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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크마스터 1(8화)
제2장 마귀의 정체(2)


멈칫.
강물이란 말에 지환의 손이 흠칫했다. 이전의 쓴맛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더부룩한 느낌이 배를 탱탱 치자 어쩔 수 없이 지환은 물주머니를 들어 물을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낼름낼름.
하지만 쓴맛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터라 조금씩 물을 입가에 적시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쓴맛은 여전했다.
‘웩! 쓰다.’
입 안으로 조금 넘어온 물은 여전히 무슨 보약 같은 쓴맛이었다. 카카오99의 고무 타이어 맛하고도 비슷했다.
속으로 이건 사람이 먹을 게 못 된다 처절하게 외쳤지만, 신기하게도 갈증이 빠르게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불러서 속이 거북했던 것이 순식간에 소화가 되는 것 같았다.
“휴으. 감사합니다.”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 소화가 잘 되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환이 편안한 미소를 짓자, 그렐돈이 물주머니를 다시 받아 갔다.
“이리 주게나. 별로 물을 안 마시는군.”
그렐돈의 말에 지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쓴 맛 나는 물을 누가 마셔! 네놈이 한번 마셔 봐라.’
그런 생각을 했는데 놀랍게도 그렐돈은 그 생각대로 지환이 건넨 물주머니를 받아 들더니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허어. 역시 식사 후에는 물을 마셔야지.”
입을 닦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렐돈을 보며 지환은 저 쓴 물을 어떻게 저렇게 마실 수 있는지 의아했다.
지환은 이번에는 리샤이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도 식사를 마쳤는지 자신의 물주머니를 꺼내 물을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내 혀가 이상한가?’
지환이 의아함에 빠져 있는 사이, 리샤이엘이 손바닥을 모으며 말했다.
“식사를 마쳤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대지의 신께 감사를.”
그 말이 들려오자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그 동작을 따라 했다. 어느새 옆에서도 그렐돈이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지환으로서는 자신을 괴롭히던 가장 큰 문제였던 허기를 처리했기에 마음속의 큰 짐을 던 셈이었다.
잠시 멍하게 있던 지환에게 리샤이엘의 음성이 들렸다.
“뗏목은 부서진 건가요? 난파되었나 보네요. 사고였나요?”
“예에?”
난감해 하는 지환의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리샤이엘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곳 상류는 물길이 불안정하므로 순식간에 배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결계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이곳의 사람들은 절대 이 강으로 지나가지 않죠. 간혹 지류를 따라 거슬러 오는 사람들은 멋모르는 타지방 사람들.”
지환이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그렐돈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럼 식사를 마무리하지요.”
식사를 마친 후 치울 것도 없었다. 흡사 간식을 먹듯 순식간에 끝난 식사였기에 리샤이엘은 아까의 질문을 계속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나요? 정말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네요.”
“아…… 저 그게…….”
어쨌든 뭐라 설명을 하고 싶었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죽음의 결계는 또 뭐야?’
지환이 머리를 굴렸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잠시 지환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그렐돈이 옆에서 말했다.
“길을 잃은 훈카족 사람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할 텐데……. 혹시 숲의 사람들에게 부탁할 수 있을까요?”
길을 잃은 훈카족은 지금의 지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지환의 신기한 복장, 그리고 독특한 외모를 보고 이미 남쪽 변방의 훈카족이라고 단정 지은 것 같았다.
“흐음. 장로님이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아마 부족의 창고에 일전에 인간 부족이 선물로 남긴 뗏목이 있을 거예요. 물론 장로님의 허락이 필요하겠지만, 저희들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니 큰 상관은 없을 듯.”
지환은 눈을 굴리며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자세한 내용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들이 지환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준다는 말이었다.
‘이런 착한 사람들이 있나.’
내심 지환은 감탄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식사를 대접하고―물론 한 대 얻어맞은 것은 있지만―억측이긴 하지만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도움을 주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거지 상태인 지환으로서는 먹을 것 하나 혼자서 해결할 수 없었다.
만약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정말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의 지환으로서는 이 착한 두 명을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자신의 생명 줄이었다.
잠시 그 둘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내 결론을 내린 듯 리샤이엘이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지환? 이것이 당신의 이름 맞지요? 발음이 조금 어렵네요.”
더듬거리며 그녀가 말하자 지환은 그녀에게 말했다.
“지환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숲의 인도자 리샤이엘.”
그렐돈이 리샤이엘에게 말하던 호칭을 기억해 내며 지환이 리샤이엘을 향해 정중히 말했다.
“예. 지환,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사정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니 난파의 충격이 컸나 보군요. 아니면 죽음의 결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고요.”
다시 죽음의 결계를 이야기하며 리샤이엘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렐돈도 무언가 추측 가는 것이 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만약 죽음의 결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았고 그 상태에서 운이 좋아 탈출한 것이라면 이해가 갑니다.”
그렐돈의 말에 리샤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역시 그곳에서 충격을 받아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닥친 일을 까먹은 것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네요.”
다시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자 지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흐음. 뭔지 모르겠으나 그 죽음의 결계인지 뭔지 때문에 내가 전후 사정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아나 보네.’
잠시 생각을 하던 지환이 눈을 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으로서는 차라리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편했다. 아까 전에 그들 둘이 서로 이야기 나눈 것이 이 내용 같았다.
리샤이엘이 지환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와 같이 동행하시죠. 저희의 마을에 가면 뗏목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장로님이라면 당신이 무사히 고향 훈카족의 마을로 내려갈 수 있도록 지혜를 빌려 주실 것입니다.”
지환이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말이 그들에게서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환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사실 그들이 자신을 떼어 놓고 간다고 해도 지환의 입장에선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따라가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데려가 주고 마을의 장로도 만나게 해 준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흐음. 엘프 마을의 장로라……. 장로쯤 되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지환이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되는 리샤이엘의 뾰족한 귀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소설이나 영화에서 엘프족의 장로들은 지혜의 신과 맞먹는 존재들이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기에 지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들을 따라가게 되었다.
“가시죠.”
리샤이엘이 일어서며 말했다.
일행은 짐도 단출했다.
전사 그렐돈은 전사란 말이 어울리지 않게 잡다한 물건이 담긴 커다란 배낭 하나를 메고 있을 뿐이었고, 숲의 인도자 리샤이엘의 경우도 작은 가방 하나만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일행 중 가장 간편한 자는 지환이었다. 그는 빈손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렐돈을 바라보며 한마디 던졌다.
“조금 나눠 들까요?”
“아, 그런가? 고맙군.”
그렐돈은 미소를 지으며 배낭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건넸다. 쉽게 건네기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받았는데 의외로 무거웠다.
“흐읍.”
지환이 숨을 들이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렐돈은 어느새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30분쯤 지난 후 그렐돈은 지환이 들고 가던 주머니를 다시 회수하여 자신의 등짐에 넣었다.
“내가 다 들고 가지. 아직 체력이 다 회복되지 않은 듯하구먼. 아무래도 죽음의 결계에서 충격을 먹었다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아직 많이 힘들겠지.”
“에…… 예, 예.”
지환은 그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느긋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자 지환은 지금까지 생각해 내지 못했던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지환이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려 봤으나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이 문제는 머릿속으로 생각한다고 답이 떠오를 분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렐돈의 음성은 이어지고 있었다.
지환의 발걸음이 늦어지면 뒤에도 눈이 달렸는지 그렐돈의 말이 튀어나왔다.
“자, 열심히 가세나. 위대한 숲의 마을, 엘 샤우도니아가 얼마 남지 않았네. 자네가 우리를 만나게 된 것도 모두 신의 뜻일 터. 숲의 마을의 장로님이라면 자네에게 도움을 줄 걸세.”
선한 미소를 지으며 그렐돈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평소 세파에 찌든 사람들의 얼굴만 바라보다가 그의 사심 없는 얼굴을 보자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예, 예.”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선두에 가장 작은 몸집의 리샤이엘, 그리고 중간에 그렐돈, 마지막으로 지환이 걸어가는 행렬이었다.
2m는 될 법한 그렐돈의 키와 바위 같은 덩치를 바라보며 지환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근데 어떻게 저 사람들과 내가 대화가 통하지?’
아까부터 의아했던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의아했어야 했지만 워낙 자연스럽게 흘러갔기에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환이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들과 자신은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대화가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별로 못 느꼈으나 지금 생각하니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X발. 소노보 비치. 엿 먹어라. 제길슨.”
지환이 살짝 입술을 움직여 몇 가지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앞서 걸어가던 그렐돈이 고개를 돌리며 지환을 향해 말했다.
“응? 무슨 일 있는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환이 별것 아니라는 투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렐돈은 다시 앞을 바라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렐돈의 덩치에 가려 리샤이엘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커다란 등을 바라보며 지환은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나 지환은 지금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지금 나는 분명히 우리말을 하는 게 아니야.’
무언가 달랐다. 한국말을 하지만 한국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 * *

그렇게 지환이 숲의 인도자라 불리는 여자 리샤이엘과 전사 그렐돈을 따라 움직인 지 10일이 되었다. 그사이 지환은 놀라운 점 세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이곳에 현존하는 신비한 존재들에 대한 자각이었다.
처음 그것을 보게 되었을 때 지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어떻게 장작 불길이 불조심 포스터에 나올 법한 완벽한 불꽃 모습을 띠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들과 같이 움직인 후 첫 번째 저녁이 되자 지환은 일전에 자신이 보았던 불빛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게 되었다.
불꽃의 정체는 정령이었다.

밤이 되고 가던 길을 멈춘 일행은 평평한 곳에 노숙할 준비를 했다.
“받게나.”
“예.”
그렐돈이 자신이 지고 있던 큼지막한 배낭에서 거적 같은 직물을 하나 꺼내어 지환에게 건네주었고, 지환은 그것을 받아 바닥에 평평하게 깔기 시작했다.
“엘 리쿰. 사라만다.”
“응?”
문득 기묘한 음성이 들려오기에 지환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리샤이엘이 두 눈을 감은 채 양손을 쭉 뻗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바닥은 절벽처럼 수직으로 세워져 있었다.
‘달밤에 에어로빅 하나?’
그런데 그 순간 리샤이엘의 손바닥에서 저절로 불길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 장작 불꽃의 모양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