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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크마스터 1(18화)
제5장 그라나다, 무너지다!(5)
쿠웅!
첨벙!
“와악!”
갑자기 허공에 달려 있던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켰다.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곳은 곧 붕괴됩니다. 어차피 갈 곳 없는 당신이라면 제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지요?”
갈 곳 없는 당신이란 말에 지환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그라나다의 말에 지환의 귀가 쫑긋해졌다.
“만약 숨겨진 천년수, 동쪽 땅 끝의 마을에 숨겨진 그곳에 갈 수 있다면 당신이 살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차원의 관리도 병행되는 곳이니까요.”
콜라와 초콜릿, 피자와 포카칩이 있는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그라나다의 말에 지환이 소리쳤다.
“좋아! 알았다고, 알았어. 그럼 가 주지. 근데 어떻게 가!”
갑자기 발이 아래로 쑥 내려가는 느낌. 모래 언덕에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 나자 지환이 서둘러 말했다.
그러자 그라나다의 말이 귓가에 은은히 흘러들어 왔다.
“놀라지 마시고 그대로 빠져나가세요. 숲의 외곽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이후 해가 뜨는 방향, 동쪽으로 계속 가시면 됩니다. 당신의 길을 바람과 대지가 안내할 것입니다.”
애매모호한 대답. 지환이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근데 막상 갔는데 구라였으면 죽어!”
그것이 지환이 남긴 마지막 말.
지환은 일단 가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사실 할 일도 없었고 식량도 든든하니 마음이 놓인 것이다.
물론 고생해서 갔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지환의 발악이 흘러나왔다.
쑤욱.
그리고 잠시 후 지환의 몸이 그 공간에서 사라졌다.
쿠웅.
쿵.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그라나다의 몸이 흡사 영화의 잔상처럼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얼굴엔 어딘지 모르게 안도한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 세계를 정화하는 천년수. 그 역할이 잠시 정지됨에도 불구하고 결코 화를 내는 모습은 아니었다.
“당신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뜻인지요. 모든 것은 이미 예비 된 것인가요? 오래전 이곳에 봉인된 마검 카라이안 케이오틱, 당신이 지금 가지고 간 그 검을 노리는 마계 서열 3위, 죽음의 강을 다스리는 세이크론 세력이 등장한 이때…….”
그것이 그라나다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그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빠지직.
빠직.
지환의 몸에서 흘러나온 엄청난 독성을 지닌 배설물과 쌓여 있던 독액들. 그것들을 천년수 그라나다가 온전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내 그라나다는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 천천히 핵심 코어만 남긴 채 가라앉기 시작했다.
* * *
시간은 조금 뒤로.
지환이 천년수 안으로 들어간 이후 분위기는 점차 정리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 지환은 그다지 감흥을 주지 못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전히 리샤이엘은 훌쩍거렸고 그렐돈은 그녀를 다독거렸지만, 이내 상황이 정리되었고 예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위대한 엘프족의 수호령, 엘 샤우도니아의 기둥. 이번에 오랜 기간 일족을 떠나…….”
엘프족의 장로 라디오프가 대대로 전해져 오는 백색의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 그것을 읽어 나가고 있었다.
이제 누구도 언제 그런 인간이 이곳에 왔었냐는 듯한 반응.
그러나 그렐돈과 리샤이엘은 아직 완전히 기분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낭랑한 음성으로 문서를 읽고 있는 라디오프의 뒤에서 준장로의 지위를 수여 받기 위해 서 있는 리샤이엘의 눈은 아직도 퉁퉁 부어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렐돈, 강인한 전사인 그도 기분이 매우 가라앉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마족인 줄 알고 공격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지환의 기억상실이 자신이 머리를 후려쳐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 내심 미안했는데, 갑자기 엘프의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배설의 시간을 맞이하여 죽게 된 것이다.
“끄음…….”
그렐돈이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름대로 성격 괜찮은 사람 같았는데 갑자기 요절한 것이다.
“……자, 그럼 준장로의 지위를 얻게 되는…….”
한참 동안 기나긴 말을 한 후 장로 라디오프가 리샤이엘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우르릉.
“……!”
“……!”
모든 이들의 시선이 천년수 그라나다로 쏠렸다. 흡사 화산이 용트림을 하듯 천년수가 움찔거린 것이다.
결코 이전에는 없었던 일. 흡사 나무가 트림을 하는 듯한 모습.
진동은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이내 라디오프의 다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 피하라!”
휘익.
휙.
갑자기 장로 라디오프가 소리치며 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그들은 재빠르게 천년수 그라나다에서 멀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리샤이엘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로 라디오프를 향해 다가갔다. 다른 이들이 감히 장로 라디오프에게 말을 걸 수는 없었기에 그녀가 대표 격으로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장로 라디오프는 아무런 말도 없이 손을 들어 천년수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천년수…… 천년수 그라나다가 죽어 가고 있어.”
“……!”
당황스러운 말,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영생의 상징이던 그라나다였다.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리샤이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 그라나다는 몸을 움직여 우리에게 피할 시간을 준 거야. 경고지.”
“경고라고요?”
그렇게 리샤이엘이 반문했으나 장로 라디오프는 굳게 다문 입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설마…… 혹시나 했지만…… 옛 문헌에 나온 그 글귀가 이대로 실현될 줄은 몰랐다. 나는 큰 실수를 한 것인가.”
경고란 말을 한 이후 라디오프의 태도가 이상했다. 흡사 큰 실수를 범한 사람처럼 침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경고?”
그렐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조금 전에 말한 장로의 경고가 무엇인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콰앙!
쾅!
검은 그림자를 뿜어내며 창공에서 바람을 가르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우지끈.
“헉!”
그렐돈이 숨을 삼켰다. 행사를 벌이던 단 근처로 엄청난 크기의 나무 기둥이 떨어진 것이다.
“천년수 그라나다의 가지…….”
장로 라디오프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큰 나무 기둥들은 그라나다의 우뚝 솟은 가지들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리샤이엘이 놀라 소리쳤다.
“말, 말라 가고 있어요.”
생명을 빼앗긴 듯 녹색의 싱싱한 잎이 순식간에 비쩍 말라 가기 시작했다.
찌직.
찌지직.
너무나 빠른 변화. 순식간에 미라처럼 말라 가는 그 변화에 모든 이들은 입을 딱 벌린 채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휘리릭.
변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찰랑거리며 호수처럼 채워져 있던 그라나다의 신성수가 바닥에 구멍이 난 것처럼 사라져 갔다.
“신, 신성수가!”
천년수 그라나다의 수액이 외부로 흘러나와 고이는 신성수.
그 신령한 액체가 갑자기 말라 들어가기 시작하자, 쉴 새 없이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그라나다의 가지들이 서로 부딪치며 말라 가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쓰으윽.
소용돌이치듯 엄청난 크기의 빈 공간만을 남긴 채 신성수가 완전히 사라지자 텅 빈 팽이 모양의 바닥만이 보였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죠!”
리샤이엘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러자 장로 라디오프가 손을 들어 말라비틀어지고 있는 커다란 가지를 가리켰다.
“천년수 그라나다 스스로 지금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
“예?”
생존이란 말에 그렐돈도 놀라 외쳤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것이다.
“저것을 보게나. 천년수 그라나다는 스스로 가지를 떼어 낸 거야. 스스로의 수액을 지키기 위해. 아마 급하게 써야 할 곳이 생긴 것이 틀림없어.”
지지직.
지직.
어느새 떨어진 커다란 통나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중 하나만 하더라도 거대한 건물의 주(主) 기둥으로 삼을 만한 크기였다. 그런데 그것들은 예외 없이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라 울라. 샤 드바나…….”
장로 라디오프가 하늘로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숲의 안내자들이 과거 엘프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불릴 때 사용하던 언어란 것을 깨달은 리샤이엘이 한 발을 굽히며 자세를 낮췄다.
쓰윽.
쓱.
그러자 다른 이들도 똑같은 자세를 취하며 몸을 낮췄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리샤이엘의 귀는 조금씩 움직였다.
‘저 뜻은…… 설마?’
지금 라디오프가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고대 언어의 의미를 알고 있는 장로 계승 예정자 리샤이엘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움 보르테. 쿤 우탄비아 샤탄 드 쇼콜라.”
쿵.
쿠웅.
그 와중에도 천년수의 가지는 쉬지 않고 떨어지고 있었다. 흡사 운석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모습.
지금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져야 안전할 것 같아 보였지만 장로 라디오프는 비키지 않고 천년수의 마지막을 보겠다는 듯 계속해서 옛 고대 언어를 읊조릴 뿐이었다.
‘전해져 오는 전설. 이 땅에 도래할 마왕에 대한 전설.’
리샤이엘이 소수에게만 전해져 오는 고대 문헌의 기록을 되새기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 리샤이엘은 이빨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몇 시간이 흘렀다. 이제 떨어질 가지들도 다 떨어졌고 천년수 그라나다는 그야말로 커다란 나무 기둥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떨어진 가지들은 흡사 천년수를 포위하듯 둥글게 쌓였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떨어진 것들은 굉음을 내며 말라비틀어져 갔다.
지지직.
지직.
너무나 생생한 변화. 그것을 보는 모든 이들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공포와 경악. 그것이 그들을 휘감은 감정이었다.
“흑흑.”
“저럴 수가…….”
흐느끼는 자들도 많았다. 천년수 그라나다는 그들에게 있어서 신과 같은 존재. 그런데 지금 죽어 가는 것이다.
“울지 마라. 그라나다는 죽은 게 아니다.”
장로 라디오프가 모든 이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게 아니라고요?”
그 말에 희망 섞인 표정으로 리샤이엘이 물었다.
“지금은 스스로 가지를 치고 몸을 사리는 중. 물론 예전의 찬란한 모습을 볼 사람은 적어도 이 자리엔 없겠지. 우리의 자손들이 성장하여 또 다른 자손을 볼 때가 된다면 가능할 것이다.”
즉 4, 500년은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야 이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리샤이엘은 희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도대체 지금…… 천년수는 어떤 상태지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기나긴 잠에 빠지는 것. 씨앗이 추운 겨울을 이겨 낸 후에 다시 싹을 틔우듯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 말을 한 이후 장로 라디오프는 그렐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악의 싹을 천년수에 밀어 넣었다. 그의 간교한 얼굴에 속았어.”
악의 싹이란 말에 그렐돈의 표정이 긴장되었다. 내심 그 악의 싹이란 것이 누군지 짐작이 된 것이다.
“하, 하지만…….”
리샤이엘도 재빠르게 말을 하였다. 아까 전에 장로 라디오프가 읊은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설마 지환이 예언서에 나온 어둠의 마왕이라고요? 말도 안 돼요.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예언서에 적힌 대로 이뤄졌다. 오랜 예언이 시작된 것이야.”
그 둘의 대화에서 멀어진 그렐돈은 눈을 껌벅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고대부터 내려온 전설에 대한 이야기 같은데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리샤이엘의 추가 설명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장로 라디오프의 시선이 그렐돈을 향했다.
움찔.
그제야 그렐돈은 자신이 이 자리에 끼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오히려 장로 라디오프는 그렐돈에게도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옛 전설, 엘프의 전설에 이런 것이 있지.”
그렇게 말하며 라디오프는 아까 전 자신이 엘프의 고대 언어로 읊은 말을 해석해 주었다.
“천년수 그라나다가 무너질 때, 세계를 파멸시킬 암흑의 대마왕이 나타난다.”
세계를 파멸시킬 암흑의 대마왕이란 말에 그렐돈이 흠칫했다. 그러자 라디오프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서쪽 끝에서부터 동쪽 끝으로 이동할 것이다. 숨겨진 천년수를 찾기 위해.”
“숨, 숨겨진 천년수?”
그렐돈이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물론 지금 장로 라디오프가 허튼소리를 할 리는 없었다.
라디오프가 그렐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 지환이란 자의 정체는 바로 그 암흑의 대마왕이었다. 간교하게도 놈은 우리를 철저히 속였다.”
암흑의 대마왕이란 말에 그렐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렐돈이 중얼거렸다. 이전에 장로 라디오프와 이야기한 부분이었지만, 자신들과 함께한 며칠의 여행 중에는 지환에게서 결코 마왕과 관련된 점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