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북천무제 1권(3화)
제1장 포졸출도(捕卒出道)(3)


오라를 이용해 문량의 머리를 들어 천에 감싼 홍단야가 예의 굳은 표정으로 오라를 허리춤에 두르고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수풀 속으로 몸을 날린 홍단야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곧 파밧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나타났다. 문량의 신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천에 감싼 문량의 머리를 든 홍단야가 성도에 도착한 것은 정확히 하루 후였다.
홍단야가 성도로 통하는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자 저 멀리서부터 한 무리의 인영들이 나타났다. 입구를 지키는 포졸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수문장이었다. 길을 내달리는 그들의 기세에 성도로 들어가려던 장사치들과 행인들이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발을 놀려 홍단야에게 다가온 무리가 그대로 홍단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끄덕.
포졸들의 우렁찬 인사에 홍단야가 그 특유의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본래 성문을 지키는 포졸들은 다른 포졸들에 비해 한 단계 높은 계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만큼 그들은 힘든 훈련을 하고, 또 강함을 가지고 있다. 간단한 호신술만을 배운 일반 포졸과는 달리 전문적으로 무공을 배운 이들이다. 거기다 수문장이라면 웬만한 양반 앞에서도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직위였다.
행인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수문장이 홍단야의 품에 있는 붉게 젖은 천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잡으셨습니까?”
끄덕.
고개를 끄덕인 홍단야가 머리가 감긴 천을 수문장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백면사 문량의 머리다. 저잣거리에 내걸어라.”
“예, 옛.”
홍단야로부터 머리를 건네받은 수문장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막 몸을 돌리던 홍단야가 수문장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왜 부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까운 곳에 이대룡 나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대룡이?”
한 나라의 관리의 이름을 막 부르는 홍단야의 태도에 수문장이 움찔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수문장은 처음 홍단야가 자신 휘하의 포졸로 들어왔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 홍단야는 이성계의 심복 중의 심복이라는 이대룡과 함께 자신의 처소를 방문했다. 자신으로서는 감히 올려다보지 못할 쟁쟁한 장군들이 뽑아 든 칼 앞에 수문장은 한없이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 대는 칼 앞에 점잖은 차림의 이대룡은 아무 말 없이 홍단야를 포졸로 받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말이 부탁이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홍단야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하지 말고, 이후 다른 포졸들이 받는 훈련은 물론이고 어떠한 단체 행동도 일체 불참시키라는 말도 하였다.
수문장을 비롯한 다른 포졸들은 처음 홍단야가 죄를 짓고 잠시 몸을 숨기기 위해 숨어든 양반의 망나니 자식인 줄 알았다.
하루하루를 술로 배를 채우며 여자를 안았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밤에 사라진 홍단야가 다음 날 아침에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피를 뚝뚝 흘리는 두 개의 머리를 든 채.
그 머리들의 정체는 바로 이 근방에서 양반을 살인하고 도망친, 도끼 괴수라 불리는 백정 임씨 형제였다. 도끼로 양반 열두 명을 토막 내어 죽인 그들은 관은 물론 현상금 사냥꾼들마저도 포기한 일급 범죄자였다.
그 당시, 아침 햇살을 등지고 홍단야가 자신에게 한 말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구백구십팔 개가 남았다. 너는 나대신 수를 세어라. 나는 죽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니까.”

그 말을 한 날부터 홍단야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여자도 안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는 오직 죽일 뿐이었다.
출처 모를 붉은 오라를 들고 사라진 홍단야는 빠르게는 다음 날, 늦게는 열흘 뒤에 나타났다. 어김없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와 함께였다.
모두 악명이 자자한 일급 범죄자들의 머리였다.
“어디 있느냐.”
“예?”
“이대룡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아! 사(四)초소에 계십니다.”
수문장을 무시한 홍단야가 초소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얼마 걷지 않아 초소에 도착한 홍단야가 아무런 예고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갑작스런 홍단야의 등장에 초소 안에서 차를 마시던 인물들이 눈을 치켜뜨고 홍단야를 바라봤다.
“오랜만이군.”
홍단야를 알아본 이대룡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하는 듯한 인사였다.
“그래. 오랜만이다.”
홍단야의 입에서 나온 반말에 초소 안 병사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칼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고 금방이라도 휘두를 듯한 병사들의 분위기에 홍단야가 이대룡의 옆을 보며 입을 열었다.
“겁쟁이 놈도 말이야.”
“흠흠.”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한 최렴 장군이 주변의 병사들을 보며 손을 까딱이자 곧 이대룡과 최렴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이 초소 밖으로 사라졌다.
희끗희끗 솟아난 흰머리를 추스른 이대룡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엔 누구였나.”
“백면사 문량.”
이대룡이 아! 하는 감탄을 흘리며 다시 한 모금 차를 들이켰다.
“이번이 몇 명째지?”
“모른다. 수는 수문장이 세니까. 나는 죽일 뿐이다. 너희들이 나에게 시킨 것이 그것뿐이니까.”
“말은 바로 하게. 너희라니. 정확히는 대사님께서 시키신 것이네.”
천연덕스러운 이대룡의 말에 홍단야의 얼굴 위로 처음으로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떠올랐다. 숨길 수 없는 지독한 분노였다.
우웅. 우웅.
찻잔에 담긴 물들이 홍단야의 내기에 웅웅 들끓었다.
무시무시한 기운에 최렴이 굳은 표정으로 검을 잡았지만 떨리는 손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연한 사람은 오직 이대룡 하나뿐이었다.
“내 말이 틀렸는가?”
“…….”
침묵으로 대답한 홍단야가 기운을 가라앉히고 앞에 놓인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탁.
“암살이냐, 보호냐.”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세 사람 모두 그 뜻을 알고 있었다. 이내 씁쓸한 웃음을 흘린 이대룡이 말을 이었다.
“지하 뇌옥을 알고 있겠지?”
끄덕.
왜 모르겠는가. 비록 삼십 일이었지만 홍단야 자신도 그곳에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아홉 명의 죄수들이 탈옥했네. 놈들 모두가 문량 따위와는 격이 다른 신법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모두 명나라로 갔을 거네. 어쨌든 이번 일은 그 아홉 명을 잡아 오는 것일세.”
“거절한다.”
단호한 홍단야의 말에 이대룡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태상께서 말하시길, 아홉 명 모두를 처리하면 일급 범죄자 천 명을 죽이는 것을 취소하신다고 하였네. 내가 아까 수문장에게 물었는데 무려 육백이십사 명이나 남았더군.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 때문에 현재 전국의 일급 범죄자들의 수가 무려 두 자리 수까지 떨어졌네. 나 같은 관리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자네는 아니지 않나.”
“…….”
“거기다 자네가 한 짓을 모두 용서하시고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신다고 하셨네. 이 정도면…….”
“……평범한 생활이라고?”
“으음?”
순간 홍단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에 최렴이 숨을 들이켰다.
“평범한 생활? 네놈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더냐! 하늘에게 물어보아라! 만백성에게 물어보아라!”
콰아아아!
흉포한 기세를 뿜어내는 홍단야의 두 눈에서 붉은 적광이 뿜어져 나왔다. 피부를 찌르는 살기에 최렴은 물론 이대룡마저도 공포에 질린 눈으로 홍단야를 바라봤다.
“어어. 으…….”
챙!
검을 뽑아 들었던 최렴이 무시무시한 기운에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검을 떨어트렸다.
“내 지금이라도 당장 네놈을 죽여 버리고 궁으로 가 이성계와 나머지 놈들의 목을 부러트리고 싶지만 무학 대사님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원독에 쪄든 악귀(惡鬼)의 울부짖음이 저럴까.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홍단야의 외침에 최렴의 눈이 새하얗게 풀어졌다.
“……큭.”
이대룡이 덜덜 떨리는 다리를 애써 누르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지,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보게. 태상께서 말씀하시길, 이번 일만 해결한다면 회암사에 계시는 대사와 자네를 완전히 해독해 주신다고 약속하셨네.”
“…….”
여전히 적색 광채를 내뿜는 홍단야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킨 이대룡이 홍단야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간의 고요.
“만약…….”
마침내 입을 연 홍단야가 기세를 지우고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해결하고 은거에 들어가는 나와 대사님을 다시 한 번 잡아 두려 한다면, 내 너희에게 진정한 살계가 무엇인지 보여 줄 것이다.”
“그, 그럼 이번 일을 맡겠다는 것인가?”
“…….”
털썩.
아무런 말없이 털썩 주저앉는 홍단야의 모습에 이대룡이 방금 전 일은 잊었는지 미미한 미소를 흘렸다. 홍단야에게 있어 침묵이란 곧 긍정의 뜻이었다.
“이건 죄수들에 대한 정보일세.”
툭.
품속에서 뻣뻣한 책 한 권을 꺼내 홍단야에게 건넨 이대룡이 말을 이었다.
“아홉 명 모두의 생김새와 이름, 별호, 그리고 무공과 주 무기, 조심해야 할 점이나 약점 등을 쓴 것이네.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보면 되네.”
촤르륵.
이대룡에게 받은 책을 한 번 훑어본 홍단야가 돌연 양손으로 책을 쥐어 잡고 부욱 찢었다. 갑작스런 홍단야의 행동에 이대룡과 최렴이 숨을 삼켰다.
“무, 무슨 짓인가!”
“이 미친놈. 그게 어떤 책인데…….”
부욱. 부욱.
기겁을 하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책 뒷부분을 거칠게 찢은 홍단야가 그나마 남아 있는 책을 편 뒤 잠시 훑어보고는 이대룡을 향해 말했다.
“탐화견(貪花犬) 이호, 마창(魔槍) 구양포, 산신(山神) 묵개, 배덕검(倍德劍) 이량, 파산권(破山拳) 육양소, 색접(色蝶) 양소희, 패력웅(覇力熊) 우용택, 살인도(殺人刀) 임광호, 혈선(血仙)……. 이것들의 목을 가져오면 되는 건가?”
갑작스런 홍단야의 행동에 당황하던 이대룡이 애써 안색을 회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도 상관은 없지만 되도록 은밀하게 처리해야 하네.”
홍단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린 책을 넘겼다. 책에 있는 죄수들은 홍단야 자신 또한 잘 알고 있는 죄수들이었다. 악명이 자자해 조선 제일의 마인들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왜 무공편과 약점편을…….”
이대룡의 물음을 무시한 홍단야가 죄수들의 용모와 이름이 적힌 부분을 품속에 넣었다.
“생김새와 이름이면 충분하다. 정보는 내 머릿속 적의 행동을 축소시켜 내 머리를 굳게 만든다. 상대의 주 무기가 도이니 힘 중점의 기술을 사용하겠지, 신법이 빠르니 치고 빠지는 전술을 사용하겠지 등, 정보는 머리를 굳게 할 뿐이다. 살인은 머리가 아니라 본능으로 하는 거다.”
“으음.”
“끄응.”
전장에서 뼈가 굵은 최렴이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하는 말 하나하나가 모두 맞는 말이었다. 당연 적에 대한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정보는 머릿속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시킨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상대는 움직임에 제한이 없다.
상대가 예상 밖의 행동을 한다면 자연히 잠시간의 틈이 생긴다. 고수들의 싸움에서 잠시간의 틈이란 곧 목숨의 틈이다.
‘무슨 소린지…….’
조선의 제일가는 책략가라고는 하지만 책상 위에서 작전을 세우던 이대룡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고개를 갸웃한 이대룡이 끙 하는 신음을 흘렸다.
“그럼 이번 일은 허락한 것으로 알고 일단 삼백 일치의 해독제를…….”
“육백 일치를 내놔라.”
“육백 일치라니. 그건 너무……!”
“여기서 명나라로 가는 길만 해도 백 일 남짓이다. 삼백 일치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 하지만…….”
“육백 일치를 주지 않는다면 가지 않겠다.”
단호한 홍단야의 말에 이대룡이 신음을 흘리며 최렴과 시선을 교환했다.
조준 장군이 허락한 해약의 양은 오백 일치였다. 지금 가지고 있는 분량이 딱 육백 일치였기에 요구하는 양은 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