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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권(17화)
제6장 검마사투(劍魔死鬪)(3)
그제야 약간 밝아진 얼굴이 된 미호 선인이 살포시 웃었다.
“꼭 이기세요.”
“걱정 마시오. 다 잘될 것이외다.”
언젠가 했던 말을 입에 올리며, 단세천이 미호 선인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더없이 든든하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그런 단세천의 태도에 마음이 놓인 미호 선인이 시호를 품에 꼭 껴안은 채로 뒤로 물러났다. 흑랑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여우들이 그녀의 곁으로 모였다.
어느새 주변 전투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움직이고 있는 이는 단세천과 대흑랑뿐!
호연봉 정상에 묵직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자야말로 진정한 승리자라는 사실을!
“자아, 시작하자!”
커허허허헝!
단세천의 외침과 대흑랑의 포효.
두 가지 소리가 어우러지며 마지막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카가가가각!
대흑랑의 발톱과 단세천의 흑철검이 격렬하게 맞부딪친다. 밝은 불꽃이 화악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곧장 다음 부딪침이 시작되었다.
카가각!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음이 시끄럽게 호연봉을 울린다.
강철조차 잘라 버리는 업화검기가 빈틈없이 단세천의 검을 휘감고 있었으나, 대흑랑의 발톱 역시 그에 못지않는 예기와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낱 발톱이 이렇게 단단하다는 것은 대흑랑이 그만큼 대단한 영수라는 뜻이리라.
이대로는 안 되겠다 느낀 단세천은 몸을 비틀었다. 오른손에 들린 흑철검이 몸의 뒤틀림에 따라 뒤로 물려진다. 갑자기 없어져 버린 지탱점 때문에 대흑랑이 당황할 때, 그는 재빨리 원상태로 허리를 뒤틀며 흑철검을 쏘아 냈다.
철검십이식의 일식, 철검개화(鐵劍開花)!
쉬이이이익― 하고 바람을 꿰뚫는 소리가 대흑랑의 귀에 들려왔다. 대흑랑은 본능적으로 한쪽 다리를 굽히며 몸을 숙였다.
촤아악!
본래 미간을 노렸을 흑철검이 대흑랑의 옆구리에 긴 상처를 만들었다. 대흑랑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커헝!
‘빗나갔군……!’
회심의 일격이라 할 수 있는 공격이 빗나갔지만 단세천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대흑랑을 응시하며 뻗었던 흑철검을 되돌렸다.
그때 드러난 찰나의 틈! 기회를 잡은 대흑랑이 훌쩍 뛰어올랐다. 대흑랑의 거대한 덩치가 하늘에 떠오른 태양을 가리며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거대한 덩치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단세천은 갑작스런 변칙적 공격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한 번 공격을 실패한 이상, 분명히 반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덕이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그는 대흑랑이 뛰어내리는 지점에 맞춰 흑철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카가가각!
크르르릉!
별 이득을 보지 못한 대흑랑이 으르렁거리며 훌쩍 뒤로 물러났다. 나름대로 완벽한 틈을 노렸는데 실패했기 때문인지, 대흑랑의 움직임이 더욱 신중해졌다.
공격을 방어해 냈으니 이제 공격을 할 차례! 단세천의 눈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파악!
땅을 박찬 단세천이 곧장 대흑랑에게 달려들었다.
한순간, 몰입 동화율이 극도로 높아지며 온 세계가 느려진 것 같은 감각이 그를 엄습했다. 현실에서 사투를 벌이면 언제나 겪어 왔던 감각이다.
답답할 정도로 느려진 세계 속에서 단세천은 흑철검을 들어 대흑랑에게 찔러갔다. 온몸을 던지며 펼치는 강렬한 찌르기!
철검십이식의 오식, 철검화강(鐵劍火綱)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흑랑도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커…… 허…… 헝!
느려진 세계 때문에 단세천에게 대흑랑의 포효는 괴이하게 들리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훌쩍 뛰어오른 대흑랑의 앞발 공격은 위협적이기 그지없었다.
단세천은 느려진 세계 속에서도 상당히 빠른 대흑랑의 움직임에 감탄하며 흑철검을 회수해 방어했다.
채쟁!
흑철검과 대흑랑의 발톱이 맞부딪치며 쇳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느려졌던 세계가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대치 상태가 되자 극도로 끌어올려졌던 몰입 동화율이 약간이나마 떨어진 탓이다.
‘놀라운 반사 신경이다!’
대흑랑의 일격을 방어해 낸 단세천은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철검화강은 철검십이식에 하나뿐인 쾌 요결을 사용한 찌르기다. 그런 만큼 무거움은 다른 검식에 비해 뒤질지 몰라도, 그 속도만큼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그런데 대흑랑은 철검화강을 막아 냈을 뿐만 아니라, 되레 반격까지 해냈다. 만약 방금 전에 그가 철검화강의 검식으로 찔러 들어갔다면 허공만 찔렀을 테고, 그대로 대흑랑의 앞발에 머리통이 산산이 부서졌을 터다.
그건 곧 대흑랑이 이 정도 속도를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다는 뜻!
그것이 단세천이 대흑랑에게 감탄하는 점이었다.
‘역시 미물이라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니로구나.’
단세천이 그렇게 생각할 때, 대흑랑이 기습적으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다. 그는 재빨리 몸을 틀었다.
카득!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머리통이 있던 자리를 대흑랑의 송곳니가 물어뜯었다. 동시에 잘려 나간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나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간발의 차로 공격에 실패한 대흑랑이 아쉽다는 듯 혀로 자신의 이빨을 핥았다.
크르르릉.
‘위험했군.’
단세천의 등 뒤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참으로 위험했던 순간이다. 갑자기 늘어난 살기를 느끼고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지 않았더라면 목이 떨어졌을 공격이다.
오싹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달렸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싹텄다.
그래서 단세천은 웃었다.
“좋구나!”
커허허헝!
단세천이 원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목숨을 건 실전! 전력을 다한 대결!
찰나에 올려진 생사의 간극, 순간을 나누는 혼신, 방심하면 죽는다는 긴장감과 오싹한 전율, 그리고 그 이상으로 강렬한 투쟁심! 비록 만전의 몸 상태가 아니지만, 그딴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랜 시간 차갑게 잠들어 있던 단세천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그것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수라기 또한 뜨겁게 달아오르며 그의 전신을 누볐다.
가벼운 발길질로 대흑랑을 떨쳐 낸 단세천은 흑철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마구잡이로 보일 뿐, 실제로는 철저하게 절제된 검격이었다.
난잡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결코 검로가 겹쳐지는 일 없이 철저할 만큼 적을 베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계산적인 검식!
철검십이식의 십식, 철검난무(鐵劍亂舞)였다.
카가가가각!
대흑랑은 절제된 흉포함에 처절하게 유린당했다. 흑철검의 칼날이 대흑랑의 전신에 자잘한 상처부터 시작해, 허연 뼈가 드러날 정도로 커다란 상처들을 만들었다.
커허허헝!
상처 입은 대흑랑의 포효!
그 포효에 담긴 기이한 압력에 단세천이 움찔한 순간, 빠르게 휘둘러진 대흑랑의 앞발이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퍼어억!
“커허…… 억!”
단세천의 몸이 확 튕겨져 나갔다. 대흑랑의 앞발 공격은 그만큼 강력했다. 맞기 직전에 왼팔을 들어 막기는 했지만, 워낙 힘 차이가 큰 터라 그는 공중에 붕 뜬 채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낙법을 펼쳤다. 그러나 몸에 남아 있는 대흑랑의 힘 때문에 낙법이 불안정하게 펼쳐진 터라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멀찍이 굴러가던 단세천은 바위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겨우 몸이 멈춘 그가 커헉! 비명을 지르며 소량의 피를 토해 냈다.
“크으으으…….”
‘장…… 난이 아니군!’
갈비뼈에 금이 가기라도 한 듯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직격당하지 않은 왼쪽 갈비뼈가 이 모양이니, 직접적으로 대흑랑의 앞발을 막은 왼팔은 완전히 부러졌음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발톱에 찢겨 나가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단세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흑랑의 공격을 받는 순간에 몸을 앞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대흑랑의 발톱에 여러 조각으로 갈가리 찢겨 나가 죽었을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현재 그의 동화율은 백 퍼센트! 끔찍한 고통이 그의 정신을 침범하려 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다!’
이를 악문 단세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작 이 정도 고통에 굴복할 만큼 그의 정신은 약하지 않았다!
그는 힘겹게 흑철검을 들어 올려 대흑랑에게 겨눴다. 바위에 부딪치며 찢어진 것인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자 오른쪽 눈의 시야가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인간도, 짐승도…… 모두가 가릴 것 없이 처절한 광경이었다.
부러졌음이 확실해 보이는 축 처진 왼팔과 찢어진 이마에서 줄줄 흐르는 피! 입가에도 한 줄기의 혈흔이 보인다. 아마 내상의 흔적이리라. 단세천의 상처는 실로 심각했다.
대흑랑의 상처도 그에 못지않았다. 미호 선인의 여러 도술에 당한 상처와 단세천과의 사투에서 입은 크고 작은 상처가 전신을 빼곡히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들에서 흐르고 있는 붉은 피! 대흑랑이 아니라 대혈랑(大血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러나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처임에도 그들은 결코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싸움에는 목숨 이상의 것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자존심!
단세천에게는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고, 대흑랑에게는 우두머리로서의 자존심이 이 싸움에 걸려 있었다.
이 싸움에서 도망쳐 자존심을 잃을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단세천과 대흑랑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후우, 후우…… 결판을 내자, 대흑랑!”
크르르르릉! 커허헝!
대흑랑이 포효를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그에 맞서 단세천도 흑철검을 대흑랑의 미간을 향해 찔러 넣었다. 강하게 내려밟은 진각의 힘이 고스란히 담긴 찌르기였다.
철검십이식의 육식, 철검광도(鐵劍狂濤)였다!
흑색의 칼날은 허공에 검은색 불꽃으로 이루어진 궤적을 그렸다. 보는 순간 도달해 있다고 말해도 좋을 속도! 날카로운 흑철검의 검끝이 대흑랑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쉬이이익!
‘먼저 닿는다……!’
단세천은 자신의 승리를 예감했다. 그런 그의 예상대로 흑철검이 먼저 대흑랑의 미간에 닿았다.
하지만 그도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으니……!
빠각!
기괴한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부러진 흑철검의 칼날이 멀찍이 날아갔다. 흑철검이 대흑랑의 미간에 닿는 순간, 백 일 단련과 실전 훈련을 거치며 약해져 있던 부분이 부러져 버리고 만 것이다!
끝났다!
대흑랑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만약 늑대에게 표정이 있다면, 분명히 ‘미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대흑랑은 확신했다. 가장 위협적이었던 적의 발톱이 부러진 이상, 자신의 승리는 더없이 확실하리라고!
이긴다! 그리고 자신은 두 개의 봉우리를 다스리는 우두머리가 된다! 더없이 위대한 우두머리가!
대흑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런 대흑랑의 공격은 단세천에게 닿지 않았다.
화악, 하고 단세천의 주변에 퍼진 일곱 빛깔의 빛이 마치 호신강기처럼 단세천을 감쌌기 때문이다.
여우옥의 효능인 호신보광이 발동합니다!
일곱 빛깔의 빛이 단세천의 몸을 감싸고 난 뒤, 그의 눈앞으로 떠오른 메시지였다.
콰가가각!
한순간 대흑랑의 발톱이 호신보광의 위를 훑고 지나간다.
위태위태하게 그것을 버텨 내던 호신보광은 결국 쩌정!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여지없이 산산이 깨어지며 흩어져 버렸다. 동시에 대흑랑의 발톱이 단세천을 향해 짓쳐들었다.
여우옥의 호신보광이 벌어준 시간은 고작 3, 4초 남짓.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단세천에게는 넘치도록 충분했다.
“하아아아앗!”
커다란 기합을 내지른 단세천은 대흑랑에게로 달려들었다.
대흑랑 또한 그를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