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뇌왕무적 1권(18화)
七章 비검문으로(2)
잠시의 침묵.
진유현이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부님의 정확한 경지에 대해서는 저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진유현의 말.
다소 맥 빠지는 대답이다.
진유현을 바라보며 한껏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특히 적소화의 얼굴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후릅.
그 반응에 진유현이 조용히 웃음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였다.
타타타탁.
누군가 집무실에 다가오는 소리.
잠시 후.
집무실 밖에서 총관의 음성이 들려왔다.
“장주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들어오시게.”
총관의 말에 진성원이 말했다.
드르륵.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들어왔다.
청의를 걸친 이십 대의 청년.
진가장까지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몸에 걸친 청의 전체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청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위에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청년은 지저분했다.
그럼에도 청년은 먼지를 털 생각도 안 하고, 급하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청년이 좌중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비검문의 북리성입니다.”
그에 진성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가장의 장주를 맡고 있는 진성원이네.”
“북리성이 장주님을 뵙습니다.”
“일단 잠시 쉬고 만나는 게 어떤가.”
겉모습이 지저분하고,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북리성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북리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일단 자리에 앉게.”
진성원이 비어 있는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북리성이 자리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북리성입니다.”
좌중도 마주 인사했다.
“조일영이네.”
“적소화라고 해요.”
“진유현입니다.”
조일영과 적소화에서 깜짝 놀라던 북리성이 진유현의 소개에서는 눈에 광채가 번쩍했다.
조일영과 적소화도 무림에서 충분히 유명하다.
삼패의 인물들이니 당연하다. 그러나 진유현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뇌왕 진유현.
뇌신의 제자.
현 무림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는 무인.
사혈성의 거침없는 행보를 홀로 막은 무인이 바로 뇌왕 진유현이었다.
북리성이 진가장에 온 이유도 진유현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북리성이 진유현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동경의 빛이 역력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십 대의 나이에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 중 하나로 꼽힐 정도니까.
이미 진유현은 무공을 익힌 청년들의 우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정파는 물론, 일부 사파의 후기지수들도 진유현을 우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현 무림에서 진유현이 차지하는 부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진유현을 바라보는 북리성의 시선에 진성원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비검문에서 무슨 일로 본 장을 찾아왔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북리성이 몸을 바로 하고는 진성원을 보며 말했다.
“진가장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왔습니다.”
“도움?”
진성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검문은 다른 곳에 도움을 청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 진가장과 비검문은 그동안 특별한 교류가 없었다.
“네.”
“정확히 무슨 일인가?”
“…….”
진성원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던 북리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혈성의 장로원과 흑천대(黑天隊)가 본 문을 향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
“으음.”
“흑천대.”
“장로원.”
좌중이 북리성의 말에 흠칫 놀랐다.
북리성의 말은 그만큼 파장이 컸다.
흑천대.
흑천대는 적혈대와 같이 사혈성을 대표하는 무력 집단이었다.
흑천대원 대부분이 일류의 경지에 속했고, 절정의 초입도 몇 명 있을 정도로 강한 집단이다.
그렇기에 흑천대의 무력은 웬만한 중소문파 하나 정도는 그냥 지울 수 있을 정도였다.
장로원.
사혈성에서 나이가 들어 은퇴하는 무인들이 모인 곳으로, 실질적으로 사혈성에서 가장 강한 무인들이 모인 곳이 바로 장로원이다.
특히 장로원주.
탈혼검(奪魂劍) 사도명.
사도명은 사혈성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혈존 다음으로 강한 사혈성의 이인자로, 사혈성이 산동에서 정천문과 백검문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것도 사도명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사도명이 초절정 고수이기 때문이다.
산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바로 탈혼검 사도명이었다.
그가 속한 장로원과 흑천대가 비검문을 향해 가고 있다면, 사혈성이 비검문을 완전히 지우려고 마음먹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집무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탈혼검 사도명의 존재는 좌중을 침묵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침묵.
그때 적소화가 북리성을 향해 말했다.
“사혈성에서 비검문을 공격하려고 하면 백검문이 가만있을 리가 없을 텐데요. 백검문에서 지원군을 보내기로 하지 않았나요?”
적소화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다.
정천문의 입장에서 진가장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면, 비검문은 백검문에게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비검문이 있는 제성(諸聖)에서 백검문의 운성(隕星)까지는 큰 관도는 물론이고 강의 지류가 서로 연결돼 흐르기 때문에 사혈성에 제성을 뺏긴다면, 백검문에게도 곤란한 일이 분명했다.
그동안 침묵하던 백검문도 이번만큼은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백검문에서 지원군을 보냈으리라고 생각하는 적소화였다.
하지만 대답하는 북리성의 얼굴빛이 상당히 굳어졌다.
“백검문의 지원군은 없습니다.”
“예?”
“…….”
“…….”
좌중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검문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지만, 정작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게 정말인가요?”
“네. 현재 백검문은 거의 활동을 안 하고 있습니다. 다만…….”
북리성이 중간에 말을 흐렸다.
그에 적소화가 다급하게 물었다.
“다만 무엇이지요?”
“현재 백검문의 모든 무력대가 활동을 안 하고, 백검문에 모여 있습니다. 거의 반 봉문 상태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정보대는 모두 외부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 활동 범위가 강소성 인근인 것 같습니다.”
북리성의 이어진 말에 적소화가 깜짝 놀랐다.
“강소성이요?”
“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백검문의 정보대가 강소성 인근에서 자주 모인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
“…….”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백검문의 영역은 산동성이다.
그런데 백검문이 사혈성을 놔두고 강소성을 드나든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강소성이라…….”
적소화는 백검문이 강소성에 출몰한다는 말에 생각에 잠겼다.
백검문과 강소성.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둘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산동성에 정천문과 백검문, 사혈성의 삼패가 있듯이, 강소성에도 강소성을 지배하는 이패가 있다.
도림(刀林).
패왕문(覇王門).
이 두 곳이 산동삼패와 마찬가지로 강소성에서는 강소이패로 불린다.
하지만 백검문과 강소이패가 마주칠 일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문파가 자리한 지역이 다르다.
활동 영역이 산동성과 강소성으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툴 일이 없었다.
그리고 도림과 패왕문은 사파다.
정파와 사파는 물과 기름의 관계.
결코 타협하거나 어울릴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백검문이 강소성으로 진출하는 것인데, 그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백검문에 비해 도림과 패왕문이 결코 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 성을 대표하는 대문파들은 그 전력이 서로 엇비슷한 편이다.
만약 백검문이 강소성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도림과 패왕문은 연합할 것이 분명했다.
강소이패는 모두 사파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연합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이익만 된다면 언제든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두 문파의 연합에 백검문의 전력만 까먹는 상황이 된다는 말이다.
즉, 백검문이 강소성에 진출한다는 것은 손해만 보는 일이라는 것이다.
“강소성이라. 그전부터 그랬지만, 백검문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이건 마치 고의로 사혈성의 행보를 눈감아 주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진가장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북리성이 진유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북리성의 말.
정확히는 진가장이 아니라 뇌왕이라 불리는 진유현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흑천대는 비검문에서 막을 자신이 있지만, 사도명을 막을 만한 고수가 비검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백검문의 지원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진성원의 말에 북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현재 그들의 모습으로 보아 사혈성을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사혈성이 직접적으로 백검문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백검문이 나설 확률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북리성이 말끝을 흐리다가 조심스럽게 이어 나갔다.
“솔직히 본 문에서는 백검문이 사혈성과 밀약을 맺은 것은 아닌지 의문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이상은 말하지 말게.”
“…….”
조일영의 말에 북리성이 입을 닫았다.
정파인 백검문이 사파인 사혈성과 밀약을 맺었다는 말은 증거도 없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정파는 명예를 최고로 여긴다.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게 바로 정파였다.
만약 이 말이 백검문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 명분으로 비검문을 공격한다고 해도 비검문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좌중은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백검문의 행보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조용해진 집무실.
진성원이 아들인 진유현을 바라보았다.
“너는 어쩌면 좋겠느냐?”
적혈대와의 전투 이후로 장의 일을 진유현에게 맡기기로 다짐한 진성원이다.
더구나 뇌왕이라는 별호로 이미 무림에서 자신의 명성을 뛰어넘었다.
그러니 비검문의 일을 묻는 것이다.
진유현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따라 진가장이 움직일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조일영과 적소화는 물론, 북리성도 진유현을 보고 있었다.
집무실이 긴장감으로 팽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