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검마유희록 1권(21화)
제7장 검마징벌(劍魔懲罰)(4)
“하아아압!”
거대한 검은 불꽃의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린 단세천은 그대로 대문을 내려 벴다. 부우우웅―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진 직후, 콰자작! 소리와 함께 대문이 산산이 갈라졌다. 나뭇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매캐한 탄내가 퍼져 나왔다.
대문 안에서 밖에 있을 적을 경계하던 전군상의 호위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단세천의 검이 대문을 부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땅을 길게 갈라 버렸기 때문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먼지가 걷히자 마치 거인이 도끼를 들어 내려친듯 한 자국이 드러났다.
실로 가공할 위력!
호위병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벅저벅.
단세천이 무심한 표정으로 전군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번 일격으로 내공의 절반을 사용해 버렸지만 그의 얼굴에는 조금도 힘들다는 표시가 나지 않았다. 다수를 상대할 때는 철저히 평정을 가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무력을 보여 놓고 태연한 단세천의 모습에 호위병들이 공포에 질려 웅성거렸다.
“말도 안 돼! 저건 대체 뭐야!”
“괴, 괴물이다!”
단세천은 말없이 그들을 가로질렀다. 창을 찌르면 닿을 만한 거리였지만, 그들은 감히 움직일 염두조차 내지 못했다. 기선을 너무 강하게 제압당한 탓이었다.
그러나 어디서나 용기있는─이 경우에는 만용을 부리는─자가 있기 마련!
호위병의 수장으로 보이는 옷을 입은 날카로운 얼굴의 사내가 단세천이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 죽어라앗!”
훤히 드러난 등을 보던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현실을 외면한 상태였다. 단세천이 보인 일격이 사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생각에 힘입어 사기꾼에게 달려들었는데, 사기꾼은 반응조차 못하고 칼에 찔리려 하고 있었다.
‘역시나 그냥 사기였……!’
서걱!
사내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멍청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보았다. 강철로 만들어진 칼날이 싹둑 잘려 나가 있었다. 단세천이 가볍게 휘두른 검에 그냥 잘려 나가 버린 것이다.
‘사, 사기꾼이 아니었……!’
사내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느끼지 못했지만, 단세천의 검은 이미 그의 허리를 베고 지나간 후였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어쩔 수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
반으로 나뉜 사내의 시체가 바닥에 털썩 널브러졌다. 뒤늦게 잘린 단면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며 피비린내가 장내에 훅 퍼졌다.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가뜩이나 하얗게 질려 있던 호위병들의 얼굴이 병자의 그것처럼 변해 버렸다.
단세천은 죽은 자의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환상 연대기에서 처음으로 살인을 했으나 딱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저쪽에서 나를 노렸으니 반격하여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게임에 불과하다는 것이로군.’
씁쓸한 웃음을 흘린 단세천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던 길을 계속 일정한 속도로 걸어갔다.
단세천의 뒤돌아서 사라지자 호위병들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몸을 일으키더니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호위병들도 자신의 목숨은 소중한 법이다.
‘사치스러움의 극치로구나.’
전군상의 건물 안으로 들어선 단세천의 감상이었다.
건물 안은 그야말로 졸부가 보일 만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온갖 곳에 금을 덕지덕지 발라 놓았고, 값비싸 보이는 예술품들을 보란 듯이 전시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온갖 기괴한 잡동사니들을 멋지다고 달아 놓은 상태였다.
참 쓸모없어 보이는 장식들에 인상을 찌푸린 단세천은 기감을 활짝 열었다. 크게 확장된 기감 속에서 열 명 정도의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곳이로군.’
단세천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미 거의 모든 호위병들이 그의 신위를 목격하고 도망친 터라 그를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긴 복도를 가로질러 도달한 곳은 접객당(接客堂)이라 쓰여진 문앞이었다. 문 안에서는 비파 소리와 함께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정말 생각했던 그대로의 이미지의 악질 상인이로구나.’
없는 자에게 갈취하여 돈을 벌고, 음주가무에 그 돈을 흥청망청 써 대며 노는 더러운 악질 상인들. 전쟁상인은 단세천이 생각하는 악질 상인의 표본 같은 이들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단세천은 접객당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좌우로 열린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열린 문 사이로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다음 기녀로 보이는 여인들을 희롱하고 있는 다섯 명의 뚱뚱한 사내가 보였다.
뚱뚱한 사내들은 갑작스런 방문객에 놀란 듯 굳어진 얼굴로 단세천을 바라보았다.
“…….”
“…….”
“…….”
단세천과 뚱뚱한 사내들, 그리고 기녀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단세천은 단세천 나름대로 놀라는 중이었고, 뚱뚱한 사내들과 기녀들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있는 괴한이 들어왔으니, 그들이 놀라지 않으면 되레 그것이 이상할 터였다.
그렇다면 단세천은 대체 무엇에 놀랐느냐?
그가 놀란 것은 뚱뚱한 사내들의 외모였다. 놀랍게도, 다섯 명의 뚱뚱한 사내는 전부 똑같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다섯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이다.
‘욕망 덩어리 오형제인가? 우습군.’
단세천이 뚱뚱한 사내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생각대로 이 뚱뚱한 사내들은 모두 형제였다. 정씨 일가의 형제들로, 각기 부귀(富貴), 영화(榮華), 재산(財産), 재물(財物), 만석(萬石)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네, 네놈?! 대체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냐! 호위병들은 대체 뭘 한 거야!”
제일 상석에 앉아 있던 뚱뚱한 사내, 정부귀가 버럭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정신이 돌아온 다른 뚱뚱한 사내들도 중구난방으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 있느냐!”
“호위병! 호위병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그들에게 단세천이 돌려준 답은 매우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서걱!
반으로 쪼개진 탁자가 넘어지자 그 위의 음식들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그제야 단세천이 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재차 깨달은 정씨 오형제가 입을 다물었다.
반면, 조용해진 정씨 오형제와는 다르게 기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방구석으로 모여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문은 단세천의 뒤 쪽에 있었는데, 기녀들로서는 그곳으로 갈 담력은 없는 까닭이다.
그들의 반응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단세천이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당신들이 누구인지도 알고 왔다. 그리고 호위병들은 모두 도망쳤으니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 그 말은?”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당신들과 나뿐이라는 말이다.”
정씨 오형제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이 살인마는 지금 그들에게 돌려서 협박을 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노라고. 그러니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말이다.
단세천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협박이 정확하게 먹혔다고 판단했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짐작한 그는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
“이제 이야기를 할 준비가 어느 정도 된 것 같군.”
“되, 되고 말굽쇼. 뭐든 이야기만 하십시오!”
정씨 오형제의 큰형인 정부귀가 재빨리 양손을 비비며 간사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끊임없이 단세천을 살피고 있었다.
‘이놈이 여기까지 온 것, 그리고 이놈의 이야기에 따르면 호위병들은 죽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을 끌면 그들의 연락을 받은 군대에서 병력을 출동시킬 터! 시간을 끌면 된다.’
정부귀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그의 얼굴 표정에서 대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짐작한 단세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원군이 올 것이라 생각하나?”
“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와도 상관없음을 모르는군. 나는 당신들을 죽이고 도망치면 그만. 나에게 그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나?”
없을 리가 없었다. 정부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랬다. 그의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은 수십이 넘는 호위병을 격퇴하고 이곳까지 들어온 자다. 그것은 자신들만 베고 나면 충분히 도망칠 능력이 된다는 반증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정부귀가 볼 때 눈앞의 인물은 분명 무림인이라 불리는 족속이 분명했다. 무림인이라는 족속들은 살인마저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잔혹한 자들! 당연히 지원군이 온다면 그들을 베고 도망칠 터였다.
단세천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들에게 원하는 게 별로 없다. 재물이 탐나는 것도 아니고,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지.”
“그, 그렇다면 대체 왜 우리를 습격한 겁니까?”
“당신들이 먼저 나를 기만했으니까.”
덜덜 떨리는 정부귀의 질문에 단세천이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정씨 오형제로서는 기겁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기만이라니? 대체 그들이 이 괴물에게 무슨 기만을 했단 말인가.
정부귀가 자신의 동생들을 돌아보았다. 동생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휙휙 저었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정부귀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저희가 대인을 기만하였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저희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잡화상점 주인, 가죽.”
짤막한 단세천의 대답에 정부귀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망했다! 그게 이자의 것이었구나!’
그는 그의 형제들이 털어먹었던 잡화상점 주인을 떠올렸다. 잡화상점 주인이 몰매를 맞고 쫓겨날 때 했던 말도.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잡화상점 주인의 말을 비웃으며 무시했던 것이 극심하게 후회되었다.
사실 잡화상점 주인은 분에 겨워 그리 소리친 것뿐이었지만, 정씨 형제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 대, 대인!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씨 형제는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판단은 빨랐다. 애초에 건드려서 안 될 자를 건드린 건 그들이었다. 몰랐다고는 하지만, 그것 또한 힘있는 자에게는 죄가 된다. 그것이 정씨 형제가 오랜 전쟁상인 생활로 터득한 지혜였다.
다음에 복수를 하느니 어쩌니 하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런 면에서만큼은 매우 현명했다.
상대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자!
자신의 물건을 털어먹었다는 것만으로 수십의 호위병을 물리치고 그들의 앞에 선 자다. 이런 자가 그들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면 그 방법은 무궁무진할 터. 그들에게는 괜히 복수를 한다고 나대다가 훅 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들의 재빠른 대처에 단세천마저도 일시지간 기가 막힌 듯 말을 멈췄다.
‘실로 영악한 자들이로구나. 하긴, 그러니 이렇게 큰 부를 쌓았을 테지.’
단세천은 감탄마저 했다. 하지만 감탄은 감탄이고, 이건 이거다.
그는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정씨 형제가 움찔거렸다. 혹시나 느닷없이 검을 휘둘러 자신들을 베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그들의 얼굴에 한껏 드러났다.
“거기, 당신들.”
자리에서 일어난 단세천이 한 것은 구석에 모여 있던 기녀들을 부르는 것이었다.
기녀들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단세천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다소 힘 빠진 어조로 말했다.
“이곳을 나가시오. 지금부터는 여인들이 볼 만한 장면이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