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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크마스터 1(16화)
제5장 그라나다, 무너지다!(3)


둥둥둥.
작은 공간. 그곳은 어느새 찰랑거리는 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천년수의 수액.
처음에 지환의 몸은 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액에 의해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그러나 조그만 방에 수액이 절반 정도 찼을 때.
사라락.
차원의 입구가 열리듯 조금 전 조그맣게 수액이 흘러나오던 벽이 서서히 열렸다. 그러자 넘쳐 나온 수액들이 그곳으로 통해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수액에 둥둥 뜬 채로 기절한 지환도 그곳에 실려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스르륵.
그리고 점차 지환의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살이 점차 빨라지며 어느새 몸은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다.
지환 익사?
그러나 지환은 익사한 것이 아니었다.
삶의 기운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고 호흡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곳은 물이 아니라 천년수의 수액이었기에 언제나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지환의 몸에 접촉한 수액이 몸의 여러 구멍을 타고 흡수가 되었고 지환에게 충분한 산소를 공급해 주고 있었다.
부글부글.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환의 온몸에서 기포가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지환이 입고 있는 옷이 설탕 녹아 가듯 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나체가 된 지환.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온몸의 땀구멍을 통해 검은 물질이 새까맣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잉크가 확산되듯 뿜어져 나온 검은 물질은 흡사 접착액처럼 지환이 지나간 통로 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면 그 부위는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에서 나오는 검은 액의 색깔이 조금씩 연해질 때까지, 지환의 몸은 수액이 흐르는 좁은 수로 안에서 빠르게 이동했다.
흡사 정수기의 여러 여과 장치를 지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약 1시간 정도, 지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양의 검은 액체를 뽑아내었다. 그러는 와중 지환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찌직.
찍.
복부 부근의 피부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평소 많이 먹고 절대 안 움직이는 생활을 한 덕분에 엄청난 양의 지방질이 쌓여 있는 부위였다.
더구나 현대 가공 식품과 패스트푸드에 엄청난 양이 사용되는 트랜스 지방.
패스트푸드와 가공 식품으로 식사를 때울 경우가 많았던 지환으로서는 엄청난 지방을 뱃속에 저장해 둔 상태였다.
특히 옆구리 살과 복부 살은 거의 항아리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 부위가 용트림을 하듯 바들바들 떨렸다.
지환이 가진 엄청난 무게의 체지방. 현대인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위였다.
그러나 사실 체지방 자체는 에너지원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연료나 다름없는 부위. 그러나 그것도 많으면 문제가 된다.
몸에 영양이 과잉되면 그것은 간에 글리코겐으로 저장된다. 그리고 유사시 사용하게 되는데, 이때 당장 쓰이지 않으면 지방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것이 쌓인 것이 체지방.
즉, 많이 먹는다고 해서 체지방이 증가하는 것은 딱히 아니다.
군대 훈련병 때 산더미처럼 밥을 먹어도 항상 배고픈 것처럼, 먹고 먹은 만큼 움직여 지방을 태우면 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먹기는 많이 먹어도 그것을 움직여 쓰지 않으므로 그런 영양분이 고스란히 체지방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지금 거미인간처럼 볼록 튀어나온 지환의 배와 옆구리 살은 콜라, 초콜릿, 피자, 포카칩 등을 밥처럼 먹고 절대 운동이란 것을 안 한 방구석 폐인으로서 당연히 나타난 결과였다.
그런데 지금 몇 년간 충실히 지환의 몸을 지켜 온(?) 지방 덩어리들이 흐물흐물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쫘악.
떨어져 나간 지방덩어리들은 물에 녹지도 않고 그저 노란 액으로 형체를 유지하며 흘러 흘러 사라졌다.
어느새 지환의 몸은 빙글빙글 돌아 천년수의 중심 핵(核)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환의 몸에서 이번에는 붉은 물결이 흘러나왔다.
누가 본다면 피가 나온다고 기겁을 할지도 몰랐으나 점차 그 색깔은 분홍빛으로 변해 갔다. 피는 아니었다.
이것도 아까의 검은 물질처럼 빠르게 수액이 지나는 벽에 흡착되었다. 하지만 아까의 검은 물질보다도 더 독한 것 같았다.
아까의 검은 물질은 그래도 수액을 감싸는 벽들이 견뎌 낸 것 같았는데 이번 물질은 달랐다. 그것이 벽에 닿는 순간 벽이 녹아들었고 구멍이 뚫렸다.
수로에 구멍이 뚫리게 되자 수액이 그곳으로 일부 넘쳐흘렀으나, 그 순간 새롭게 벽이 구성되며 뚫린 부위를 막았다. 하지만 점차 재생되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천년수가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지금 지환의 몸에서 마지막으로 나오고 있는 물질. 그것은 합성된 식품 첨가물이었다.
식품 첨가물이란 보통 식품의 제조 과정에서 식품의 가공 또는 보유 목적으로 식품에 첨가, 혼합, 침윤, 기타 방법에 의하여 사용되는 물질을 말한다.
원칙적으로 현대 인간이 섭취하는 음식에는 화학 물질을 넣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예외적으로 가능한 것이 식품 회사에서 넣는 식품 첨가물이다.
식품 첨가물의 종류를 보면 방부제, 화학조미료, 착색제, 발색제, 탈색제, 살균제 등이 있다.
음식을 보다 맛있게 그리고 맛있어 보이게, 거기에다가 오래 보존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인공적 화합물이다.
실제로 1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의 5kg 이상을 섭취하게 된다는 보고도 있다. 그만큼 현대인이 먹는 음식 중 대다수에 화학적으로 만든 식품 첨가물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품 첨가물은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식품 첨가물이 몸에 쌓이게 되면 결국 신경계에 무리가 올 수 있거나 또는 여러 가지 아나필라틱 쇼크(Anaphylactic shock)의 위험이 증가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식품 첨가물이 듬뿍 들어간 음식만 주로 먹은 지환이었기에 체내에 엄청난 양의 화합물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동안 쌓인 식품 첨가물들이 지환의 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쭈우욱.
지환의 피부는 어느새 아기 피부처럼 새하얘져 있었다.
그동안 피부에 쌓인 공기 중의 오염 물질들이 1차적으로 씻겨 나갔고, 그 이후 땀구멍을 통해 몸 안의 탁한 기운이 흘러나간 상태였다.
그리고 지환의 몸에 쌓여 있던 엄청난 양의 체지방. 현대인들은 지방 흡입 수술을 받아야 일부라도 간신히 제거 가능한 그 무시무시한 지방덩어리들은 치즈가 녹아서 떨어지듯 지환의 몸에서 빠져나간 상태였다.
또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
지환이 알게 모르게 섭취했던 엄청난 양의 식품 첨가물들.
신경계를 교란할 수 있는 식품 첨가물들이 몸 밖으로 배출된 상태였다. 한번 쌓이면 몸 밖으로 여간해서는 배출되는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여과 과정을 거쳐 지환의 몸에서 해로운 성분들이 상당수 빠져나간 것이다.
태어났을 당시의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
쓰으윽.
어느새 정신을 잃은 지환의 몸은 섬처럼 생긴 곳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거대한 수목 안에 이런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천년수의 핵에 해당하는 곳. 아직 누구도 들어와 본 적 없었던 그라나다의 상층부에 지환의 몸이 도달하였다.
우우웅.
천장에 박혀 있는 푸른색의 보석이 떨리기 시작했다. 흡사 지환의 방문을 맞이하는 모습. 그리고 그 순간에도 파란 혈관처럼 이어진 기다란 관들이 그 보석을 감싸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어오는 탁한 기운이 그곳을 통해 정화되고 있었다. 천년수 그라나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필터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웅.
“아악! 아, 아파.”
이동하던 지환의 머리가 정확하게 중앙에 위치한 바위의 뾰족 튀어나온 부위에 부딪쳤다.
물론 속력은 많이 감소되었지만 누가 본다면 일부러 정확하게 맞춘 것처럼 지환의 머리 꼭대기에 정통으로 부딪친 것이다.
덕분에 지환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컥, 컥. 헉! 여기는 또 뭐야. 왓! 내 옷.”
머리에 충격을 받는 순간 지환이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두리번거리며 옷을 찾았다.
싸한 느낌에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깨달은 것이다. 옷이 없으니 피부가 바로 바람을 맞게 된 것이다.
“이건 또 뭐야. 제길.”
이전에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홀로 풀숲에 덜렁 남겨진 상태. 이번에는 벌거숭이가 된 채 이상한 암초 바위처럼 생긴 곳에 덜렁 남겨진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잔잔한 물이 흐르고 있는 공간.
파앗.
“으윽. 이건 뭐야.”
물, 엄밀히 말하면 천년수의 수액에서 빠져나와 바위 위로 올라온 지환은 갑자기 눈앞에서 빛이 번쩍거리자 고개를 돌리며 빛을 피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본능적으로 하체를 가렸다. 몸을 가릴 만한 옷이 필요했던 것이다.
“옷이 필요하겠군요. 엘프족의 옷이지만 당신에게도 어울릴 것입니다.”
“응?”
갑자기 빈 공간에서 마이크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
빛도 사라졌기에 지환은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지환의 눈앞에 잘 개인 옷이 보였다.
두리번두리번.
조금 전까지 있었던 빛도 사라지고 난데없이 옷도 나타나자 지환은 어이없었지만 이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조금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지를 입으려 하자 자신의 배가 매우 허전해진 것을 느낀 것이다.
“왓!”
고등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간 것 같은 허리. 28인치의 날씬한 허리가 되어 있었다. 지환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놀라 한 번 소리친 후 자신의 옆구리와 복부를 만져 봤다.
탱글탱글.
그러나 만져지는 것은 탄력 있는 근육, 군살 없는 옆구리였다. 지난 몇 년간 급격히 늘어난 복부 지방이 만져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이지?’
어느 순간부터 지환이 느끼는 백수의 법칙.
무어의 법칙―마이크로 칩의 밀도가 18개월마다 2배씩 증가―과 황의 법칙―반도체 메모리의 용량이 1년마다 2배씩 증가―을 능가하는 이론으로, 백수의 체지방은 끝없이 증가하며 결국은 옆구리와 뱃살이 서로 하나가 되어 항아리가 되어 간다는 이론이었다.
이게 12성까지 달성되면 가만히 있어도 숨쉬기가 힘들어 지게 되는데, 현재 지환은 근 8성에 달하여 서서히 숨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눈을 떠 보니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몇 리터에 달하는 지방이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다.
펄쩍펄쩍.
지환이 한번 제자리에서 뛰어 봤으나 여전히 몸에서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덕더덕 달라붙어 있던 체지방들은 이렇게 몸이 뛰면 출렁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곤 했다. 하지만 이제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섬주섬.
바깥의 엘프족들이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옷을 입으며 지환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한번 지방 제거 수술 받으려고 마음먹긴 했는데…… 갑자기 살이 빠지다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신을 잃고 있던 지환으로서는 자신의 체지방들이 몸에서 쭈욱 빠져나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힐긋.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지환은 팔다리, 가슴을 살펴보았다.
아주 깨끗했다.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약간 거무튀튀해졌던 색깔이 싹 사라지고 어렸을 때 만져지던 아기 피부로 돌아가 있었다.
꽈악.
혁대 대신 끈으로 허리를 잡아매며 지환이 혀를 내둘렀다. 가느다란 허리가 아직도 어색했다.
“무슨 무협 소설에 나오는 환골탈태(換骨奪胎) 같은 것? 설마 그런 건 아닐 테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시간이 별로 없으니 설명해 드리죠.”
“왁!”
갑자기 등 뒤에서 아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기에 지환은 놀라 소리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넌 누구지?”
지환의 눈에 자신의 허리 높이 정도 오는 아이 하나가 보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안 가는 신기한 얼굴을 가진 아이.
하지만 지환은 본능적으로 이 아이가 조금 전 자신에게 말을 건 존재임을 느꼈다.
“당신을 정화시키느라 너무나 많은 힘을 소모했습니다.”
“응?”
갑자기 정화란 말이 나오자 지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자신의 뱃살이 홀쭉해진 것이 바로 이 아이와 관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저는 그라나다. 이 땅의 탁한 기운을 정화하는 존재입니다.”
그제야 지환은 그렐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천년수 그라나다, 그 존재가 실체화되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나무가…… 사람의 모습을?”
이곳에 와서 엄청 쓴 물, 호두 열매 같은 작은 식사, 엘프 등 별의별 것들을 다 보았지만 나무귀신(?)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가 어린아이의 모습이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