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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크마스터 1(10화)
제3장 엘 샤우도니아에 도착하다(2)


사라락.
사락.
갑자기 눈앞의 나무 넝쿨들이 살아 있는 촉수처럼 흔들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홍해 바다가 갈라지듯 좌우로 밀려났다.
“와아!”
지환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커다란 비밀의 화원이 열리는 느낌. 그런 특수 효과를 본다면 흡사 이것과 같을 것 같았다.
사람 키 높이를 능가하는 나무 넝쿨들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로 도열해 있는 수십 명의 엘프들이 보였다.
‘엘프 마을에서 나온 자들?’
여행에서 갓 돌아온 동료나 친구를 맞이하는 것과는 뭔가 격이 달랐다. 지금 저들의 모습은 흡사 군대 사열을 연상케 했다.
그런 엄격하고 장중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출의 한가운데에는 리샤이엘이 있었다.
“리샤이엘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우킨입니다.”
한 남자 엘프가 걸어 나와 리샤이엘을 향해 오른팔을 자신의 가슴으로 꺾으며 당겼다. 정중함과 절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리샤이엘, 돌아왔습니다.”
리샤이엘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녀도 평소의 무표정한 모습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들뜬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가득했다.
척척척.
척척척.
뒤에 도열해 있던 엘프 남자들이 걸어 나왔다. 군대 제식을 보듯이 발이 착착 맞았다. 손에 들고 있는 무기는 없었으나 무언가 위압감이 느껴졌다.
지환으로서는 처음 보는 다수의 엘프들이었기에 눈을 치켜뜨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구별…… 구별이 거의 안 돼. 으음.’
사실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른 것 같았지만 지금 얼핏 봐서는 모두들 비슷비슷하게 생긴 것 같았다.
다들 귀가 뾰족하고 얼굴이 각이 져 있었다. 붕어빵 같은 얼굴들.
그들이 그렇게 해후하는 사이, 지환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표정으로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그렐돈이 앞으로 나섰다.
“반갑습니다. 모두들 여전히 자연의 기운을 잘 받으시는 것 같군요.”
그렐돈의 인사에 리샤이엘을 마중 나온 엘프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광경을 보던 지환은 내심 기겁을 했지만, 그렐돈은 무덤덤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다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자신을 호우킨이라 소개했던 자가 걸어 나와 그렐돈에게 대표로 인사했다.
그러나 리샤이엘을 맞이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무언가 딱딱한 느낌. 그런 것을 지환은 느낄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전사 그렐돈.”
그렇게 운을 뗀 호우킨은 지환을 한번 흘깃 보더니 다시 그렐돈을 향해 말했다.
“그동안 리샤이엘 님과 같이 다니면서 호위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워르크나이 최고위 전사인 당신이 함께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인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인간인 당신이니까요.”
그의 인사에 지환은 리샤이엘을 호위하며 그렐돈이 따라다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의문점이 생겼다.
‘응? 별로 호위한 것 없던데.’
생각해 보면 그렐돈의 역할은 거의 짐꾼이나 마찬가지였다. 등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챙겨 넣고 다닌 것이었다.
‘뭐, 잘 키운 짐꾼 하나 열 호위 안 부럽다……라는 건가?’
지환이 속으로 생각했다.
워르크나이란 명칭이 전사를 뜻하는 것은 어림짐작으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겪어 온 그렐돈의 모습을 보면 그것도 못미더웠다.
자신의 머리를 한 번 두들긴 것을 제외하고는―이것은 여행 도중 그렐돈이 누차 지환에게 사과를 하였다―별로 박력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행 도중 판타지 소설에서 나올 법한 몬스터가 나온 것도 아니었다. 산토끼 한 마리도 못 본 상태.
전사 워르크나이 계급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그렐돈의 활약을 한 번도 못 본 것이다. 더구나 지환이 가장 의구심을 가지는 것은 칼.
전사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무기가 없었다. 처음엔 몰랐으나 자세히 보니 그렐돈에게는 일체의 무기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그렐돈의 솥뚜껑 같은 주먹을 보니 어느 정도 다른 추리는 가능했다.
‘타이슨 펀치가 따로 없네. 저게 무기지 뭐야.’
하긴 저 주먹 한 방이면 남아날 것이 없을 터였다. 아마 박투(搏鬪)를 전문으로 하는 격투가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여전히 찜찜했다.
따지고 보면 밤의 불침번도 리샤이엘이 불러온 정령이 맡았다. 정작 일행을 지켜 온 것은 바로 악을 감지한다는 그 불의 정령이었던 것이다.
물론 불의 정령이 악을 감지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신 서늘한 밤바람을 적당히 중화시켜 주는 역할은 충실히 하였다. 어쨌든 정령의 존재만으로 리샤이엘은 정말 특수한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그렐돈의 역할은 자잘한 짐들을 등에 메고 돌아다닌 일뿐이었다.
즉 훌륭한 짐꾼.
‘나름대로 좋게 생각하자, 좋게.’
그래도 항상 친절했던 그렐돈이었기에 지환은 그에 대해 좋게 평가하기로 마음먹었다.
2m에 육박하는 키, 산더미 같은 몸집, 울퉁불퉁한 근육, 바로 최X만 스타일이었다. 어쨌든 저 덩치만 가지고도 엄청난 위압을 줄 테니 리샤이엘의 여행에 많은 도움을 줬을 터였다.
설령 집적거릴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렐돈을 보고는 겁먹고 다가오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서 여행 도중 아무도 못 만난 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지환 자신이라도, 지금이야 그의 친절함을 알기에 이렇게 편하게 대하지만, 만약 멀리서 바라만 봤다면 겁먹고 접근 안 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그렐돈의 외모만 보더라도 감히 덤비지 못할 것 같았다.
‘좋아. 어쨌든 덩치만으로는 워르크나이인지 뭔지 하는 계급의 전사로 인정.’
지환이 혼자 결론을 내리는 사이, 갑자기 지환을 향해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런데 저쪽은?”
호우킨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지환을 가리킨 것이다. 리샤이엘을 맞이하러 온 엘프들의 시선이 지환을 향해 돌아갔다.
사실 지환에 대해 처음부터 궁금해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회가 없어 못 물어보다가 이제야 물어보는 것 같았다.
여행자 복장 같긴 하지만 색깔이 기묘한 옷―지환의 트레이닝복 차림―그리고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는 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지환이 내심 당황하여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 자신을 설명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신 스스로도 이곳에 왜 있는지 모르고 있는데 남에게 설명하기란 난감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지환을 구원해 주는 음성이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그렐돈이었다.
“장로님께 특별히 부탁할 것이 있는 훈카족 남자입니다.”
그렐돈이 지환을 가리키며 짧게 말했다. 그러자 리샤이엘도 고개를 끄덕이며 추가 설명을 했다.
“우연한 기회에 길을 잘못 든 남방 훈카족 사람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장로님께 부탁하여 그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고자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리샤이엘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의 일행입니다.”
그 말에 호우킨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으나, 이내 고개를 숙이며 리샤이엘의 말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리샤이엘 님의 일행이라면 우리 모두의 친우. 안내하겠습니다.”
그 말에 지환은 속으로 살짝 열이 받쳤으나 지금 상태에서는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이놈이! 그럼 네놈은 지금 이게 일행으로 안 보이냐? 직접 말해야 일행으로 인정하는 거야? 그리고 일행 아니면 떼어 놓고 가려고 했어?’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차별 대우에 지환이 울컥했으나 이내 재빠르게 움직이는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다소 퉁명스러운 태도는 그렐돈을 대할 때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흘깃.
고개를 돌려 그렐돈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신경 안 쓰는 것 같은 태도.
그 모습을 보자 지환은 자신만 좀스러운 마음을 가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뻔했으나, 오히려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 정말 성격 좋네. 나라면 한판 뒤엎는다.’
나중에 어디 한번 두고 보자를 되새기며 지환은 묵묵히 그들을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엇?”
엘프들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하자 뒤가 서늘해지며 무언가 닫히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사라락.
사라라락.
열렸던 입구가 나무 넝쿨과 풀숲으로 어느새 가려져 있었다. 그물같이 오밀조밀하게 다시 입구가 막힌 것이다.
단단한 벽보다도 저런 게 더 뚫고 들어오기 힘들 것 같았다. 만약 들어오려고 마음먹는다면 하나하나 잘라 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것 같은 나무 넝쿨이네.’
조금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지환은 다시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 * *

“후…… 드디어 왔나.”
지환이 목을 살짝 돌렸다. 자신이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상태였다.
엘프 무리의 뒤를 조용히 따라간 지환은 리샤이엘이 감격스러운 듯 눈물을 머금으며 한 남자와 반갑게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다른 엘프들은 그 뒤에 시립하여 있었으나 어느 순간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지환과 그렐돈의 시야가 트인 것이다.
“저자…… 아니, 저분이 장로?”
지환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그렐돈에게 물어보았다.
끄덕끄덕.
그렐돈이 평소와는 달리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답을 대신했다.
‘흐음. 조용히 하라는 무언의 표시인가? 하긴 큰 만큼 귀가 밝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환은 혹시라도 오랜만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며 엘프족의 장로를 바라보았다.
‘장로는…… 보통 나이 많은 자가 하는 것이 아니었나? 아니, 이들은 늙음이란 것의 개념이 없나?’
보통 장로라 하면 머리 하얀 노인을 생각했던 지환이었지만, 지금 리샤이엘과 이야기하고 있는 엘프는 그녀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주저주저.
주저주저.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끝나지 않자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조용히 내뱉었다.
“저 새끼, 뭘 그리 오래…….”
그런데 지환이 말을 내뱉기 무섭게 장로의 시선이 그렐돈과 지환에게로 향했다.
“헉.”
갑자기 장로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지환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으나 속은 뜨끔했다.
뚜벅뚜벅.
리샤이엘과 다른 엘프들의 시선을 받으며 엘프족의 장로가 반대편에서 멀뚱히 서 있는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쓰윽.
엘프의 장로가 다가오자 그렐돈은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는 듯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오른팔을 꺾어 가슴으로 향하게 함과 동시에 몸을 낮추기 시작한 것이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그러나 그렐돈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엘프족의 장로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와서 지환을 잠시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지환은 그렐돈 같은 인사는 하지 않았다. 여전히 멀뚱히 서서 그를 바라볼 뿐. 물론 속으로는 여러 가지 생각이 한창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데 인사는 무슨 인사. 그런데 혹시 내가 저 새끼라고 한 것 들었나?’
역시 입이 방정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환이 잠시 장로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런데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뾰족한 귀에 먼저 눈이 돌아갔다. 정말 참 기묘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밤에 본다면 괴물로 오인하기 딱 좋은 모습.
부릅.
‘저 새끼가 갈구네?’
갑자기 장로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깨달은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쓰윽.
지환이 눈여겨본 엘프들의 평균 키는, 남자가 전체적으로 비슷비슷하게 170 정도인 것 같았다.
그리 크지 않은 키.
리샤이엘이 대략 165 정도였다. 아마 여자들은 그 정도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렐돈과 같이 걸어갈 때에는 미녀와 야수의 한 장면이 떠올랐지만, 어쨌든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눈높이 정도밖에 안 오는 엘프족의 장로가 빤히 자신을 쳐다보자,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며 그를 쳐다봤다.
부릅!
화라락.
‘어엇!’
하지만 지환은 역시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옛 진리를 깨달았다. 엘프족 장로와 시선이 마주치자 지환은 무언가 보이지 않는 압박이 자신의 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으으음…….’
흡사 물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점차 수압이 높아져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
“으으…….”
문득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옆을 조심스레 보니 그렐돈이 이마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마 지금 저 엘프족 장로가 뿌리는 기운이 자신과 그렐돈에게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뭐한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고, 엄하게 그렐돈도 지금 장로가 쏘아 내는 기운에 같이 휘말린 것 같았다. 물론 지환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