도를 마련하지는 못하였다.
우우우웅!
흑철검에 그의 내공이 이 할가량 주입된 때부터 흑색의 검신이 커다란 울음 소리를 토해 냈다. 일찍이 수련 중에 몇 번이나 들었던 검의 울음소리, 검명이었다.
‘주화입마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 현상에도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차라리 온전히 따라 보자.’
재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단세천이 내공을 회수하려는 행동을 멈추고, 자신의 내공의 전부를 흑철검으로 밀어 넣었다. 7,000에 달하는 내공을 모두 주입해 버린 것이다.
그가 내공을 전부 쏟아부은 순간,
쩌엉─!
무언가 깨져 나가는 소리가 났다. 흑철검이 깨진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숙한, 더 본질적인 무언가를 가로막는 ‘벽’이 허물어진 느낌이었다.
기분 좋은 상쾌함이 단세천의 전신을 감싸고, 그의 눈앞으로 메시지 창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수라마공]의 숙련도가 4성이 되었습니다.
경지가 ‘이류(二流)’에서 ‘일류(一流)’로 승급하였습니다.
특정 조건을 만족시켜 수라마공상의 특수 기술 ‘업화검기’가 생성되었습니다.
‘업화검기(業火劍氣)?’
단세천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의 흑철검에서 검은 기운이 화륵, 솟아났다. 동시에 그가 이제껏 밀어 넣었던 내공이 나갈 곳을 찾았다는 듯 맹렬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솟아난 검은 기운이 흑철검의 검신을 휘감은 채 마치 불꽃과 같이 타올랐다.
수라기로 이루어진 불타오르는 검기, 업화검기였다.
“호오……!”
나직한 감탄을 터뜨린 단세천은 업화검기에 휘감긴 흑철검을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화륵, 하는 소리를 내며 검은 불꽃[黑炎]의 잔상이 마치 꽃잎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그것은 마치 지옥에서 흩날리는 불꽃과 같아서 어째서 이 검기의 이름이 업화검기인지 쉽게 납득이 갔다.
단세천이 흑철검에서 업화검기가 타오르는 모습이 사뭇 위압스러웠는지 호랑이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위축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순간의 틈을 노려 달려들 것처럼 굴더니, 지금은 슬쩍 뒤로 물러나는 모습까지 보이는 게 아닌가.
‘실전 수련은 이만 끝내야겠군. 지금부터는…….’
단세천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것은 현대의 무술가들이 검마소(劍魔笑)라 부르며 두려워 마지않는 절망의 웃음이었다.
“…업화검기를 시험하겠다!”
그날.
오호봉의 호랑이들에게 사신이 강림했다.
* * *
김지환은 위저드 사의 산하 기업 중 하나인 캡슐 컴퍼니의 직원이었다. 직원이라고 해 봤자 직접 발로 뛰어 캡슐을 배달하고, 집에 설치해 주는 말단 중의 말단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생활에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비록 말단이고 캡슐 컴퍼니의 일이 약간 빡세기는 했지만 월급이 많은데다가, 때때로 성과급도 상당히 많은 양이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캡슐 컴퍼니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환상 연대기를 무료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그를 만족시켰다.
오늘도 그는 캡슐을 설치하기 위해서 한 집을 찾았다.
“오오, 장난 아닌데? 죽이는 집이구만!”
김지환은 SPC(스마트 패드 컴퓨터, Smart Pad Computer)에 떠오른 주소를 확인하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의 앞에는 그야말로 그린 듯한 동양식 가옥이 있었다. 고급스런 재질로 만들어진 가옥과 그 주변을 빙 둘러 조성되어 있는 정원. 정원 안에는 관상용이라 생각되는 물고기가 유유자적 헤엄쳐 다니는 작은 연못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런 집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김지환이 피식 웃었다. 이 정도 집이라면 그 가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비쌀 것이다. 보통의 메탈 빌딩(Metal Building)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옥의 경우에는 천문학적인 가격이라는 것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잠시 자신의 통장 잔고를 떠올려 보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헛된 꿈이지, 헛된 꿈.’
“일이나 하자!”
SPC의 주소와 가옥의 주소가 일치한 것을 확인한 그는 문 옆에 달려 있는 벨을 눌렀다.
띵─동!
무려 몇백 년 동안이나 기본 알림음으로 사용되어 온 소리가 집 내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찰칵 소리와 함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반갑습니다. 캡슐 컴퍼니의 김지환이라고 합니다.”
―캡슐 컴퍼니? 아! 혹시 위저드 사에서 보낸 캡슐 두 대를 설치하러 오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약 30초 즈음 흘렀을까.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투명한 막, 배리어(Barrier)의 일부분이 사라졌다.
그것을 확인한 김지환은 곧장 자신의 카트에 캡슐 두 개를 얹은 다음,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라졌던 배리어가 다시 생성되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그를 맞아 준 것은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하얀색 저고리와 붉은색 치마로 된 개량 한복을 입고 있는 여성이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아, 아, 예! 아닙니다! 일이니까요.”
멍하니 여성을 바라보던 김지환이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뭐 하는 꼴불견인지!
그는 고개를 한 번 세차게 흔들었다. 그제야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가 하는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여성이 빙긋 웃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가벼운 행동에도 무시하지 못할 기품이 풍겨져 나오는 것이, 무슨 명문가의 안주인을 보는 듯했다(그는 몰랐지만, 실제로 그녀는 명문가의 안주인이었다).
“캡슐을 설치할 만한 곳을 알려 드릴 테니 따라오시지요.”
“네, 네!”
김지환은 홀린 것처럼 여인의 뒤를 따랐다. 여인은 허리를 곧게 편 상태로 자그마한 보폭을 유지하며 걸었는데, 그런 모습에서 차라리 위엄이라 부를 만한 고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그는 약간 뒤떨어진 채로 여인을 따라가며 은근슬쩍 살폈다. 여인은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비녀로 묶고 있었는데, 머리카락 사이로 새하얀 피부의 목덜미가 은근히 드러나 그의 심장을 쿵쾅쿵쾅 뛰게 만들었다.
반쯤 입을 벌린 채 여인을 훔쳐보던 그가 헉! 소리를 냈다.
‘정신 차려라, 김지환!’
김지환이 자기자신을 질책하는 사이, 걸음을 멈춰 선 여인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여인의 뒤를 따르고 있던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여인이 입을 열었다.
“여기예요.”
“…예? 아, 이곳입니까?”
“예, 이곳이랍니다.”
그의 멍청하기까지 한 반문에 여인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그는 여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캡슐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이 문득 물음을 던졌다.
“설치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아마 이, 삼십 분이면 될 겁니다.”
“흐음, 그런가요? 그럼 전 거실에 가 있을게요. 혹시 방해라도 되면 안 되니까요.”
김지환은 순간적으로 ‘절대 방해 안 됩니다!’ 하고 소리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방해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탓이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달칵.
여인이 조용한 움직임으로 문을 닫고 나갔다.
그제야 겨우 혼자 있게 된 김지환이 길게 한숨을 토해 내고는 캡슐 설치에 집중했다.
철컥. 위이잉―
“후우, 다 끝났다.”
25분 후, 캡슐 설치를 마친 김지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여인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음료로 보이는 액체가 담긴 컵이 한 잔 올려져 있는 상태였다.
“벌써 설치가 끝난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냥 가시기 뭐하시니, 음료라도 한 잔 하고 가세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얼굴을 붉히던 김지환은 이내 정색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집을 벗어났다. 배리어를 통과해 완전히 집을 빠져나온 그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실로 복잡한 의미가 담긴 한숨이었다.
김지환이 떠난 가옥의 안.
캡슐이 설치된 방에 두 명의 여성이 보였다. 한 명은 방금 전에 김지환을 안내해 준 개량 한복을 입은 여인이고, 다른 한 명은 남색의 검도복을 입은 소녀다.
개량 한복을 입은 여성은 정갈하고 다정한 모습이었다. 비녀로 머리를 틀어 올려 묶은 모습은 일견 뇌쇄적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남색 검도복을 입은 소녀는 지극히 발랄하고 활동적인 모습이었다. 소녀는 꽤 긴 검은색 머리카락을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고 있었다.
두 명의 여성은 전혀 다른 옷과 분위기를 갖고 있었지만, 그 생김새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조금 나이 차이가 있는 자매로 보았을 정도로.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색 검도복 소녀였다.
“헤에, 아빠 거랑 똑같은 거네.”
“플레이 운영자용이라고 하던데? 잘은 모르겠지만, 보통의 캡슐보다 많은 기능이 달려 있다고 하더구나.”
“그래요?”
즐거움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대답한 소녀는 이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천천히 여인을 돌아본 소녀가 말했다.
“그보다…… 엄마.”
“응, 왜 그러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소녀의 말을 들었다면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개량 한복을 입은 여인의 얼굴은 아무리 많이 쳐줘도 이십대 후반, 본격적으로 잘만 꾸민다면 이십대 초반으로도 보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녀의 나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열여섯.
그렇다면 여인이 소녀를 낳았을 때가 초등학교 때라는 것인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여인이 누구인지─정확하게는 누구의 아내인지─알게 된다면 그런 의문도 해소할 수 있었다.
여인의 이름은 정시아.
단세천의 아내이자, 검마단가의 안주인이 바로 그녀였다.
남편과 같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동안을 갖고 있는 그녀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일곱. 삼 년만 있으면 오십 살이 되는 아줌마였다.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당연한 이치로, 정시아를 ‘엄마’라 부른 소녀는 단세천과 정시아의 딸인 단세아였다.
“아까 다 봤어요.”
“어머, 뭘 봤다는 건지 이 엄마는 모르겠는걸?”
“흥! 발뺌할 생각 말아요. 순진한 녀석 하나 놀려 먹는 거 내가 못 봤을 줄 알아요?”
소녀, 단세아의 말에 정시아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