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북천무제 1권(6화)
제1장 포졸출도(捕卒出道)(6)


그렇다고 무턱대고 망아산으로 가자니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였다. 지금 망아산의 근처에는 개방의 거지들이 진을 치고 있다 하니 함부로 갔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물론 개방의 거지들은 문제가 아니었다. 개방의 방주와 모든 장로, 그리고 후개와 수호신개가 모두 모여야 겨우 자신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이니까.
하지만 지금 홍단야는 작은 문제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자신의 정체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적당히 이름 높은 무인이 필요했다. 당장에 하북팽가로 가서 자신의 힘을 보여 주며 수색 작전에 동참시켜 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하북팽가와는 안 좋은 인연으로 얽혀 있기에 당장 가서 팽목천의 도에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바로 구파일방 중의 일방인 개방을 이용하는 것.
다행히 자신과 약간 안면이 있는 북경의 개방 지부장이라면 자신의 부탁을 두 팔 걷고 도와줄 것이 분명했다.
타닥.
“으음.”
가볍게 땅에 착지한 홍단야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낡은 건물을 바라봤다. 거지들의 지부답게 건물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정문은 낡다 못해 바람만 불면 넘어갈 정도로 삭아 있었다.
끼이익.
을씨년스러운 소리와 함께 정문이 열리자 건물 안에서 두 명의 거지가 잽싸게 튀어나왔다. 허리에 세 개의 매듭을 매고 있고 손에는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타구봉(打狗棒)을 들고 있는 것이 문지기인 듯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거지였다. 때가 때인지라 거지의 눈에서는 절로 사람을 압도하는 강맹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숨에 목을 움츠릴 기운에 무심한 표정의 홍단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북경 지부장 괴협(怪俠) 남궁진을 만나러 왔다. 안내해라.”
“…….”
너무나 당당한 홍단야의 말에 두 거지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오밤중에 지부를 찾은 것으로도 모자라 대뜸 지부장에게 안내하라니? 하북팽가의 가주도 감히 이럴 수는 없었다.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었다.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거지, 오단의 눈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놈이 감히……!”
츠츠츳.
오단의 몸을 중심으로 강맹한 기운이 들끓었다.
‘역시 안 되는군.’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똑같은 반응을 보여 주는 오단을 향해 짧게 혀를 찬 홍단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궁진에게 전해라, 풍객(風客)이 왔다고.”
“풍객……?”
생소한 별호에 오단의 고개를 갸웃하는 것도 잠시, 곧 오단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푸, 풍객? 서, 설마 천하삼객(天下三客)의 그 풍객이십니까?”
끄덕.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홍단야의 모습에 오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팟!
오단이 황급히 건물 안으로 몸을 날렸다. 오단에게 있어 홍단야가 정말 그 풍객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아니, 풍객과 인연을 맺은 몇 명의 무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풍객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하늘 밑에는 세 명의 손님이 있다더라[天下三客]!
비록 무림의 절대자라 불리는 십일존자(十一尊者)들보다는 한 수 아래로 취급 받지만 무림의 그 누구도 천하삼객을 박대하지 못했다.
그 첫째가 자객문(刺客門)의 문주(門主)인 살객(殺客)이다.
총 구백 번의 살행(殺行)을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사신(死神)!
사람들은 그를 당당히 천하삼객의 일인인 살객으로 불렀다.
그리고 둘째가 괴객(怪客), 달리 괴협(怪俠)이라 불리는 남궁진이다.
본래 검(劍)으로 유명한 남궁세가에서 태어난 그는 오 년 전,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풍객을 만나 무언가를 깨닫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개방으로 투신한 괴이한 인물이었다. 가주의 자리는 물론이고 철봉(鐵鳳)과의 약혼마저 모두 없던 것으로 하자는 말과 함께 그가 남긴 말은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세가를 나가는 몸으로서 어찌 세가가 준 것을 가지고 나가겠습니까. 세가가 준 모든 것을 버리고 나가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남궁진은 자신을 검룡(劍龍)이라 칭하게 만든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끊어 버렸다.
세가가 준 것을 모두 버리겠다는 말대로 평생 검을 잡을 수 없는 손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진정 검을 버린 것이다. 그의 다른 별호가 육지괴장(六指怪掌)이라 불리는 것 또한 이런 연유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객(客)의 별호를 받은 그가 천하삼객의 둘째라는 것은 사람들이 그의 집념에 탄복한 결과였다. 그 누구도 그가 천하삼객의 둘째 자리라는 것에 반문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셋째가 바로 풍객(風客)이었다.
그가 무림에 출현한 적은 채 열 번이 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당당히 천하삼객의 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열 번의 출현 모두가 심상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궁진에게 깨달음을 준 것으로 시작해 여러 절정 고수들에게 배움을 주어 깨달음을 얻게 한 풍객은 한계에 가로막힌 절정 고수들에게 구원의 손길이나 다름없었다. 총 열 번의 도움으로 그는 당당히 풍객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그가 깨달음을 준 고수 중에는 현재 산적들의 단체인 철림맹(鐵林盟)의 맹주(盟主)이자 오왕(五王)의 일인인 참천부왕(斬天斧王) 위지천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지부장에게 있어서는 영웅과 같은 그가 나타났으니 오단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단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그 속도가 대단해 오단과 함께 나타났던 거지가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콰당!
“어이쿠!”
바닥을 구르며 신음을 흘리는 거지를 지나친 인영이 홍단야의 손을 잡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진정 풍객이 맞는가?!”
“오랜만이군.”
“하아.”
꽈악.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기 힘들었는지 젊은 거지가 홍단야의 몸을 꽉 안았다. 홍단야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거지의 머리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에 홍단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마침내 더는 참기 힘들었는지 홍단야가 몸을 비틀며 입을 열었다.
“좀 놓고 말하지.”
“이거 미안하군. 너무 오랜만이라. 하핫.”
젊은 거지가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세 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홍단야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거지 특유의 꼬질꼬질한 옷과 사방으로 뻗친 머리털, 진득한 때가 묻은 얼굴을 가진 거지가 바로 괴협, 혹은 괴객이라 불리는 남궁진이었다.
보통 타구봉을 사용하는 다른 거지들과 달리 남궁진은 개방의 비전절기인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으로 절정에 오른 무인이었다.
오 년.
단 오 년 만에 강룡십팔장을 구성(九成)가량 성취한 남궁진은 네 개의 매듭과 함께 북경 개방 지부의 지부장 자리를 받았다.
한참 동안 홍단야를 바라보던 남궁진이 내심 감탄한 투로 말했다.
“어떻게 된 게 자네는 하나도 늙지 않았군. 오 년 전과 변함이 없어.”
“넌 변했다. 그때는 없던 것이 지금은 있군.”
홍단야의 말에 남궁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심 부끄러운 듯 남궁진이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런가?”
“하지만 아직도 갇혀 살고 있다. 자유롭고 싶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너는 더 자유롭지 못한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남궁진이 오단과 다른 한 거지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주변에 누구도 얼씬거리지 말게 해라.”
“예, 옛!”
평소 남궁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오단이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은 저렇게 온화한 모습을 보여도 남궁진의 별호는 괴이할 괴(怪)가 들어간 괴협이었다. 더군다나 별호답게 성격 또한 괴팍해 그의 손에 맞아 뼈가 부러진 거지가 한둘이 아니었다.
“자, 들어가세.”
온화한 표정의 남궁진이 홍단야를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건물 안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수수한 형식이었지만 거지들이 사는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앉게.”
홍단야에게 자리를 권한 남궁진이 자리에 앉아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모아 가지런히 정리했다.
“차는?”
“써서 먹지 않는다.”
“푸하핫! 역시 자네답군.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남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오 년 전, 자신과 처음 만나던 객잔에서 자신이 권한 차를 거절할 때도 그는 저렇게 말했다. 그 당시 검룡이라 불리던 자신이 권한 차를 그저 쓰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이다. 한바탕 통쾌한 웃음을 흘린 남궁진이 흐트러진 머리를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오 년 전 홀연히 사라지더니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나타났구먼.”
“……미안하군.”
“미안할 필요 없네. 나도 내 나름대로 자네에 대해 조사를 했으니까 말이야.”
“조사를 했다고……?”
남궁진의 말에 홍단야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사라졌다. 다행히 창밖을 보고 있던 남궁진은 홍단야의 눈을 보지 못했다.
“그래. 내 발로 걸어 나온 세가의 힘과 개방의 힘을 빌려 난 자네에 관해 많은 조사를 했네. 어쨌든 자네는 나에게 있어 은인과 같은 존재니까. 자네는 자네의 은인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면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고 아무 일 없이 지낼 텐가?”
“…….”
홍단야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전과 같은 무심한 얼굴로 남궁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적어도 난 아니네.”
숨을 고른 남궁진이 말을 이었다.
“자네를 조사하던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네. 바로 자네의 정체가 풍객이라는 하나의 별호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네. 외양이 약간 변화된 것뿐이지 자네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네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공통점이 뚜렷했네. 대표적으로는 역천마수와 풍객, 그리고 낭혼검객(狼魂劍客), 또…….”
“그만.”
차가운 목소리로 남궁진의 말을 끊은 홍단야가 차가운 안광을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
홍단야의 물음에 남궁진이 침묵으로 답했다. 그것도 잠시, 남궁진이 미미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원하는 것 따위는 없네. 단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을 뿐이네.”
“오 년 전, 모든 것을 대답해 줬을 텐데?”
“그때는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검룡 남궁진으로서지만 이번에는 풍객에게 은혜를 입은 괴협 남궁진으로서네.”
“…….”
침묵으로 일관하던 홍단야가 말했다.
“물어라.”
“자네는 누구인가.”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운 질문이기도 하지만 홍단야 같은 사람에게 있어 그것만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없었다.
‘누구냐라…….’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지그시 남궁진을 바라보던 홍단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