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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크마스터 1(23화)
제7장 마계에서 올라온 녀석(2)
“엇?”
처음 보는 사람의 모습. 꼬질꼬질한 두건을 푹 눌러쓴 소년이 주저주저하며 서 있었다. 며칠 동안 험하게 여행했는지 옷에 흙먼지가 많이 묻어 있었다.
“이거 말이냐?”
지환이 토끼를 흔들며 말했다. 그러자 소년이 토끼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 그래!”
다급함이 담겨 있는 목소리. 하지만 지환이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잡았으니 내 것이다. 먼저 잡은 것이 임자라는 말도 넌 못 들어 봤냐?”
“이…….”
갑자기 눈앞의 꼬마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지환은 조금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꼬마가 몰아 쫓아온 토끼를 빼앗는 나쁜 어른(?)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환이 조금 누그러뜨린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 문득 혹시나 하는 마음에 꼬마를 향해 말했다.
“너 혹시 이거 요리할 수 있냐? 불 피울 수 있어?”
아무 생각 없이 지환이 퉁명스럽게 물어본 것인데 갑자기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내, 내가 요리할 수 있어.”
더듬거리는 소년의 말. 그러자 순간 지환의 눈이 번쩍거렸다. 맛없는 엘푸카 열매를 벗어날 방법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냥 그렇다고 토끼를 건네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슬쩍 몸을 뒤로 뺀 지환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네가 무슨 수로? 불이라도 만들 수 있어?”
지환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장 불이 있어야 요리를 하든 뭘 하든 할 터였다.
그러자 낡은 두건을 쓴 소년이 자신의 두건을 벗으며 소리쳤다.
“할, 할 수 있어. 나도 이제 불 만들 수 있다고.”
두건 아래 감춰진 짧은 금발이 드러났다. 얼굴에도 흙먼지가 많이 묻어 있었지만 피부가 새하얀 소년이었다.
“불 만들어 봐.”
지환이 할 수 있다면 해 보란 투로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소년이 자신의 손바닥을 펴더니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La unmper yunken heit(불이여, 나의 맹약자의 불이여).”
그렇게 말하는 순간 소년의 손바닥 위에 넘실거리는 불꽃이 맺혔다. 리샤이엘이 쓰던 정령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와.”
지환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그러자 순간 금발머리 소년의 눈동자가 동그래지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야! 도망치잖아!”
그러자 지환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년의 손바닥 위에 떠오른 불길을 바라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토끼를 놓친 것이다.
“서라. 고기야!”
불쌍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지금 지환의 배에서는 고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도 잘 익은 고기.
우당탕탕.
결국 불쌍한 토끼는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지환의 손에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지글지글.
지글지글.
지환은 침을 삼키며 꼬챙이에 끼워져 이글거리는 토끼 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워지는 토끼 고기에서 기름이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메르켄이라 했다. 그것이 지환이 들은 소년의 이름. 지환도 메르켄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줬는데 메르켄은 이상한 이름이네, 라고 한마디 던지고 그 이후에도 지환의 이름을 따로 부르지는 않았다.
대신 메르켄은 놀랍게도 토끼를 능숙하게 처리하였다. 물론 지환이 준 맥가이버 칼도 유용한 도움이 되었다.
쓰윽, 쓱.
무표정하게 토끼를 잡아 배를 가르는 것을 보고 지환이 혀를 내둘렀다. 도살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다가 온 소년 같았다.
“이거 쓸 만한데?”
메르켄이 맥가이버 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메르켄의 손에서 맥가이버 칼이 휙휙 움직이니 고기가 4, 5등분 된 것이었다.
“칼 내놔라. 그리고 꼬마야.”
지환이 메르켄에게 맥가이버 칼을 받아서 강물에 한번 씻었다. 그리고 다시 주머니에 넣고 메르켄이 피워 놓은 불가로 다가갔다.
후끈거리는 불길이 보이니 마음이 좀 놓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기가 익어 가니 너무나 행복했다. 며칠 만에 먹어 보는 쫀득쫀득한 고기였던 것이다.
“너 어디서 가출한 거야?”
지환이 쭈그리고 앉아 고기 구워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메르켄을 향해 말했다. 일단 어디서 나타났는지 몰라도 가출 소년의 집을 확인해 봐야 했다.
“가출…… 가출이 아니다.”
지환의 말에 메르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무슨! 꼬마가 이런 야밤에 돌아다니면 가출이지. 도대체 왜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사정을 파악해 보려는 듯 지환이 고기 구워지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 다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메르켄은 단호했다.
“난 가출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왜 집을 떠나 고생하며 돌아다니는지 말해 봐라.”
지환이 메르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메르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가출이 아니라…… 출가한 것이다.”
“뭐어? 출가?”
딱.
“아얏! 너…… 날 쳤어.”
지환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여 메르켄의 머리를 친 것이다. 일명 꿀밤.
딱. 딱.
“아얏. 아얏.”
지환은 메르켄의 머리에 꿀밤 세례를 퍼부었다. 그러자 메르켄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쥐며 쭈그렸다.
그 와중에도 고기는 꽉 쥔 채 고개를 숙인 메르켄을 향해 지환이 말했다.
“이 쪼그만 녀석이 입만 살아 가지고. 네 녀석이 출가면 난 출타한 것이다.”
지환의 말에 메르켄이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항변했다.
“그게 그 말이지. 출가나 출타나.”
따악.
메르켄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으나 그 덕분에 지환에게 꿀밤을 한 대 더 맞아야 했다.
“아얏. 왜 때려!”
여전히 자신이 왜 맞는지 모르겠다는 메르켄의 말에 지환이 찬찬히 설명했다.
“엄연히 다르다. 아직 성인이 안 된 녀석이 집 나오면 가출.”
“가출 아니라니까.”
“어허. 넌 가출. 출가나 출타가 같다는 말도 틀리다. 출타는 나중에 출가의 단계를 지나면 쓰도록.”
지환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제대로 된 대화를 못해 본 지환이었다.
사실 이런 꼬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동안 하도 대화를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막상 말을 하다 보니, 딴 걸로 내세울 것이 없으니 가장 만만한 나이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아직 성인이 안 되었다는 말에 메르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환은 은연중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토끼 고기를 먹기 시작하자 잠시 말이 끊겼다. 역시 먹는 것에 집중할 때에는 조용해졌다.
지환은 점차 줄어 가는 토끼 고기가 아쉬운 듯 지나가는 말로 메르켄에게 물어보았다.
“너 몇 살이냐?”
집이 어딘지 말하지 않으니 나이라도 물어본 것이었다.
대략 12살 정도가 지환이 생각한 메르켄의 나이.
하지만 남은 고기를 씹어 먹으며 메르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지환이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
“응. 올해로…… 127살.”
“쿨럭. 컥.”
“왁! 더러워. 얼마 남지 않은 고기에 침 튀기지마!”
갑자기 지환이 사레가 걸린 듯 쿨럭거리자 메르켄이 눈에 빛을 내며 남은 고기를 후딱 가져갔다.
그냥 보고 있을 지환이 아니었지만 지금만큼은 목이 메여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머진 내가 다 먹는다.”
메르켄이 지환의 상태를 보더니 눈빛을 빛내며 나머지 고기를 냉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하지만 여전히 지환은 조금 남은 고기가 싸악 쓸려서 메르켄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먹던 게 걸려 계속 기침이 나온 것이었다. 목이 매우 텁텁했다.
후다닥.
어쩔 수 없이 지환은 후딱 자리를 피해 마검 카라이안이 놓인 건너편의 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꽈악.
마검을 손에 쥐며 지환이 날카롭게 외쳤다.
“콜라. 급하다. 어디다 대고 쏘아 댈까?”
짧은 단어. 요란을 떨든지 말든지 상관없었다. 목이 너무 막혔다. 그러자 마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잉여분으로 조금 더 생성된 파멸의 용액이 있다. 지금 주마.
지환에게는 정말로 반가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마검 카라이안의 몸을 휘감는 회오리가 불었고 한 모금 정도 되는 콜라가 생성되었다.
하지만 그 정도라도 입가심하기에는 충분했다.
벌컥.
지환은 콜라 한 모금을 마신 후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휴. 뭐 저런 뻔뻔스러운 꼬마 녀석이 있어?”
지환이 중얼거렸다.
127살. 지환보다 100살 이상 많은 나이였다. 항렬로 치면 증조할아버지나 될 법한 나이.
자신도 모르게 지환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지환의 머릿속에 마검 카라이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클클클,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꼬마가 어찌하여 지상계로 올라왔지?
“뭐?”
지환이 눈을 껌벅이며 마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검이 다시 말하였다.
―저 꼬마는 마족이다. 그리고 마족의 나이로 치면 이제 갓 100살을 넘긴 아이. 물론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꽤 많은 나이겠지.
그러자 지환이 남은 고기를 질겅질겅 씹어 먹고 꿀꺽 삼키는 메르켄을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족? 그리고 127살?”
지환은 식사를 마친 후 강가로 가서 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 있는 메르켄을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저 꼬마가 마족이라고?”
마족. 이전에 리샤이엘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던 단어였다. 그리고 지환도 익히 알고 있는 단어.
그러나 평소 자신이 생각하던 마족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마족이라 하면 뿔이 두 개요, 생긴 것은 염소 모양. 그런 이미지였던 것이다. 옵션으로 등에 검은색의 두 날개도 포함.
하지만 지금 지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얼굴을 씻고 있는 천진난만한 금발머리 소년이었다. 물론 그 천진난만한 모습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잠시 후 마검 카라이안의 음성이 지환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저 꼬마는 아직 각성하기 전이다.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마족이지.
“흐음.”
지환이 중얼거렸다. 무언가 복잡한 일이 많은 것 같았다. 각성이란 말을 들으니 아직 어른이 되기 전이란 의미 같았다.
아마도 자신이 알고 있는 마족의 개념과 이쪽의 개념이 많이 다를 수도 있었다.
“하긴 사람들도 이상한 행동을 하고 이상한 것들을 먹었으니.”
어떻게 된 것이 먹는 것, 그리고 생활양식 모든 것이 현대인인 자신과는 다르고 어색했다. 특히 다른 것은 몰라도 엘푸카 열매 하나만 달랑 먹는 이곳은 너무나 삶의 낙이 없는 세계 같았다.
“적어도 마족들은 나와 뭔가 통하네.”
엘푸카 열매 같은 것 하나 달랑 먹는 자들과는 상종도 하기 싫었다. 그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지금, 적어도 비슷한 식습관을 지닌 꼬마 마족을 만난 것이다.
“흐음, 그러고 보니…….”
지환이 메르켄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름대로 곤란한 일이 많았는데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쓰윽, 쓱.
메르켄은 은색의 손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옷은 먼지가 묻어 꼬질꼬질했는데 손수건은 깨끗했다.
힐긋.
지환이 다가가자 메르켄이 지환을 살짝 바라보았다.
“뭘 봐?”
딱.
“아얏!”
“꼬마 녀석이 말이 이렇게 험해서야. 그리고 ‘뭘 봐’는 내가 할 소리다.”
“이이이…….”
이를 악무는 메르켄의 모습. 지환은 빠르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어쨌든 일단 앉아 봐. 음, 저기로 가자.”
조금 전 불을 피워 식사를 한 곳은 여기저기 잔가지와 탄 나뭇가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다시 앉으려던 지환은 자리가 너저분한 것을 보자 조금 떨어진 나무로 갔다.
물론 메르켄이나 지환이나 먹고 나서 뒷정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두고 차라리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
“앉아라.”
눅눅하지 않은 풀밭이라서 그냥 앉아도 무방했다. 어느덧 배를 채우고 나니 이야기를 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미 해는 저물었고…… 침낭은 하나밖에 없다. 넌 어떻게 잘 건데?”
자신의 마법 가방 안에 있던 얇은 침낭을 떠올리며 지환이 물어보았다. 잠자리를 가지고 우선 이야기를 풀어 나간 것이다.
“난 이거면 돼.”
지환의 물음에 메르켄이 아까의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자 지환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걸로 얼굴이나 가리겠냐?”
그러자 메르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봐.”
휘익, 휙.
파앗!
펄럭펄럭.
“어엇!”
지환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르켄이 손수건을 몇 번 흔들다가 마법사가 묘기를 보여 주듯 순식간에 바람을 가르며 아래로 내리자 갑자기 널찍한 보자기가 된 것이다.
그 정도 크기면 메르켄이 둘둘 말아서 몸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언가 다른 능력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환이 걱정해 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흐음…… 뭐, 좋아. 그 정도라면 괜찮겠군. 안 춥게 잘 잘 수 있겠네.”
이제 밤이었다. 어느새 하늘에는 이미 익숙해진 세 개의 달이 떠 있는 상태.
아무리 철면피 지환이라도 옆에서 어린애가 오들오들 떨면서 꾸벅거리는 것을 보고 있기는 어려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