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코크마스터 1(15화)
제5장 그라나다, 무너지다!(2)


배설의 때.
이 땅의 인간들과 유사인종이 죽기 직전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
죽기 며칠 전부터 배설의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삶을 정리하고 죽음의 때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보통 각 지역마다 무덤과 같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오래된 관습에 따라 그 공간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어 있었다. 즉 감옥과도 같은 구조였다. 누구도 그 시체에 접근 못하는 구조.
수백 년을 사는 엘프족들도 생의 마지막 때가 있는 것은 인간과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신성수 그라나다의 커다란 공간에 자신들의 마지막 삶을 바쳤다.
그래서 이번에 엘프족 장로 라디오프도 지환에게 엘프족과 같이 천년수 안의 공간을 할당한 것이었다.
“자, 그럼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이제 식을…….”
장로의 말에 엘프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소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그들로서는 외부에서 온 인간 하나의 죽음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물론 천년수의 신성한 공간에 인간의 공간을 하나 할당한 것은 다소 못마땅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다들 그냥 넘어가고 있었다.
스륵.
슥.
다시 제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곧 모습을 갖추고 완성될 터였다.
어느새 조금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이곳.
하지만 장로는 아직도 마음 속 깊이 잘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는 듯 지환이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았다.
‘지환이란 인간은 비록 고통스러워하고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표정이긴 하였으나, 그건 죽음의 공포와는 조금 달랐는데…….’
배설의 시간을 위해 마련해 준 공간을 보는 순간, 지환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는 행복한 표정.
결코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반응이 아니었다.

* * *

지환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쌀 때야 시원하게 쌌는데 급하게 온다고 미처 닦을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지환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신고 있던 양말로 향했다.
“안 돼. 이건 안 돼.”
지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빨아서 다시 신기도 곤란했다.
보이는 물이라곤 아까 본 신성수라는 옹달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거기서 똥 묻은 양말을 빨았다가는 아마 엘프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국 버려야 하는데, 양말 없이 신발을 신고 다니기는 곤란했다. 보드라운 면에 익숙한 현대인의 발이 그것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지환으로서는 어떻게든 지금 지니고 있는 문명의 이기들은 최대한 보존해야 했다. 갑자기 길거리에서 쌓아 놓고 파는 화장지와 양말이 그리워졌다.
“제길, 어떻게 하지?”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반쯤 일어선 지환이 중얼거렸다.
치이이익.
치치직.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지환의 똥은 흡사 염산이 녹아들어가듯 바닥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물론 엉거주춤한 기마 자세로 대책을 궁리하고 있던 지환으로서는 그런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 일단 좀 말리면서 생각을…….”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다가 지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기적어기적 기마 자세를 유지한 채 반대편 끝으로 가기 시작했다.
우선 양말은 최후의 수단이라 내버려 두고 혹시 휴지 대용으로 쓸 나뭇잎 같은 것이 없는지 둘러보기 시작한 것이다.
일전에 숲에서 일을 보려 했을 때엔 나뭇잎 몇 장이라도 준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 급하게 오는 바람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것이었다.
“휴지……. 휴대용 크리넥스 자판기라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며 지환은 웅얼거렸다. 이대로 마르면 좀 괜찮아질까, 라고 생각했으나 스스로가 참 처참해지는 것 같아 일단 더 뒤져 보기로 했다.
“어엇!”
순간 지환의 눈에 은색의 줄기가 보였다.
졸졸졸.
“물? 아니, 이건…… 수액?”
이곳은 나무 안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갈색의 벽은 그 신성한 나무 그라나다일 터였다.
그리고 지환의 머리 굴림으로는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라곤 수액밖에 없었다.
“허어, 신기한 일이로고. 흡사 물 같군.”
지환은 다시 한 번 고답적인 말투로 중얼거린 후 그것을 잘 살펴보았다. 대충 무릎 높이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지환의 머리를 강타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게 바로 자연의 비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물만 있다면 어찌어찌 씻어 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구멍은 너무 작았다.
‘구멍을 조금 더 크게 파면 더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지환은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맥가이버 칼이 나왔다.
지환은 맥가이버 칼에서 칼날을 세워 날을 잘 살펴보았다.

[STAINLESS]

제조국이 적혀 있을 법한 위치에는 저 문구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물론 스위스제가 아니라 제조국 불명―지하철에서 판매하는 아저씨는 국산 창고 방출이라 했지만―의 2,000원짜리 맥가이버 칼이지만 어느 정도 효용은 있을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서걱서걱.
서걱서걱.
지환은 재빠르게 구멍을 깎아 나갔다. 의외로 나무가 물렁물렁 했는지 밀어 넣으면 밀어 넣는 대로 구멍의 크기가 커졌다.
쏴아.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나오는 물의 양도 점차 늘어났다.
주룩주룩.
“와. 살았다.”
지환은 수도꼭지를 튼 것 같이 물이 흘러나오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만든 자연 비데를 이용하여 간단히 씻기 시작했다.
“앗, 따거. 따거. 따거.”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는 느낌이 났다. 지환은 따끔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깨끗하게(?) 씻기 위해 애썼다.
며칠 만에 시원하게 쌌던지라 깔끔하게 씻어 낼 수 있었다.
“제길. 무슨 군대도 아니고…….”
정말 훈련소 생활 이후로 이런 일을 또 겪을 줄 몰랐던 지환이었다. 옛날 화장지 없던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지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으.”
이 문제도 어찌어찌 해결이 되자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젖은 것을 말리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제 콜라도, 초콜릿도, 피자도, 핸드폰도, 휴지도, 인터넷도 안 되는 세상에 떨어진 것이었다.
무인도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
지환으로서는 정말 막막했다.
“내가…… 천벌(天罰)을 받은 건가?”
무슨 무개념 마스터 운운할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평소 개념 없이 되는 대로 시간을 죽이며 살아온 자신이었다.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래!’를 외치고 다니던 지환이었는데, 정말 이대로라면 괴로워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다.
사실 어제부터 콜라가 마시고 싶어 심장이 벌렁거리는 지환이었다. 카페인의 금단증세가 온몸을 비비 꼬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잠시 숨을 고르던 지환은 이내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신이 모든 이들 앞에서 뭐라고 소리쳤는지 기억한 것이다.
“아, 쪽팔려.”
지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도대체 내가 미쳤었나? 똥이란 이야기를 그렇게 대 놓고 외치다니.”
정신이 드니 자신이 엄청나게 쪽팔린 말을 서슴없이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차마 그렐돈이나 리샤이엘을 볼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화장실 있으면 진작 보내 줄 것이지. 그 라디오프인지 라디오인지 하는 녀석, 무슨 심보야?”
엘프족들. 귀 뾰족한 것들과는 상생이 맞지 않는다고 지환이 투덜댔다. 진작 여기 넣어 줬으면 리샤이엘 앞에서 쪽팔린 짓 안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우르릉.
우르르르.
“응? 뭐, 뭐야?”
지환은 갑자기 지면이 조금 흔들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지진?”
하지만 지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흡사 무슨 생명체가 트림을 하거나 또는 괴로워서 몸을 비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치이이익.
치익.
“뭐야?”
지환은 그제야 건너편 멀찍한 곳에서 뭔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불이 난 줄 알고 긴장했으나 불에 타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아니었다. 흡사 화학 약품이 물건을 녹일 때 발생하는 연기 같았다.
이제 아래가 어느 정도 말랐기에 지환은 트레이닝복 바지를 끌어올린 후 조심스럽게 연기가 발생하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 이게 뭐야?”
지환의 눈에 뻥 뚫린 공간이 보였다. 불에 탄 것처럼 주변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그 아래로 구멍이 쭉 뚫려 있었다.
“무슨 산성 용액을 들이부은 것도 아니고…….”
혀를 내두르며 지환이 중얼거렸다. 영화에서 외계인의 산성 용액이 금속을 녹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름이 20cm 조금 넘어 보이는 구멍이었다. 지환이 머리를 집어넣으면 쏙 들어갈 것 같았다.
쑤욱.
자세를 낮춰 그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깊고 깊은 어둠이 보였다. 다만 이 벽처럼 반짝거리는 이끼 같은 것들이 군데군데 묻어 있어서 대충이나마 거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와! 끝이 없다.”
뭐, 돌 같은 것 없나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딱히 마땅한 것이 없었다. 한번 던져 봐서 깊이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울리는 진동으로 지환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르르릉.
우르릉.
“와앗.”
쿠당탕.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지환은 지금 바닥이 녹아들어 간 자리가 조금 전 자신이 똥을 눈 곳이란 것을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무서운 음향 효과가 귀를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쿠르르르.
‘응? 이 소리는?’
흡사 영화에서 효과음으로 잘 나오던 소리였다. 바로 주인공이 밀실에 갇혀 있거나 통로를 걸어갈 때 등 뒤에 밀려오는 폭포수와 같은 물소리.
“하하. 무슨 물이 여기…….”
하지만 지환은 이내 무언가 구멍 아래에서 밀고 올라오는 것을 확인했다.
반짝반짝.
어둠 속에서 흰색의 파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저게……? 흐아악!”
아래에서부터 물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점차로 색이 뚜렷해지며 힘차게 올라오고 있었다.
두리번두리번.
그제야 지환은 이곳에 ‘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령인지 마법인지를 써서 자신을 이곳에 밀어 넣고 벽을 만들어 닫아 버린 것이다.
“우와아아!”
쾅! 쾅!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패닉 상태에 빠져 자신이 들어왔으리라 짐작되는 나무 벽을 두들겼으나, 그저 공허한 소리만 날 뿐이었다.
단단한 쇠를 두들기는 느낌, 아무런 티도 나지 않았다.
콰콰콰콰!
흡사 폭포수가 떨어지듯 지환의 귓가에 천둥 같은 소리가 점차 가까이 들려왔다. 이곳에서 익사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지환의 머리를 강타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온 거야!’
몇 번을 두들기던 지환은 어디까지 물이 치솟아 올라왔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구멍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퍼억.
“으악!”
그 순간 구멍에서 치솟아 오른 물에 정통으로 턱을 얻어맞은 지환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작은 구멍에서 치솟아 오른 물의 압력은 흡사 강력한 물 대포와 같았다.
‘으윽. 설마 이것…… 급하다고 아무 곳에나 싸 버렸다고 천벌을 받은 것인가?’
그것을 마지막으로 지환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