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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2화)
제1장 포졸출도(捕卒出道)(2)


“예. 일단 놈의 출신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놈은 이 일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놈입니다. 일단 무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여기 계신 조준 장군보다…… 험험.”
“난 상관하지 말고 계속 하게.”
“흠흠, 예. 무공이야 확실히 조선 제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놈입니다. 거기다 무기 자체가 ‘삭(索:줄)’이라는 특이한 무기라 지하 감옥의 죄수들 또한 쉽게 대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다 그놈이 그대로 도주를 하면?”
조준이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놈의 사정이 사정인지라 매일 도주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런 놈을 저 멀리 중원으로 보낸다니, 놈에게 도망치라고 엉덩이를 두들겨 주는 격이었다.
“장군님도 아시다시피 놈은 삼십 일에 한 번씩 해약을 먹어야 하는 몸입니다. 삼십 일에서 하루라도 넘으면 하루 동안 발작을 일으키다 급살을 맞지요. 그러니 놈에게 일정 기간치의 해약을 주고 그 기간 안에 놈들은 잡아 오라고 하면 됩니다. 거기다 이번 일을 성공하고 돌아오면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준다는 미끼도 줘야 합니다.”
“으음.”
“저희로서는 놈이 성공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입니다. 중원이라면 비단 지하 뇌옥의 죄수들뿐 아니라 놈에게 대적하는 무인들 또한 지천에 깔렸을 겁니다. 항상 문제를 일으키던 지하 뇌옥의 죄수들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공적이 되어 알아서 죽어 줄 것입니다. 물론 명에서 약간의 압력이 있겠지만 모른다고 발뺌하면 그만입니다.”
“으음.”
잠시간의 침묵이 건물을 휘감았다.
의견을 낸 장군은 장군대로 다른 장군들은 장군들대로 긴장된 눈빛으로 조준의 입만을 바라봤다.
마침내 굳게 닫혔던 조준의 입이 열렸다.
“좋소이다. 최렴 장군은 당장 놈에게 이번 일을 명령하시오. 기간은 오 일이오. 이번 일은 내가 책임지고 후원하겠으니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오!”
“예, 장군!”
한결 근심이 사라진 얼굴의 장군들이 조준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우렁찬 외침을 토했다.
‘탈혼삭이라…….’
멍하니 앉아 장군들의 인사를 받은 조준의 시선이 창밖의 맑은 하늘을 노니는 제비 한 쌍을 좇았다.

투둑. 툭.
얼굴을 때리는 나뭇가지가 거추장스럽다. 본래 같았으면 단숨에 부러트리거나 경공을 이용해 훨훨 날아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비쩍 바른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니기미……!”
한바탕 쌍욕을 중얼거린 삼십 대 중반의 사내가 다시 한 번 쌍욕을 내뱉으며 숨을 골랐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을 피해 도주를 감행한 지 오늘로써 오 일째.
성도를 목표로 시작한 이 도주는 어느새 끝을 보이고 있었다.
“흐읍.”
잠시 숨을 고른 문량이 기척을 죽이고 걸음을 옮겼다.
도주에 있어서는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장포를 입고 있는 문량의 모습은 산발한 머리가 아니라면 충분히 점잖은 양반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백면사(百面蛇) 문량.
자칭 백면사(百面士)라 칭하는 그는 조선에서도 유명한 색마(色魔)이자 강도범으로, 그의 표풍신비(飇風身飛)는 조선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신법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신법도 지금 문량을 쫓는 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동쪽으로 도망치면 동에 번쩍, 서쪽으로 도망치면 서에 번쩍하는 놈 때문에 문량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성도였다.
사람이 끊이지 않는 그곳에서 몇 년만 숨죽이고 산다면 이 지긋지긋한 놈은 물론이고 빌어먹을 승냥이 같은 현상금 사냥꾼들 또한 자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 않던가.
부스럭.
흠칫!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문량이 걸음을 멈추고 숨을 집어삼켰다.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자세를 낮춘 문량이 눈을 번뜩이며 두리번거렸다. 그것도 잠시, 곧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제길. 하필이면 그런 계집을…….’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문량은 이성계의 심복을 자청해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많은 아녀자들과 정(情)을 통하고 금품을 갈취했다. 그럴듯한 신법만을 가지고 있는 문량이 여태껏 목숨을 부지한 이유는 바로 그와 정을 통한 아녀자들의 가문이 모두 별 볼일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이 틀어진 것이다.
심심풀이로 건드린 여자가 바로 진짜 이성계의 심복 장군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문량과 부인의 사이를 눈치 챈 장군은 부인의 머리를 빡빡 밀어 처갓집으로 쫓아내고 조선 팔도 현상범 사냥꾼들에게 문량의 목을 가져오면 황금 두 돈을 지급한다고 방을 써 붙였다.
말이 황금 두 돈이지 혼란스러운 이때에 황금 두 돈이면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돈이다.
당연히 엄청난 수의 현상금 사냥꾼들이 문량 하나를 죽이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다못해 작은 마을의 포졸마저도 문량의 얼굴을 알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때 놈이 홀연히 나타났다.
지금 자신과 같은 산발한 머리, 낡게 헤어진 옷. 이 장(丈)이 조금 넘는 붉은 오라를 빙빙 돌리며 나타난 놈이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목을 내놔라.”

미친놈이라며 한바탕 쏘아 줄 시간도 없이 쏘아진 오라에 대경실색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 것이 벌써 오 일 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이 쏘아 낸 오라를 은은하게 감도는 기운이 바로 형형한 기(氣)였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면 검(劍)을 든다면 검기(劍氣)를, 도(刀)를 든다면 도기(刀氣)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이라는 이야기였다. 간신히 검기를 뿜을 수 있는 문량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성도를 향해 도망친 지가 벌써 오 일. 중간 중간 마을을 들른 문량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첫 번째,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의 이름이 ‘홍단야’라는 것!
두 번째, 자신을 쫓는 놈의 별호가 그 유명한 ‘탈혼삭(奪魂索)’이라는 것!
세 번째, 여태껏 놈이 목표로 한 놈들 중에 놈의 손을 벗어난 놈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마지막 네 번째, 놈의 직업이 포졸이라는 것. 그러나 웬만한 장군도 놈의 앞에서는 찍 소리도 못한다는 것!

“지랄! 염병! 십팔……!”
부스럭.
보이지 않는 홍단야를 향해 한바탕 욕을 중얼거리던 문량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인기척에 뻣뻣이 굳었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오싹한 한기에 문량이 재빨리 몸을 굴렸다.
파박!
“헛!”
방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곳이 까뒤집어지는 섬뜩한 광경에 문량이 헛숨을 들이켰다. 사방으로 튀어 오른 흙 사이로 무언가 기다란 물체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스르륵.
기다란 물체의 정체는 바로 붉은색의 오라였다. 어두운 숲 속에서도 보일 정도의 형형한 적색 기운을 흘리는 오라에 문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놈이 왔구나!’
쉬리릭!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문량이 다시 한 번 숨을 삼키며 재빨리 몸을 날리자 다시 한 번 바닥이 뒤집어지며 흙이 튀겼다. 문량을 잡지 못해 아쉬운 듯, 땅을 헤집은 오라가 스르륵 움직여 인기척이 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챙!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뽑아 든 문량이 수풀을 향해 검을 겨눴다. 수풀을 향한 검 끝이 떨렸다.
“당장 나와라, 이 개 아들놈아!”
부스럭.
불쑥.
문량의 호통에 수풀이 거세게 흔들리며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은 안 감은 듯 사방으로 산발한 머리, 문량의 그것보다 더 낡은 포졸 특유의 옷과 허리춤에 묶인 기다란 오라가 놈의 정체를 말해 주고 있었다.
문량의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으으. 네놈이 바로 탈혼삭 홍단야로구나……!”
“그래.”
“…….”
설마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문량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홍단야를 바라봤다.
이제 갓 스물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듯한 젊은 얼굴과 유난히 창백한 얼굴에는 수염 하나 없다. 그 점이 홍단야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다. 짙은 눈썹과 기다랗게 늘어지다 하늘로 뻗어 올라간 코, 그리고 한일(一) 자로 굳게 다문 입은 놈의 고집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도 놈이 자신을 쫓은 시간을 본다면 충분히 놈의 고집을 알 만했다.
굳게 닫혀 있던 홍단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백면사 문량. 열두 차례 아녀자 강간과 열여섯 차례에 이은 금품 절도, 거기다 양반 모독에…….”
“강간이라니! 엄연히 쌍방의 합의 아래…….”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막 반문하려던 문량이 서슬 퍼런 홍단야의 기세에 꿀꺽 침을 삼켰다.
“백면사 문량, 본인 맞나?”
“난 정말로…….”
“백면사 문량, 본인 맞냐고 물었다.”
“마, 맞긴 한데…….”
“그럼 죽어라.”
촤르르.
문량이 고개를 끄덕이자 홍단야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허리춤에 감고 있는 오라를 풀어 문량을 향해 던졌다. 기형적으로 긴 오라가 똬리를 틀고 있던 몸을 풀고 허공을 날았다. 쉬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뻗어 나간 오라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문량의 종아리를 때렸다.
퍽!
찌익.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라와 부딪힌 부분의 옷이 찢어져 나갔다.
문량의 다리가 순식간에 퉁퉁 부어올랐다.
“놈……!”
재빨리 몸을 굴려 거리를 벌린 문량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리가 이 모양이니 장기인 신법도 소용없었다.
빠드득.
“죽엇!”
한차례 이를 간 문량이 검을 잡은 손목을 비틀며 홍단야를 향해 몸을 날렸다.
피리릿.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막 오라를 회수하던 홍단야가 신음을 삼키며 손목을 튕기자 딸려 오던 오라가 한차례 출렁이며 문량의 손목을 때렸다.
퍽!
“큭!”
손목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문량이 비명을 삼키며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검을 놓치는 꼴은 간신히 면했지만 검을 잡은 손목이 얼얼했다.
‘빌어먹을.’
상대와 자신의 무공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다리가 망가져서 신법을 사용한다 해도 얼마 가지 않아 잡힐 것이 분명했다. 입술을 질끈 물은 문량이 결단을 내렸다.
‘일격필살이다!’
“끼야압!”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날린 문량의 검에서 은은한 백색 기운이 어렸다. 혼신의 힘을 짜내어 만든 검기였다.
미약하나마 검기는 검기.
문량의 싸구려 검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기운을 뿜었다.
하지만 정작 상대인 홍단야는 오라를 길게 늘어트린 채 여전히 나타날 때와 같은 굳은 표정으로 문량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몸을 날린 문량이 삼 장 거리로 들어온 순간, 홍단야의 손이 오라와 함께 움직였다.
출렁.
휘리릭.
한바탕 출렁이며 몸을 떤 오라가 그대로 똬리를 틀듯 문량의 검을 휘감았다.
카가각!
문량의 검기와 오라에 섞인 적색 기운이 한바탕 불꽃을 튀기며 난리를 부렸다.
천으로 이루어진 오라와 쇠붙이로 만들어진 검의 싸움이라면 응당 검이 이겨야 옳겠지만 홍단야의 오라는 오히려 문량의 검을 짓누르고 있었다.
마침내 홍단야의 오라가 문량의 검신을 모두 휘감자 문량의 신형이 뻣뻣이 굳었다. 모든 내력을 검에 쏟아 부은 지금, 자칫 손을 놨다가는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부르르.
쩌적.
오라 속에 감춰진 문량의 검이 부르르 떨리는 것도 잠시, 곧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오라가 허물어졌다.
투두둑.
허물어진 오라 사이로 조각조각 나눠진 검이 떨어졌다.
“이, 이게…….”
휘리릭.
오라가 검을 부수다니!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막 비명을 지르려던 문량이 자신의 목을 옥죄이는 오라에 숨을 삼켰다.
꾸욱.
“사, 살려…….”
목을 죄어 오는 오라에 문량이 비굴한 표정으로 홍단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 막 열려고 했다.
찌이익.
우드득.
천이 뜯어지는 소리, 그리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문량의 목이 오라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몸통에서 떨어져 나왔다.
“꾸르륵.”
털썩.
피거품을 무는 문량의 머리 뒤로 문량의 몸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네놈은 내 가슴 안에 남을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