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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왕무적 1권(21화)
七章 비검문으로(5)
“…….”
적소화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아마 진 소협 때문일 거예요.”
“나 말이오?”
진유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 때문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예. 진 소협이 적혈대를 전멸시켰기 때문에 저들도 급해진 것 같아요. 적혈대가 전멸함으로써 추락된 사기를 높이고자 서둘러 비검문을 정리하려는 게 분명해요. 어쩌면 진 소협이 비검문으로 지원을 갈지도 모른다고 사혈성에서 판단했을 수도 있고요.”
적소화의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구였다.
“뇌왕.”
허구가 크게 소리쳤다.
적소화가 하는 말을 듣고 진유현이 뇌왕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진유현의 시선이 허구에게로 향했다.
허구는 진유현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저 바들바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허구를 잠시 바라보던 진유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사혈성 소속이라니, 굳이 살려 줄 필요는 없겠지.”
무심한 음성.
고저가 없는 진유현의 목소리가 섬뜩하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 진가장을 핍박한 사혈성을 증오하는 진유현이다.
그러니 스스로 사혈성의 무인임을 밝히는 허구 일행을 살려 줄 리가 없었다.
후아아악!
진유현의 전신에서 폭사 되는 짙은 살기가 허구 일행을 덮쳤다.
“컥.”
“악.”
“우웩.”
“크악.”
허구 일행이 진유현의 살기에 피를 토하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살기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죽은 것이다.
화경의 고수가 작정하고 뿜어내는 살기다. 살기 자체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경지.
고작 삼류를 벗어나려는 허구 일행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북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한데, 지금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에 당장 마음이 급한 건 바로 북리성이다.
안구에서 비검문이 있는 제성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기 때문이었다.
북리성이 초조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조일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러자 나머지 일행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천대가 앞서 가고 있으니, 지금부터 서둘러야만 했다.
일행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八章 습격(1)
산동성 제성(諸城).
산동의 동쪽 도시들이 강소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제성을 들러야만 한다.
동쪽 도시들과 강소성을 잇는 큰 관도가 제성, 한 군데에만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수많은 상인들이 제성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고, 그 영향으로 제성은 발전해 갔다.
그 발전 속도는 엄청났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산동의 성도인 제남만큼이나 제성도 번화했다.
그런 만큼 제성은 유명한 곳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제성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다름 아닌 무림 문파인 비검문이었다.
비검문(飛劍門).
비검문은 중소문파다.
그러나 비검문을 단순히 중소문파라고 하기에는 그 무력이 강한 편이었다.
중소문파라고 하기에는 강하고, 대문파라고 하기에는 약하다.
즉, 중소문파가 대문파로 가기 위한 과정을 지금 겪는 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문주인 유성검(流星劍) 북리천은 절정의 극에 달한 고수로, 앞으로 십 년 안에 초절정에 오를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무림인들의 평가였다.
무림 문파란 결국 소수의 고수로 그 강함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었다.
흔히들 한 손이 열 손을 감당 못한다고들 하지만, 초절정 고수란 열 손이 아닌 백 손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리천이 초절정에 오른다면 비검문이 대문파로 분류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제성은 온전히 비검문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비검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 있었다.
전원이 흑의를 걸치고, 전신에 짙은 살기를 두른 무인들이었다.
흑천대.
다름 아닌 사혈성의 흑천대였다.
그들은 비검문이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모여 비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천대는 성질이 급하고, 과격한 무인들이 모인 무력 집단이었다.
특히 전투를 벌이기 전에는 항상 술을 마시며 시끌벅적했다.
전투 전에 마시는 술은 흑천대의 전통이자, 전투를 벌이기 전에 벌이는 흑천대만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흑천대는 술은커녕 잡담도 없이 조용히 있었다.
평소와 달리 군기가 잔뜩 든 모습.
평소의 자유로운 모습의 흑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것은 흑천대의 선두에 서서 비검문을 내려다보는 단 한 명의 노인 때문이었다.
천하에 악명이 자자한 흑천대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드는 노인.
노인은 그럴 만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탈혼검(奪魂劍) 사도명.
사혈성에서 성주인 혈존 다음으로 강한 이인자로, 초절정에 든 절대 강자가 바로 사도명이다.
노인이 바로 사도명이었다.
흑천대의 중심에 선 사도명.
사도명이 깊숙이 가라앉은 눈으로 비검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산에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을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는 사도명.
그 모습이 마치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여 흑천대와는 동떨어진 듯이 보였다.
스슥!
그런 사도명의 곁으로 흑천대주 기성량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원주님, 여기서 하루를 더 머무르실 생각이십니까?”
흑천대주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공손한 말투였다.
그러나 기성량은 그것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눈앞의 노인이 바로 탈혼검이기 때문이다.
기성량의 말에 사도명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번쩍!
파르르.
사도명의 두 눈과 마주친 기성량의 눈가가 세차게 흔들렸다.
사도명의 눈동자.
심해처럼 깊고 어둡지만, 그 안에 담긴 광기를 잠시나마 엿봤기 때문이다.
잔인하다고 소문난 흑천대주 기성량조차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광기가 사도명의 두 눈에 담겨 있었다.
기성량이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기성량을 보고 있던 사도명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제 움직이는 게 좋겠군. 흑천대는?”
“모두 준비됐습니다.”
“혹시나 해서 분명히 말하는데, 즐기지 말고 최대한 빨리 정리한다.”
기성량의 말투에는 살기가 배어 있었다.
감히 거역하기 힘든.
“충.”
기성량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도명이 빨리 정리하라고 하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기성량은 사도명이 얼마나 잔인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 그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 나간 사혈성의 무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공학은 수뇌부라고 해서 결코 봐주지 않는다.
단호한 손속.
그렇기에 기성량이 잔뜩 긴장했다.
“비검문을 정리하고, 흑천대는 청주로 향한다.”
그 말에 기성량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청주라면…….”
“진가장으로 간다.”
기성량의 눈이 빛났다.
“진가장이라면?”
“뇌왕, 젊은 나이에 초절정에 들었다지. 그런 뇌신의 제자를 성주님에게 양보할 수야 없지.”
조용히 중얼거리는 사도명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지독한 살기를 동반한 미소였다.
사도명이 아무리 사혈성에서 영향력이 강하다지만, 성주인 혈존이 나서면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다.
혈존은 초절정에 오른 사도명조차도 어려워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혈존은 뇌신의 제자를 결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리 없었다.
뇌신의 제자는 그만큼 맛있어 보이는 먹잇감이었기 때문이었다.
혈존이 나서면 늦는다.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혈존이 나서기 전에 사도명이 먼저 움직이려는 것이다.
뇌신의 무공을 꺾는다는 공명심 때문에.
“크크크크.”
낮은 웃음소리가 야산에 울려 퍼졌다.
사도명은 진정 즐거운 것이다.
뇌왕을 상대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할 정도로 말이다.
저벅저벅.
사도명이 걸음을 옮겨 야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흑의 물결이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비검문.
비검문에 혈풍이 불려 하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비검문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
저벅저벅.
사도명이 비검문의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흑천대가 따르고 있었다.
사도명은 비검문을 멸문시키려고 왔다. 즉, 전투를 벌이러 온 것이다.
그러나 비검문을 향해 걷는 사도명의 걸음은 느릿하니 여유가 있었다.
얼굴 표정도 부드러웠다.
그 모습이 흡사 바람을 쐬기 위해 산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절대로 피를 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챙. 챙.
하지만 비검문의 정문위사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잔뜩 긴장한 채 발검했다.
사도명 때문이 아니었다.
그 뒤를 따르고 있는 흑천대 때문이었다.
흑천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정문위사들의 몸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현재 비검문은 사혈성과의 전투준비로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그런 비검문에 와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을 무인들은 사혈성밖에 없었다.
땡땡땡땡땡!
“멈춰라.”
정문위사가 긴장한 채 비상종을 울리며 소리쳤다.
종소리가 비검문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제 곧 있으면 비검문의 정예들이 정문으로 몰려올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도명은 말릴 생각이 없는지 웃고 있었다.
천천히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빨리 불러 모아라.”
사도명은 비검문의 전력이 한곳에 빨리 모이기를 원하였다.
시간 끌 것 없이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그리고 바로 뇌왕이 있는 청주로 가기 위해서.
사도명에게 있어서 비검문은 특별히 전투를 벌이러 왔다기보다는 진가장으로 가기 전에 잠깐 몸을 푸는 정도에 불과했다.
“멈추라고 했다. 더 이상 다가오면 베겠다.”
정문위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도명이 눈을 빛내며 정문 너머를 바라봤다.
사도명의 기감에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여러 개의 기척이 잡혔다.
결코 약하지 않은 자들.
비검문의 정예가 분명했다.
“제법 빠르군. 준비했다는 것인가. 이쯤이면 충분한 시간을 줬겠지.”
스윽!
사도명이 중얼거리며 정문위사를 향해 검결지를 들어 올렸다.
순간이었다.
번쩍!
사도명의 검결지에서 붉은 검기가 솟구치더니, 정문위사 둘을 스쳐 지나갔다.
서걱!
“큭.”
“헉.”
털썩!
절단음과 함께 정문위사 둘이 신음을 흘리며 속절없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