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코크마스터 1(17화)
제5장 그라나다, 무너지다!(4)


“시간이 별로 없어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어?”
우르릉.
“어엇.”
갑자기 땅이 한번 진동했다. 지환은 그것이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느꼈던 진동이란 것을 기억해 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지환이 그라나다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마족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니, 아직 누구도 겪어 본 적 없는 마왕과 같은 존재지요.”
“뭐? 마왕?”
지환이 눈을 껌벅였다. 그리고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내가 왜 마왕인데!”
간혹 읽었던 판타지 소설에서는, 어찌어찌하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인물들은 용사, 영웅, 적어도 그런 부류였다.
갑자기 마왕이란 명칭을 듣자 억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이곳에 와서 오히려 고생만 했다고!”
지환이 기억을 되새기며 외쳤다. 난데없이 수풀에 떨어지고 나서부터 쫄쫄 굶으며 헤매기만 했고, 겨우 리샤이엘과 그렐돈을 만나 밥을 얻어먹으며 이곳까지 온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처음에는 그렐돈에게 한 방 얻어맞기까지. 또 엘프의 숲에 와서는 눈칫밥만 먹으며 지낸 것이다.
지환이 생각하고 있는 마왕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깨끗한 사람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마왕은 아니라고.”
지환이 서둘러 말했다. 그러자 지환을 빤히 보던 그라나다가 말했다.
“당신은 죽음의 결계에 떨어지는 바람에 몸 안의 독기(毒氣)를 많이 해소했습니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죠.”
“응?”
“덕분에 리샤이엘과 그렐돈은 며칠간 당신과 같이 여행하면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결계?”
지환이 머리를 굴렸다. 몇 번 들어 본 단어였다. 일전에 그렐돈과 리샤이엘이 자신이 지나온 곳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그…… 풀숲?”
그제야 지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자신이 떨어져 헤맨 풀숲. 그곳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설마 거기가 죽음의 결계? 난 끄떡없었는데?”
지환의 말에 그라나다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은…… 죽음의 결계는 오히려 당신의 몸에서 악한 기운을 빨아들이는 역할을 했지요. 그 때문에 오히려 죽음의 결계 상당 부분이 손상당했습니다. 그 이후 죽음의 결계는 당신으로부터 기운을 섭취하는 것을 일절 중단하고 최대한 몸을 사리게 되었지요. 스스로 오염되지 않도록 자기 방어를 한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데?”
지환은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라나다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지환을 똑바로 가리키며 말했다.
“동쪽으로 가세요. 저를 무너뜨린 대가는 그것으로 받겠습니다.”
“뭐?”
갑자기 무너뜨렸다느니 대가라는 말이 나오자 지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그저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마검 카라이안.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마검?”
“그것을 동쪽 끝에 있는 숨겨진 천년수에 재봉인을 해 주세요. 복구 상태로 들어간 저는 더 이상 그 마검의 기운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기운을 억눌러?”
“예.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저를 붕괴시킬 정도의 강력하고 자극적인 물질을 몸에 지닐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인 지환, 당신뿐입니다.”
파아앗.
갑자기 지환의 눈앞에서 용접용 불꽃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천천히 허공에서 불꽃이 타오르며 한 자루 검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흡사 다이아몬드를 군데군데 박아 놓은 것 같은 화려한 검이었다. 길이는 지환이 허리에 차면 적당할 정도.
평소 사진으로만 보던 화려한 장식의 검을 보게 되자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엄청나다.”
가격으로 치면 수억 원을 호가할 만한 검 같았다. 내심 지환은 저거 옥션에 올려놓으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물론 도검류를 그렇게 경매에 올렸다가는 큰코다친다는 것까지는 생각이 안 간 지환.
그 순간 그라나다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검은 오래전에 원래 있던 마계에서 이 대지까지 흘러왔습니다. 마검 카라이안의 기운은 마계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결국 힘이 약해지는 중간계, 그리고 그곳에서 정화의 역할을 맡는 제가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지환에게 그라나다가 설명했다. 하지만 지환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이리저리 관찰하는 중이었다.
스릉.
검을 뽑으니 은은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대충 만화에서 몇 번 본 동작대로 조심스럽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오…… 가벼운데.”
물론 검도라고는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는 지환이었다. 그저 일본 만화나 영화로만 대충 본 적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날카로운 검을 손에 드니 자신이 엄청 대단한 검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었다.
“카라이안은 마계에서 가장 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 그 힘은 마족들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지상계로 와도 마검의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이죠. 결국 마검이 만들어 내는 엄청난 파멸의 용액을 보관하는 창고의 역할도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정화가 불가능하니까요.”
그라나다가 다급한 듯 빨리 설명했으나 지환은 새로 생긴 장난감(?)이 마음에 드는 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당신…… 놀랍게도 당신의 몸에서 마검이 만들어 내는 파멸의 용액 성분이 검출되었습니다. 당신이 배출한…… 그것에 섞여 있는 것을 보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라나다는 처음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지환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제야 지환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응? 뭐라고?”
조금 전의 이야기를 제대로 안 들었다는 뜻. 그러나 그라나다는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믿어지지 않지만 당신은 모든 악한 기운을 담아내도 끄떡없는 존재. 도대체 어떠한 극한의 과정을 거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과연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존재입니다.”
“극한의 과정? 삶은 원래 극한의 과정이나 마찬가지지.”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지환이 말한 선문답이었지만, 대답은 얼추 맞춰서 나온 셈이었다.
현대인은 엄청난 양의 화학 합성 조미료를 태어나면서부터 먹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태어나자마자 먹게 되는 분유에도 위험한 화학 첨가제는 들어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L―글루타민산나트륨(MSG, 글루탐산나트륨). 사실 그 외에도 30여 종의 화학조미료가 있고, 모두 모유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것들이다.
그리고 L―글루타민산나트륨의 경우는 미각을 마비시켜 유아가 분유를 더 많이 먹게 만드는 간접적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분유 판매량에 엄청난 영향을 주니 각 회사 입장에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만 L―글루타민산나트륨, 속칭 미원이라 불리며 엄청난 양을 먹게 되는 이것은, 그래도 그나마 최근에는 시중에서 그 사용량이 다소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화학 성분과 더불어 잔류 농약, 다이옥신 등, 현대인은 태어나면서부터 화학 약품을 매일매일 먹어 오면서 성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라나다의 말이 이어졌다.
“파멸의 용액 처리를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무한의 용액이라 하여 마족들도 피하는 것입니다. 바로 마검이 뿜어내는 기운입니다.”
차아앗.
지환의 눈에 조금 전에 보았던 것 같은 빛이 보였다. 칼이 등장했을 때와 같은 반응.
이제 될 대로 되란 식. 너는 떠들어라, 나는 듣겠다, 라는 심정으로 지환이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엇? 이건…… 설마!!”
지환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리고 코를 킁킁거렸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투명한 공간에 비눗방울처럼 시커먼 물이 떠 있었다. 보글거리는 그것은 액체 상태로 허공에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환은 코를 벌름거림으로써 이내 그것이 자신에게 매우 익숙한 용액임을 알게 되었다.
“콜, 콜라다…….”
지환의 음성은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분명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자신이 오매불망 간절히 간구하던 ‘그것!’이었다.
“이것을 처리해 주세요. 그리고 콜라? 당신은 이것을 그런 용어로 부르는가 보군…….”
그라나다가 설명을 하려 하였으나 지환의 움직임이 먼저였다. 몸이 날씬해진 이후로 계속해서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던 것이다. 흡사 수년간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뻥 날아가 버린 느낌.
그런데 눈앞에서 콜라가 보이자 지난 며칠간 참았던 인내력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이걸 어떻게 마시지? 마시라고 내놓은 것 아니야?”
지환이 그렇게 말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허공에 떠 있는 비눗방울 같은 거품을 잡았다.
쭈욱.
그러자 그것은 흡사 페트병처럼 물렁물렁하게 찌그러들었다. 그리고 위로 검은 용액이 살짝 올라왔다.
지지직.
그러자 스파크가 튀기며 작은 구멍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낼름.
지환은 그 용액의 맛을 조금 본 후 감탄을 내질렀다.
“진짜 진한 맛! 진정한 콜라다!”
프리미엄 콜라가 있다면 이런 맛일 것 같았다. 라이트니 뭐니 하며 무(無)카페인, 그런 건 딱 질색이었다.
언제나 카페인 듬뿍. 고 칼로리.
이런 걸 원했던 지환에게 있어서 딱 적합한 맛이었다. 아니, 지환을 위해 만들어진 콜라 같았다.
꿀꺽꿀꺽.
약 500㎖ 정도 되는 분량. 지환은 그것을 한 번에 들이마셨다.
“캬하!! 바로 이 맛이야!”
지환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며칠째 쌓이고 쌓인 감정이 한 번에 폭발되는 느낌이었다.
카타르시스.
“휴으…… 뭘 그리 봐?”
지환이 감질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닦았다. 그리고 멍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그라나다에게 말했다.
그라나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 정말 대단하군요. 마족들도 기피하는 그 파멸의 용액을 마실 수가 있다니.”
그라나다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거? 파멸의 용액은 무슨…….”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지환이 말했다. 시원한 콜라 마시는 것 가지고 저런 호들갑을 떠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라나다가 말했다.
“옛날 마족의 왕, 케이오틱. 왕 중의 왕이라 불린 그는 그 파멸의 용액으로 마족들을 다스렸습니다. 뭐, 일단 당신의 놀라운 능력을 봤으니 마지막으로 설명을 드리죠.”
오랜만에 콜라가 들어가니 온몸에 힘이 도는 것 같았다. 그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며 지환은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라나다의 말이 이어졌다.
끼이잉.
그라나다가 손을 한 번 휘젓자 작은 등 가방이 나타났다. 그리고 지환에게 그것이 건네졌다.
“이건?”
가방을 여니 그때 먹었던 엘푸카 열매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환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거로 뭐 하라고. 근데 가볍네.”
휘익, 휙.
지환은 처음 받을 때 아무것도 없던 것 같은 가방인지라 조금 놀랐다.
이 정도 열매가 들었다면 조금이라도 무게가 느껴져야 할 텐데 별로 무게를 못 느낀 것이다.
“샤하의 가방이라 합니다. 엘프족의 오랜 보물이죠. 그 안에 물건을 넣으면 거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곳으로 가게 될 때 필요한 식량을 넣어 두었습니다.”
식량이란 말에 지환의 인상이 살짝 굳어졌다. 며칠간 엘푸카 열매 두 알로 하루를 버틴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콜, 콜라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이지?”
파멸의 용액을 처리해 달라는 말도 아까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콜라도 있을 터였다.
아몬드와 콜라를 같이 먹는 것이라면 대환영이었지만, 엘푸카 열매는 사절이었다.
“콜라…… 파멸의 용액은 마검 카라이안이 설명해 줄 것입니다. 아직 말을 안 걸었나요?”
“응?”
마검이 설명해 준다는 말에 지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을 들었다. 그러자 그때 지환의 뇌리 속으로 음성이 들려왔다.
―인간. 대단하군.
“어어…….”
당황해 하며 지환이 중얼거렸다. 흡사 골전도 헤드셋을 끼고 듣는 음성 같았다. 귀가 아니라 바로 뼈의 진동을 이용해 소리가 들리는 느낌.
지환은 자신의 손에 들린 마검 카라이안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지환은 다시 그라나다를 쳐다보았다. 설명을 해달라는 뜻.
“자세한 설명은 밖으로 나가게 된 후 마검이 해 줄 것입니다. 그동안 저에게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었기에 많이 화가 나 있는 상태 같네요.”
“봉인? 아, 네가 가지고 있었다고?”
“파멸의 용액을 서슴없이 마실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이라면 마검의 정신 제어에도 끄떡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제 생각이 맞았군요. 당신은 정말 신기한 존재입니다.”
“뭐?”
“당신은 정말 신기한 존재. 만약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분명 마족, 그것도 최상급의 마족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엄청난 독성을 가진 것, 그것을 배설해 낼 수 있다니요.”
“독성……이라니?”
배설이란 단어를 언급함과 동시에 그라나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왜 그래? 꼭 걸어가다 똥 밟은 사람 표정 짓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리지 못한 지환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라나다는 이내 다시 인상을 풀고 지환에게 말했다.
“어쨌든 그것과 당신을 정화시키느라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하여 저는 이제 복구 모드로 들어갑니다. 당신의 몸을 한 번 정화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불충분한 듯.”
그제야 지환은 자신을 이렇게 날씬하게 만든 것―실은 더 엄청난 일이 몸에 벌어진 상태였다―이 눈앞의 그라나다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