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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크마스터 1(11화)
제3장 엘 샤우도니아에 도착하다(3)
와락.
지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왜 엘프족 장로가 이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백수는 허리가 부러질지언정 굽지는 않는다. 그것이 나름대로 지환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이내 지환의 신공(?)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배 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배 째라다.’
처음엔 쭈뼛했으나 이내 무감각하게 그것을 흘려보냈다. 일명 ‘배 째라’ 신공의 발휘. 기운을 쏘아 내든 말든지 간에.
그냥 무시했다.
‘째려보든지 말든지 간에 무시하면 그만이다.’
얼굴 철판 및 사람 시선 무시하기는 백수 생활 몇 년 만에 이미 12성까지 달성한 상태.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뭔 개가 쳐다보나 보다 하는 심보로 마음을 비우니, 어느새 점차 몸을 감싸는 기운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았다.
“훅. 훅.”
그러나 ‘무시하기’라는 방법을 사용해 기운을 흘려보내던 지환과 달리, 옆에 있던 그렐돈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덜덜덜.
어느덧 지환은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으나, 그렐돈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지환이 그렐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음을 편하게 하세요, 그렐돈.”
“……!”
그렐돈이 이마에서 땀을 흘리자 지환은 그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이 저를 왕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가 모든 사람들을 왕따시키는 것입니다. 알겠죠?”
“응?”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식의 그렐돈의 표정에 지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단어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해 줄 필요가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 세상이 자신을 신경 안 쓰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신경 안 쓰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이미 공무원 공부 몇 년 사이에 극히 일부의 친구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연락이 끊긴 지환이었다.
그냥 세상과 단절되어 사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저 장로라는 자가 뿌려 대는 기운에 몸이 좀 눌리는 것 같았으나, 그냥 쳐다보든 말든 나는 내 갈 길을 가련다라는 생각으로 무시해 버리니 금방 몸이 괜찮아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렐돈까지 그 기운에 압박을 받는 것 같자 지환이 나름대로 그것을 극복하는 오의(奧義)(?)를 설명해 준 것이다.
“마음에 달린 것? 마음에 달린 것이라…….”
지환의 이야기를 듣던 그렐돈은 문득 크게 깨달은 바가 있다는 듯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모든 것은 마음에 있나니…….”
그렐돈이 그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점차 그의 표정도 밝아지기 시작했다.
‘대충 지껄였는데 어찌어찌 통하네?’
사실 말을 꺼낸 지환도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감이 안 왔지만, 이심전심이라고 그렐돈이 알아서 잘 해석해서 대처하고 있었다.
그 순간 지환은 그렐돈과 자신을 감싸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거참 환영 인사치고는 고약하네. 기선 제압인가? 외부에서 왔으니 까불지 말라는?’
어쨌든 입구부터 툴툴댄 녀석을 시작해서 리샤이엘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가 뾰족해 대충 엘프가 아닐까 생각할 뿐, 생긴 것도 노는 것도 마귀 같은 자들이었다.
“우라 본 쿠라츔.”
엘프족 장로가 조금 더 다가와 지환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러나 난생처음 들어 보는 소리에 지환은 눈만 껌벅이며 바라볼 뿐이었다.
지환이 반응이 없자 장로는 드디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이번에는 지환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였다.
“반갑습니다.”
그러자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장로가 화답했다.
“혹시 악한 기운이 있나 싶어 확인을 했습니다. 외부인에 대한 의례적 절차이나 혹 부담이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장로 라디오프라고 합니다.”
악한 기운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는 장로 라디오프의 말에 지환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일단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으로서는 자신은 그저 식객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아, 예.”
그렇게 말하며 지환은 눈동자를 굴렸다.
‘응? 그럼 그렐돈은 왜?’
역시 뭐한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은 건가 하고 생각하며 지환이 머리를 굴렸다.
그사이에 장로 라디오프는 고개를 돌려 멀뚱히 서 있는 그렐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시선을 받은 그렐돈이 다시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전사 그렐돈,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였습니다.”
그렐돈이 한 손을 정중히 가슴으로 올리며 인사했다. 조금 전에 당황하며 땀을 흘리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당신에게는 위대한 고대의 이름, 엘프의 언약으로 만족할 만한 포상을 치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귀가 쫑긋했다.
‘엘프? 진짜 엘프였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 짝퉁들!’이란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에 내뱉을 수는 없었다.
사락.
삭.
엘프란 단어가 나오자 갑자기 주변의 모든 엘프들이 경건한 단어를 들었다는 듯 몸을 가다듬으며 경청하는 태도를 취했다.
지환은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엘프란 단어가 이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신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차기 장로 선발을 위한 예행의 길. 이 땅을 돌아다니며 모든 문물을 섭렵하는 지난 3년간의 여행이 부디 보람되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3년이나 여행을 다녔다는 말에 지환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3년이나 저 여자 따라다니며 호위…… 아니, 짐 들어 준 거야? 대단하다.’
적어도 3년이라는 시간을 써 가며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대단한 책임감이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장로가 고마워할 만도 했다.
“샤우도니아의 천년수 그라나다, 그 신성한 거목 아래에서 차기 장로 리샤이엘의 여행 경과를 듣고 준장로의 지위를 수여하는 의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차기 장로란 말에 지환의 눈이 동그래졌다. 일단 여자가 장로란 말에 조금 놀랐고, 또한 리샤이엘이 엘프족을 다스리는 장로가 될 신분이었다는 것에 흠칫한 것이다.
‘하긴 그랬으니 다른 엘프들이 입구에서부터 그리 정중했구나.’
우르르.
어느새 장로 라디오프는 다시 엘프들의 무리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리샤이엘은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온 선수가 퍼레이드를 하듯 움직였다.
“가세나.”
그러자 그렐돈도 성큼성큼 움직이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서 있던 지환도 움직였다.
‘또 걸어가야 하는 거야? 좀 쉴 곳도…….’
쏴아아.
“엇.”
몇 열로 정렬하며 걸어가던 도중 갑자기 주변이 빠르게 움직였다. 지환이 지각하는 자신의 이동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주변 풍경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두리번거리며 지환이 둘러보자, 지금 밟고 있는 것은 잔디가 아니라 처음 입구에서 보았던 것 같은 오밀조밀한 나무 넝쿨임을 알게 되었다.
흡사 양탄자를 깔아 놓은 것 같은 재질. 그것이 지면을 물결처럼 흐르며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즉 자신의 보행 속도와 지금 밟고 있는 나무 넝쿨들이 움직이는 속도가 더해져 빠른 이동 속도가 나오고 있었다.
지하철의 이동식 보도를 걸어가는 느낌.
“빠르다.”
또 걸어간다기에 이 먼 거리 어느 세월에 가는가 하고 걱정했는데, 참 신기하게도 지하철역에 온 느낌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새 다른 이들은 걷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지환도 이대로 더 걸어가면 그렐돈과 부딪치기에 걸어가던 것을 멈추었다.
휘익, 휙.
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구조였다.
‘이것도 정령인가 뭔가를 사용하는 방법인가?’
지환은 주변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작동 원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이곳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야 마음 놓고 주변을 돌아보니 참 신기한 구조였다. 양옆으로 커다란 나무들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빽빽한 나무숲.
“어둡지가 않아?”
이런 곳은 어두워야 정상일 터였다. 물론 당연히 처음에 들어왔을 때에는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은 지환이었다.
언제나 도시의 조명에 익숙해져 있던 지환. 현대 도시인에게 있어서 밤의 어둠은 이미 옛말이 된 터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현대 문명의 조명 시설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지환은 고개를 돌려 이곳이 어둡지 않은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발견했다.
반짝반짝.
화라락.
‘나무들을 따라…… 빛이 나오고 있어.’
조명을 대신하여 주변의 나무 사이사이로 은은한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흡사 자연 발광을 하는 것 같은 모습.
저 빛 하나하나가 뭉쳐서 흡사 새벽과도 같은 환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감상하던 지환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자 그의 눈앞에 커다란 갈색의 성벽이 보였다.
“응? 숲에 성벽? 아니, 목책인가?”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지환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질렀다.
“와아!!”
한국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아니 영화나 사진을 통해 본 미국에 있다는 엄청 큰 나무와 비교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엄청난 나무가 보였다.
지금 보이는 것은 그 나무의 밑동. 그 위로 솟은 줄기와 가지 모두 거짓말처럼 거대하기만 했다.
“저게…… 나무? 혹시 63빌딩에다가 나무 치장 씌워 놓은 것 아니야?”
흡사 거인이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환이 놀라 입을 딱 벌리자 옆에서 그렐돈이 설명을 해 주었다.
“위대한 숲의 마을 엘 샤우도니아의 천년수(千年樹), 그라나다일세.”
“천년수? 그라나다?”
제4장 생리 욕구를 해결하라(1)
지환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어 보자 이제 훌륭한 여행 가이드로 변신한 그렐돈이 설명을 해 주었다.
“이 땅의 모든 악한 기운을 정화하며 엘 샤우도니아에 신성한 힘을 불어넣는 존재. 수천 년간, 아니 태초에 이 대지가 생겼을 때부터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고 전해지는 신성한 존재이지.”
그 말을 듣자 지환은 살짝 눈을 돌려 엘프들의 표정을 눈여겨보았다.
‘무슨 종교 성전에 예배 드리러 가는 사람들 같은 표정이네.’
하나같이 매우 굳은 표정. 똑같이 비슷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신실함이었다.
‘숲의 인도자들에게 있어서 천년수 그라나다는 그들이 믿고 있는 신과 같은 존재인가?’
자연 환경, 신성한 나무들을 섬기는 애니미즘 사상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으나 물론 그런 것에까지 생각이 돌아간 지환은 아니었다.
지환은 자신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을 생각했다.
‘대충 토X로에서 나오는 장면과 비슷하네.’
애니에서 보던 장면을 생각했다. 거기 나오는 거목이 떠오른 것이다. 물론 지금 보이는 것은 그것보다도 훨씬 컸다.
사라락.
그 와중에도 이동식 나무 넝쿨은 재빠르게 움직였고 이내 일행은 그 천년수 그라나다에 도착하게 되었다.
“자, 이리로. 그렐돈 님.”
한 엘프가 다가와 그렐돈을 안내했다. 리샤이엘은 어느새 다른 엘프에게 이끌려 가서 보이지 않았다.
“저, 저는요?”
지환은 그나마 말동무를 할 수 있는 그렐돈이 다른 곳으로 불려 가게 되자 멀뚱멀뚱한 태도로 물었다.
하지만.
“그렐돈 님, 어서 이리로. 곧 식이 시작됩니다. 성스러운 여행의 증인으로서 참석해 주시면 됩니다.”
“에…… 예, 예.”
갑자기 양옆으로 엘프 두 명이 다가와 팔을 잡아끌자 그렐돈은 지환에게 말도 못 붙이고 빠르게 움직였다.
지환의 말은 그냥 무시되었고 결국 혼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