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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권(18화)
제6장 검마사투(劍魔死鬪)(4)


그러나 단세천을 향해 달려드는 대흑랑은 여유가 있었다. 이미 적의 발톱은 부러져 나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흑랑은 방심했고, 그 방심이 승패를 갈랐다.
푸우욱, 콰득!
살을 쪼개는 소리,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
잠시 단세천과 대흑랑의 몸이 멈췄다. 그리고 이내 대흑랑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푸욱!
단세천은 대흑랑의 미간을 꿰뚫고 있던 오른손을 빼냈다. 혀를 쭉 빼어 문 대흑랑의 시체가 단세천의 손이라는 지탱점을 잃자 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한순간의 방심이 목숨을 앗아가거늘, 고작 검이 없다고 내가 약해질 줄 알았다면 큰 착각이라고 말해 두마.”
이미 죽은 이에게 말해 봐야 공염불일 뿐이지만.
단세천은 피식 웃었다.
“즐거웠다, 대흑랑이여.”
단세천은 한때나마 자신의 ‘적수’로서 존재했던 이의 시체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나름대로의 예의 표현이었다. 그런 그의 손은 검은 불꽃처럼 보이는 기운이 빈틈없이 휘감고 있었다.
언제나 그의 검에서 타오르고 있던 업화검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검기는 ‘검에 두르는 기운’이어서 검기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검처럼 날카로운 기운’이기에 검기라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업화검기는 검뿐만이 아니라, 수라기가 소통 가능한 모든 곳에서 발현해 낼 수 있었다. 지금 단세천이 손에 업화검기를 두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단세천은 검이 없어도 충분히 강한 무인이다. 검으로 경지에 오른 무인을 이야기할 때, ‘손에 검이 없어도 마음속에 검을 품고 있으니[手中無劍 心中有劍], 그것은 곧 검이 있는 것[之則有劍]과 같다’는 말이 있다.
보통 심검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지만, 검을 들지 않고도 검을 쓸 때만큼 강한 무인을 의미하는 말로도 쓰이고는 한다.
단세천이 바로 그런 무인이었다. 손에 검이 없다 해도 마음속에 검을 품었으니, 검이 있는 것과 같을 만큼 강한 무인!
그런 것도 모르고 검이 부러졌다고 한껏 방심했으니, 어찌 보면 대흑랑이 죽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쉽군…….’
단세천은 씁쓸한 눈으로 흑철검을 내려다보았다. 반으로 부러져 버린 흑철검이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지잉― 하고 떨렸다.
딱히 흑철검에 엄청난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흑철검 정도는 눈 아래로 볼 검들이 몇십 자루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신과 ‘소통’했던 검이 부러졌다는 사실은 그에게 적잖은 씁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너와도 즐거웠다, 흑철검이여.’
부러진 흑철검의 검날과 함께 흑철검을 가방에 집어넣은 단세천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부러진 것은 부러진 것. 이미 지나간 일에 쓸데없이 마음을 쓸 이유는 없다.
단세천은 대흑랑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혀를 쭉 빼물고 죽었지만, 금방이라도 되살아나 이빨을 들이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는 승리했으니까.
‘지금은 그저, 이 기분을 만끽하도록 하자.’
대흑랑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 때문에 반은 붉게, 또 반은 푸르게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핫! 하하하핫!”
그것은 무언가를 얻어 낸, 성취한 자의 웃음이었다.

* * *

대흑랑이 죽은 후, 호연봉에 있던 흑랑들은 자신들의 봉우리인 낭아봉으로 도망쳐 버렸다. 아마 그들은 이후로 다시 대흑랑 같은 우두머리가 나오기 전까지 다른 봉우리들보다 좁은 영역을 가진 채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미호 선인의 선택에 따라서 아예 봉우리 자체를 빼앗겨 버릴지도 몰랐다. 비록 우두머리가 시켰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호연봉을 침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미호 선인이 봉우리를 빼앗아도 뭐라 할 말이 없으리라.
물론 그건 단세천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죽다 살아난 미호 선인은 전과 달리 시호에 대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철저하게 ‘후계자’를 보는 식으로 시호를 대했다면, 이제는 온전히 ‘딸’을 대하는 어머니로서 시호를 대했다.
갑자기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당황하던 시호였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미호 선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언제나 냉정했던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다는 게 기뻤는지 처음 삼 일간은 단세천조차 내팽개친 채 미호 선인의 품 안에서 지낼 정도였다.
대흑랑과의 사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단세천은 100일째가 될 때까지 사투의 기억을 되살리며 명상 수련을 했다. 때때로 시호와 미호 선인과 함께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면 거의 동굴 밖에 나오지 않고 지냈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단세천이 호연봉에 오른 지 백 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단세천은 거의 걸레에 가깝게 변해 버린 초보자용 옷을 벗고, 가방에서 흑의 무복을 꺼내 입었다. 흑색의 무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무림인다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니, ‘무림인’이라기보다는 ‘무인’이라는 느낌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단세천은 동굴을 둘러보았다. 그가 백 일이라는 시간 동안 지냈기 때문인지 동굴에는 제법 사람이 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모닥불을 피우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흙으로 만들어 놓은 화로, 흑랑 가죽을 깔아 침대로 쓰였던 곳, 시호와 흙장난을 하며 만들었던 것들…… 동굴에 있는 모든 것에는 시호와의 추억이 담겨져 있었다.
‘언제고 돌아올 곳이지.’
핏, 웃은 그는 동굴을 나섰다. 동굴 밖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미호 선인과 시호였다.
“세천!”
그가 동굴을 나오는 것을 본 시호가 도도도 달려와 그의 품에 덥석 안겼다.
“세천, 진짜 가는 거야?”
시호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 물었다. 그런 시호의 모습은 무척 안쓰러웠지만, 단세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하산할 시간이었다.
그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시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시호를 품에 안고 상냥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흐윽, 흑! 흐윽! 싫어, 가면 싫어!”
“걱정 말거라. 언제고 다시 돌아올 터이니. 그때가 되면 함께 밖에 나가 보자꾸나.”
단세천은 계속 시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시호를 달랬다.
시호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것은 그로부터 십 분가량이 지났을 무렵이다. 겨우 진정이 된 듯 울음을 그친 시호는 두 눈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토끼와 같아 보여 단세천은 빙그레 웃었다.
“꼭 돌아와야 돼! 약속이야?”
“그래, 약속이다.”
단세천의 대답이 못 미더웠는지, 시호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그에게 내밀었다.
“약속!”
피식, 실소를 흘린 단세천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시호의 새끼손가락에 얽었다. 그제야 만족한 듯 시호는 활짝 웃고는 미호 선인에게 다가가 안겼다.
시호를 안아 든 미호 선인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미호 선인이 양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그녀의 새하얀 소복 사이로 아홉 개의 여우 꼬리가 살랑거리며 드러났다.
미호 선인은 꼬리 중 하나를 쓰다듬더니, 나지막하게 진언을 읊으며 단세천에게 갖다 댔다.
“라히라 챠크라타 피트라.”
미호 선인의 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졌다. 그 빛은 단세천의 몸을 한 바퀴 휘감았다. 그리고 단세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그 빛은 이내 그의 몸속으로 스르륵 녹아들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 충만한 기력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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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대단한 효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단세천에게 미호 선인이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일족의 은인에게 이 정도는 당연한 보답이랍니다.”
“…고맙소.”
단세천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며 그의 감사가 진심 어린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미호 선인이 한 손으로 입을 가려며 눈웃음 지었다.
“별말씀을. 부디 은공의 행로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겠어요.”
“잘 있으시오. 시호도 잘 있거라.”
“잘 가, 세천! 약속 잊으면 안 돼!”
“아아, 그러마.”
작별 인사를 마친 단세천은 몸을 돌려 호연봉을 벗어났다.
그런 그를 미호 선인과 시호가 배웅해 주었다.
멀리 사라져 가는 단세천을 바라보던 시호가 조그마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야!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걸로는 부족해!’
단세천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어린 시호가 생각해도 그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일 듯했다. 그 시간 동안 기다리는 건 싫었다! 시호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고 미호 선인을 바라보았다.
“엄마.”
“왜 그러니?”
“세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 엄마가 말한 그 수업이란 거, 나 받을래.”
결심이 담긴 목소리.
미호 선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러자꾸나.”
“응!”
‘기다려, 세천!’

시호의 이 결심으로 인해 단세천은 그의 딸에게 심하게 시달리게 되지만, 그것은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다.



제7장 검마징벌(劍魔懲罰)(1)


구령산을 내려온 단세천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이전에 벽곡단 등을 구입하기 위해 갔던 잡화점이다.
현재 그는 땡전 한 푼 없는 상태. 객잔에서 방을 하나 빌릴 약간의 돈조차 없으니 일단 잡화점에 먼저 들러 실전 수련을 통해 얻은 가죽들을 팔아 얼마간의 돈을 얻을 생각이었다.
거의 한 달 반 만에 찾아온 잡화점은 이전과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잡화점은 여전히 낡아 보였고, 얼굴에 털이 무성하게 난 중년 사내는 그때처럼 꾸벅꾸벅 졸며 입가로 침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똑똑!
“이보시오!”
“으헛! 까, 깜짝이야! 놀랐잖소!”
화들짝 깨어난 잡화상점 주인이 버럭 소리쳤다. 이전에 요리 도구를 사러 왔을 때도 이런 일이 한 번 있었기에 단세천은 가볍게 무시하고, 가방에서 가죽들을 꺼냈다.
처음에는 심드렁한 얼굴로 단세천이 꺼내는 가죽들을 바라보던 잡화상점 주인은 그가 꺼내 놓은 가죽이 흑랑 가죽과 호랑이 가죽이란 것을 알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가죽들이 잡화점의 진열대 앞을 꽉 채우는 수준이 되자 손을 덜덜 떨었다.
‘이 정도 수량에 품질! 잘만 판다면 그, 그, 금화 백 개는 손에 쥘 수 있다! 아니, 백 개가 뭐냐, 이백 개도 가능할 거다!’
그야말로 대박! 노다지다!
잡화상점 주인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금화 이백 개라면 당장에 이 빌어먹을 잡화점을 때려치우고, 새로 번듯한 사업체를 구할 수 있었다. 아니면 상단에 투자해서 그 이득으로 놀면서 사는 것도 가능할 터!
‘흐흐흐, 놀고먹는다라!’
잡화상점 주인은 그의 앞에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히죽거렸다.
단세천이 그런 잡화상점 주인의 반응을 놓칠 리가 없다. 잡화상점 주인에게는 불행하게도, 단세천은 잡화상점 주인이 보인 반응에서 가죽의 가치가 상상 이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에 사시겠소?”
“음, 어디 보자…….”
가죽을 살피는 행동을 보인 잡화상점 주인은 최대한 평정심을 가장하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은 헛된 짓이었다. 단세천은 이미 그가 보인 반응을 전부 살피고 가죽의 가치가 높다는 사실을 짐작해 냈으니까.
“오호, 이 정도면 금화 다섯 개 정도는 되겠구려. 웬만한 사냥꾼은 이렇게는 못할 터. 정말 대단하시오.”
진정 감탄했다는 듯이 말하는 잡화상점 주인.
그러나 단세천은 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들떠 있고, 표정이 정돈되지 않는 것을 보고─정확하게는 쓸데없이 눈을 굴리는 것을 보고─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말 과할 정도로 현실적이게 만들어졌군.’
쓰게 웃은 단세천이 잡화상점 주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