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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권(16화)
제6장 검마사투(劍魔死鬪)(2)
단세천의 흑철검은 걸리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며 광포하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멈췄을 때, 아까까지만 해도 흑랑이었을, 그러나 이제는 형체조차 분명히 알아볼 수 없는 육편 조각이 바닥에 철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십여 마리에 이르는 흑랑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전멸에 이르고야 만 것이다.
실로 가공한 무력이었다.
“이제 괜찮다. 흑랑들은 없단다.”
“히끅, 힝! 세천, 세천! 엄마가……!”
“미호 선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단세천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물론 그는 미호 선인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다거나 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미호 선인은 시호의 어머니. 그녀가 죽으면 시호가 얼마나 슬퍼할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호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막 커다란 검은 늑대랑 싸웠어! 근데 히잉, 막막 상처 나고! 엄마가 세천한테 가라 그랬어!”
“미호 선인은 지금 어디 있느냐?”
“훌쩍. 제일 위에!”
제일 위라 함은 호연봉 정상을 이야기한다.
단세천은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떠는 시호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곧장 시호를 안은 그대로 바람처럼 내달렸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뛰어넘는 그의 뒤로 검은 불꽃이 살짝살짝 휘날렸다. 일급의 경신공인 수라행이 극도로 발휘되었다는 표시였다.
시호를 그곳에 두고 오지 않은 것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였다. 혹시라도 흑랑들이 더 있다면 시호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데리고 있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이를 악물고 달리던 그는 속으로 소리쳤다.
‘시호를 두고 죽을 생각은 아닐 것이라 믿소, 미호 선인!’
* * *
‘이대로 끝나는 건가…….’
“아아아…….”
미호 선인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대흑랑을 보며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현재 그녀의 몸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새하얀 소복은 이곳저곳이 찢어진 채 붉게 물들어 있고, 언제나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된 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전신에는 상당한 상처가 나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상으로 보이는 것은 그녀의 뽀얀 등을 가로지르는 세 줄기의 굵직한 상흔이었다.
대흑랑의 발톱에 할퀴어진 듯 보이는 그 상흔에서는 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크르르르릉!
대흑랑이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으르렁거리며 보란 듯이 자신의 발톱을 핥았다. 대흑랑의 발톱에는 붉은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미호 선인의 것이었다.
물론 대흑랑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대흑랑의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흑색 털은 검게 그을려 고불고불해진 상태였고, 한쪽 눈에는 정확히 눈동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아마 앞으로는 평생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대흑랑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어떤 상처를 입었든 그는 승리했고, 미호 선인은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흑랑에게서 시선을 돌린 미호 선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투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명백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여우족의 열세였다. 흑랑족은 아직 수십 마리는 더 남아 있는 데 비해 여우 족은 기껏해야 열댓 마리만이 남아 힘겹게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맞서 싸우고 있다기보다는 겨우겨우 버텨 내는 쪽에 가까웠다.
‘아아, 이렇게 여우 일족은 끝이란 말인가?’
더 이상 동족이 죽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미호 선인은 눈을 감았다. 도저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누천년을 내려오는 역사를 지닌 여우 일족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
‘아니, 아니야. 우리 일족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녀는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 시호!
그 아이만 있다면 여우 일족은 결코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언제고 반드시 부활하여 호연봉의 주인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그녀의 단 하나뿐인 소망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대흑랑에게 후유증이 큰 상처를 남겨야만 해. 시호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결심을 내린 미호 선인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이를 악문 그녀는 양손을 모아 결인을 맺으며 진언을 읊었다.
“라하 차크리 쿤바르다르타!”
기이한 울림을 담은 어밀(語密)이 울려 퍼졌다. 직후, 미호 선인의 양손에서 조그마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그녀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주력 도술인 청화령(靑火靈)이었다.
그녀의 양손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을 본 대흑랑이 커헝, 하고 울부짖으며 빠르게 달려들었다. 여지껏 대흑랑은 청화령에 몇 번이나 낭패를 보았었다. 털이 완전히 그을린 것은 물론이고, 중간 중간 화상까지 입었다.
그런 만큼 저 작디작은 청화령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대흑랑은 청화령에 당해 줄 생각 따위는 결코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호 선인이 대흑랑보다 약간 더 빨랐다.
“리히크 차타!”
커허허허헝!
화르르륵!
미호 선인이 일갈과 함께 손을 내뻗자 푸른 불길이 허공을 불태우며 대흑랑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청화령을 그대로 뒤집어쓴 대흑랑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먼지를 일으켜 불꽃을 꺼 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영성이 존재하는 불꽃인 청화령이 그리 쉽게 꺼질 리 만무했다. 청화령은 끊임없이 대흑랑을 괴롭혔다. 푸른 불꽃에 휩싸인 대흑랑의 몸 곳곳에 적지 않은 화상이 만들어졌다.
그 와중에 적잖은 고통이 있었는지 대흑랑의 하나뿐인 외눈에 실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커허허허헝!
분노한 대흑랑의 포효!
모든 사술을 배제하는 음공인 사자후(獅子喉)보다는 못하지만, 적어도 미호 선인이 죽을힘을 다해 펼친 청화령 정도는 깰 수 있는 흑랑후(黑狼喉)였다.
대흑랑의 포효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자 쩌엉! 하고 청화령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쿨럭!”
두 손을 결인한 채 청화령을 조종하던 미호 선인이 왈칵 피를 토했다. 한 사발이나 될 것 같은 검게 죽은 피가 바닥에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대흑랑을 괴롭히던 청화령이 푸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도술의 주체인 미호 선인의 도력이 모두 소진되어 자연히 도술이 해제된 것이다.
“하아, 하아!”
‘여, 여기까지인가…….’
털썩!
미호 선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다. 그녀는 한없이 방대했던 아나하타 차크라(Anahata Chakra)가 텅 비게 느껴질 정도의 도력 소모와 전신에 난 상처들, 그리고 너무 많은 출혈로 인해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그녀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사이, 비로소 승리를 확신한 대흑랑이 어슬렁거리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대흑랑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가물거리는 시야에 앞발을 들어 올리는 대흑랑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끝이었다.
저 앞발이 그녀의 머리를 산산이 부숴 놓을 테고, 그럼 그걸로 모든 일은 끝이 날 것이다.
호연봉(狐淵峰)은 낭연봉(狼淵峰)으로 변하리라.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든 여우들이 죽고 그 자리를 흑랑이 대신하게 되리라.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한줄기 미련이 남았지만, 이내 체념하고 만 미호 선인은 눈을 감았다.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마지막으로 시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미호 선인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감돌았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이전처럼 냉정하게 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며 사랑해 줄 텐데. 그녀는 딸에게 다정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했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부우웅! 콰직!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직후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진다.
커허허헝!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것이 기뻤던 것일까?
대흑랑이 호연봉 전체에 울려 퍼질 만큼 커다랗게 포효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그것은 승리의 포효가 아니라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어…… 째서?’
어째서 아직까지 공격이 오지 않는 거지?
의문이 생긴 미호 선인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눈을 뜬 그녀가 본 것은 대흑랑이 아닌, 상처투성이의 등이었다. 시야를 가득 메울 것처럼 크게 느껴지는 등에서 시선을 뗀 그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고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내뱉었다.
“아아……!”
“괜찮소?”
단세천이었다.
호연봉 중턱에서부터 뛰기 시작한 그가 간신히 시간에 맞춰 도착해 그녀를 구해 낸 것이다.
단세천을 멍하니 바라보던 미호 선인이 으르렁대는 대흑랑의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왜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 왔느냐, 혹은 대흑랑에게서 이길 자신이 있느냐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렇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한 질문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딸에 대한 것이었다.
“시, 시호는 괜찮은 건가요?”
“엄마아! 으아앙!”
“시호야!”
단세천의 품에 안겨 있던 시호가 폴짝 뛰어내려 미호 선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미호 선인은 재빨리 시호를 품속에 안아 들었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
미호 선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호와 함께 물러나 있으시오.”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와 미호 선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흑철검이라는 이름의 검을 뽑아 든 단세천이 대흑랑을 바라보며 살기를 피워 올리는 것이 보였다.
그가 대흑랑을 이길 수 있을까?
그녀가 지금까지 보아 온 단세천이라면 승산이 있기는 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강해져만 가는 단세천의 모습은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렸으니까, 지금의 무력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대흑랑은 그녀 자신과 싸우느라 꽤 깊은 부상까지 입은 상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승산은 높았다.
그러나 단세천도 시호를 안고 호연봉 정상까지 오르느라 꽤나 지쳐 있는 상태다. 경공을 사용하며 달려왔으니 내공의 소모도 적지 않을 터. 결국 승률은 반반이다.
입술을 꼭 깨문 미호 선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 승률을 끌어올려야 해!’
입술을 꼭 깨문 미호 선인이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곧 빠져나온 그녀의 손에는 하나의 구슬이 들려져 있었다. 사방팔방으로 칠채보광을 내뿜는 구슬은 척 보아도 범상치 않은 물건인 듯했다.
그러나 구슬에는 금이 쩍쩍 가 있는 상태였다. 미호 선인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롭기 그지없는 구슬을 암담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만약 여기서 이것이 깨진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이야기다.
잠시 고민하던 미호 선인은 이내 마음을 굳히고 구슬을 단세천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가져가세요, 은공.”
“이것은?”
“여우옥이라 합니다. 비록 이런 상태라도 한 번 정도는 은공의 목숨을 지켜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템 정보
이름 : 여우옥[狐玉]
등급 : 보물 급(寶物級) / 일급(一級)
구분 : 보구(寶具)―구슬[玉] / 영약(靈藥)
내구도 : 7/500
특성 : 피격 시 낮은 확률로 호신보광이 발동.
/ 복용 시 내공 6,000 상승.
설명 : 구미호가 부리는 술법의 근원이자 선도(仙道)를 걷는 구미호만의 여의주(如意珠)다. 무기의 역할과 동시에 내단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 만약 이를 취할 시에는 일 갑자에 이르는 내공을 얻을 수 있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아이템의 정보를 읽은 단세천은 잠시 미호 선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모종의 결심이 선 듯 단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자신이 쌓은 선도의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다니, 나의 책임이 실로 막중하구나.’
단세천은 느릿하게 미호 선인이 내민 여우옥을 받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